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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yner Apr 26. 2022

느닷없는 일상 단상

#1.

4월 초부터 회사 일로 많이 바빴다.

앞으로도 2주는 더 고생해야 한다. 회사에 처음 입사해 맘고생 많이 했던 조직으로 다시 돌아온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결정이었다. 예정보다 적어도 1, 2년은 앞당긴 결정이었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왔어야 할 곳이었다. 다만 오자마자 맡게 된 업무가 유례없는 물리적 시간을 소요하는 작업이고, 연초부터 신체적 한계에 갇혀 요상하게 흘러갔던 내 바이오리듬은 그 불규칙성으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한 채 흘러가고 있다.



#2.

1월에서 3월까지는 찢어진 발목 봉합 회복으로 고생을 하고,

돌아오자마자 야심차게 외출한 주말 이후에는 코로나에 걸려 시간을 보냈다. 잔기침이 줄어들 때쯤 이번에는 야근이 연이어 계속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회생활도 몇 없는 인맥 유지도 힘들겠다 싶어 이리저리 발버둥 치고는 있다만, 이미 한번 눌린 신경이 후유증을 갖듯, 거리두기가 해제된 이후에도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것 같다. 그 와중에 역경을 딛고 유지해오던 독서모임도 시즌을 마무리하고 다음 시즌을 준비 중이나, 내가 무사히 일정을 진행할 수 있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등록자 미달에 따른 자연스러운 파투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본격 글쓰기 모임을 자처하는 커리큘럼은 힘을 더 뺏어야 했나.



#3.

덩달아 최근 서울 본가를 못 가고 있다.

연초 연이은 강제 병원행으로 방바닥만 기어 다니던 시기, 그래도 맛있는 건 많이 먹고 살도 포동포동 쪘는데, 요즘은 도통 먹는 것도 부실하고, 마음이 촉박하니 입도 짧다. 다행히 계속 뭔가를 넣고는 있어서 살은 안 빠지는데 연초부터 운동 불가 흐름과 맞물려 근육은 빠지고 자연 순살의 몸이 되는 거 같아 안타깝다. 지난번 본가에 갔을 때, 아빠가 태블릿에 글을 몇 줄 적어 보여준 적이 있다. 유년 시절이라는 제목에 처음 썼다고 보기에는 이미 수없이 머릿속에서 되뇌었을 어렸을 적 살던 집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적혀있었다. 아빠가 계속 심심해서 계속 그렇게 글을 썼으면 좋겠다.



#4.

올해도 내 행복 감각은 여지없이 상대성에 입각해 움직이고 있다. 스물네 바늘을 꿰맨 자국이 쓰라려 편히 누워있기도 힘들 때에는 밝은 조명이 켜진 편의점에서 살만한 것이 뭐 있나 살피는 일이 그리웠고, 두어 시간에 한 번씩 10분가량을 누웠다가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보고서를 고칠 때는 창이 뚫린 가게에서 팔을 한쪽 밖으로 내밀고 맥주 한잔 하는 게 그렇게 그리웠다. 최근 몇 년 규칙적으로 남는 여유 시간을 별 감흥 없이 운동과 약속의 반복으로 메꿀 때는 잘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시간과 체력과 돈의 결핍 트라이앵글 속에서, 이번에는 시간이다.



#5.

마음을 담은 글을 쓴 지 좀 된 것 같다.

아무래도 상황에 쫓기거나, 직접 경험 또는 직접 감정이 아닌 글을 써야 하는 경우 마음이 잘 담기지 않는다.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목과 어깨 팔꿈치를 거쳐 손가락으로, 키보드의 신호가 모니터에 입력되는데, 중간 과정 어디쯤이 생략되고 만다. 마음 부분일 거다. 그런 글을 쓸 때면 몸에는 티가 난다. 입력된 화면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손가락이 떨리지 않는다. 숨이 가빠지거나 마음이 졸여지지 않는다. 머리는 뜨거운데 몸은 건조하다. 글이 진심을 굳이 요하지 않을 때 뇌와 손가락 만이 글을 적는다. 그러나 마음이 필요한 글을 쓰려면 반드시 신체의 협조를 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 글이 누군가를 두근거리게 한다면, 그건 아마도 가수가 수없이 반복해서 불렀던 오래된 히트곡에 관객이 눈물을 글썽이는 그런 무대쯤이 아닐까. 마음을 쓰지 않은 가수를 나무랄 수도, 마음 없는 노래에 감동받은 관객도 탓하기도 애매하지만, 분명한 건 가수에게 그 무대가 이전처럼 행복하지 않았을 거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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