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이 주는 삶의 영양학적 이로움

by Dyner

0.

단절은 어려운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1.

외부와 나 자신을 분리하는 레이어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감옥과 같이 극단적 형태의 단절이 아니더라도,

요즘 같은 시대에는 집 인터넷이 끊긴다든가,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는 것만으로도 외부 세계로부터 단절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좀 더 약한 형태의 단절도 있다.

연인 또는 친구와 늘 메신저나 통화를 통해 실시간으로 연락을 하다가

어느 날 이별이나 싸움으로 인해 연락할 상대가 사라진다든가,

부모님과 같이 살던 집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취방에서 느끼는 감정 단차도 있다.

결혼 생활을 하던 사람이 갈라서게 되는 경우에도,

꼭 그 사람이 없어져서 느끼는 불만감이 아니라

단지 같은 공간 안에서 같이 생활하던 누군가가 사라지는 경우,

우리는 단절된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어딘가와 연결되던 끈이 뚝 끊긴 느낌,

누군가와의 감정적 공유가 단절된 느낌.

그 사유가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한 휴식이나 공백이 아니라,

상대방에 의한 일방적인 것이라면

안락했던 방 안은 금세 차갑고 쓸쓸한 감옥으로 변해버릴지 모른다.


그리고 생각보다 사람들은 이 감각에 유약하다.

사람 자체가 원래 그런 단절에 약한 사람일 수도 있고,

혹은 오랜 시간에 걸쳐 감정적 연결에 대한 BAU가 높아진 탓일지 모른다.

이 결핍은 대상에 대한 질투나 집착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불안 장애를 가진 사람처럼, 의지할 수 있는 또 다른 무언가를 향해 떠나게 하는 동력이 된다.


그래서 최근 단절을 경험한 누군가는 가족을 더 자주 떠올리거나 새로운 약속을 잡는다.

외지로 파견을 가거나 생활권이 바뀌는 경우, 갑자기 연애를 시작하기도 한다.



2.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단절은 개인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스스로를 되돌아볼 계기를 만들어준다든가,

그동안 부족했던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를 회복할 여유를 줄 수도 있다

자기 계발에 몰입할 기회를 주기도 하고,

외부 활동에 소모될 뻔한 에너지를 내부의 무언가를 위해 할애할 수도 있다.



3.

최근 나는 유사한 경험을 했는데,

그것은 어떤 관계에서의 단절이 아니었다.

가끔씩 틀어놓던 실시간 라이브 방송이 없던 어느 저녁이었다.


내가 사는 자취방은 보통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혼자서 중얼거리거나 특별히 통화를 자주 하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화나 드라마 같이 어떤 콘텐츠에 대한 갈증이 큰 편도 아니었다.

그 자리를 라이브 방송이 비집고 들어왔다.


B급 아마추어 감성이 이 매체의 주된 특징으로 거론되지만,

이 매체가 가진 강력함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동한다.

그것은 바로,

실시간으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연결성'이다.

내가 이 회사의 주식을 오랫동안 보유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이 매체는 사람들의 공허한 감각을 건드리고 있었다.


이는 유튜브나 OTT, 뉴스, 책과는 다르다.

시간적 지연 없이, 화자부터 청자까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복잡 다단한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순한 1차원적 연결 방식을 가지고 있다.

최소한의 규제도 한 몫한다.

작가나 피디, 방송국이라는 이질적인 주체들의 개입이 적다.

소소하고 사적인 감정의 교류를 형성하는데 유리하다.

이러한 은밀한 연결성은 사람들의 공허, 심리적 연대를 충족시켜 준다.


보지 않는 텔레비전이나 듣지 않는 라디오를 배경 소음으로 켜두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보다 덜 격식 있고 편하다.

나만 후줄근한 잠옷차림이면 동질감은 약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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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제는,

우리에게 '정격 용량'이 있다는 점이다.

개인은 저마다 감당할 수 있는 용량에 한계를 가진다.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이 연결된 감각에 적응해 버린 우리는

연결되어 있는 동안 끊어져 있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생각보다 연결되어 있지 않을 때 많은 것들을 해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생각보다 개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나에게도 그렇다.



5.

나에게 외로움이 필요하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오랫동안 조각들처럼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맞춰진다.


혼자 있는 시간을 허전하게 느끼며 채워 넣었던 약속들도,

감정적 고양(high) 상태로,

'하지 않아도 단기간 내 티 나지 않는 많은 것들'을 오랜 시간 내버려 둔 탓일지 모른다.

정기적으로 시험을 보던 학교 생활 때는, 이런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소되고 균형이 잡혔다.

자유와 일탈로 긴장이 풀어지더라도,

일정한 사이렌이 울리면 나는 다시금 자세를 고쳐 잡고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내가 직장 생활을 한지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당장의 급한 보고나 업무 지시가 아닌 상황에서 나는 가능한 한 많은 농땡이를 부렸다.


한 회사를 꾸준히 다닌 것도,

그 회사가 다행히 먹고살만한 형편을 제공했던 것도,

그리고 주변에 그런 사람들로 가득했던 것도

모두 나의 성장 유기에 영향을 주었다.


나는 여러모로 이 긴장 해제 모드가 마음에 들었고,

그것은 연봉이나 워라밸 같은 단어들로 설명하기 용이했다.

나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내가,

성장할 필요가 없는 이 환경이 마음에 들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내 취향이거나

그동안 고생했던 나에 대한 보상,

심지어는 내 성격이 가진 특질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이것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겼고,

이런 종류의 충전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규정지었다.

더 커지지 않는 나에게 괜찮다며 다독이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그와 동시에,

마땅히 받았어야 할 채찍이나 교육의 자극을 차단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러 가지 방법들로 나를 외롭지 않게 만드는 데에 특화되어 갔다.

그러면서 나는 성장하지 않는 감각에 적응되어 갔다.





6.

달라질 수 있을까

기대보다는 의심이 앞선다.


자기 객관화는 치유에 도움이 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동력을 갖지 못한다.


이 글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오랜 시간을 공허하게 내버려 두었다.

어쩌면 이 깨달음에 필요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 정체가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운동이 됐든 공부가 됐든, 혹은 노후를 위한 전략적 자기 계발이 됐든.

다시 나를 성장시킬 때가 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 글은 성지가 될 수 있을까

잠시 타다 말 불쏘시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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