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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SIA Sep 15. 2020

<아메리칸 스나이퍼>

침묵하지 않는 자의 침묵에 대해 전하는 영화

출처: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


공식 사살 기록 160명.

비공식 사살 기록 255명.

미군 역사상 최다 저격 기록을 보유한 최고 실력의 스나이퍼.

누군가에겐 ‘전설’이라 불리우고

누군가에겐 ‘악마’라 불리우는 사람.


이것이 크리스 카일(Chris Kyle)이라는 한 사람을 설명해왔던 수식어들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명예롭고 무거운 말보다 그 무게를 감당해야 했을 그의 뒷모습에 더 마음이 기운다. 슬프고도 허망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퓨리>의 대사 중 하나인 ‘이상은 평화롭지만 역사는 폭력적’이라는 말은 2000년대의 크리스 카일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에도 여전히 대응한다. 전쟁의 형태는 다양해졌고, 무기와 기술은 발전했으며 각자의 이상은 위대하고 우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 전쟁 속에서 살아간다. 전쟁의 정당성 같은 건 이미 이 영화의 초점에서 멀어져 있다. 승자도, 패배자도 없이 되풀이되는 이 전쟁 속에서 죽음과 고통 속에서 헤매는 건 한낱 개인일 뿐이다.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 죽음의 길이 아닌 상생의 길을 모색할 때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한마디로 침묵하지 않는 영화다. 크리스(브래들리 쿠퍼)는 9/11 사태 이후 테러의 수장을 소탕하기 위해 네이비실 저격수로서 이라크에 파병된다. 어릴 적 그의 아버지는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양치는 개’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카일은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테러 사건 보도를 보면서 몸소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운명적으로 직감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단순히 이 애국심과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사나이를 영웅담으로써 포장하고자 만 했다면 여느 전쟁영화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지금까지 <아버지의 깃발>이라는 작품에서는 이오지마 성조기 게양을 뒤로 만들어진 영웅주의에 대하여,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에서는 엔진 사고로 위기에 처한 여객기를 수상 착륙으로 155명의 승객들을 구조할 수 있도록 지시했던 설리 기장(톰 행크스)을 보여주며 이 세상 곳곳의 영웅들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앞세웠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업적을 미화하기보다는 인물들이 영웅적인 행위에 이르기까지의 무거운 책임감과 혼란스러운 감정들에 더 주목했다. 이를 테면,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는 이라크전이 벌어지고 있는 교전 상황뿐만 아니라 카일이 다음 파병을 기다리며 잠시 가족들과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시간들도 교차하여 보여줌으로써 조국과 가족을 사랑하는 멋진 사람이라는 겉모습 이면에 무력충돌이라는 끔찍한 상황 속에서 사람이 얼마나 생명력을 잃고 방황하는 전쟁기계가 되어만 가는지를 처절하고도 낱낱이 탐색한다. 그렇게 이 영화는 당시 이라크전 상황에 직접 뛰어든 것만 같은 실감 나는 연출로 몰입력을 높이면서도 한 발 더 나아가 영웅심리에 둘러싸여 간과할 수 있었던 카일이라는 ‘사람’의 진심을 직접 들여다보도록 있는 힘을 다해 우리를 전장으로 끌어당긴다.


그렇다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크리스 카일의 진심은 무엇인가. 그는 160여 명의 사람들을 사살했던 일에 대한 심정을 물었을 때 자신이 사랑하는 조국과 가족들을 위해 한 일이며 후회하는 게 있다면 더 많은 전우들을 구하지 못한 것뿐이라며 단호히 대답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그가 손에 쥔 것이 죽음을 부를 수도 있는 방아쇠여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총구가 연인에게 선물할 곰인형에 향하는 순간과 그 총구가 사람에게 향하는 순간은, 우리에게 엄연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크리스 카일의 전쟁의 도덕성에 관한 질문을 받자 ‘그가 비록 대놓고 전쟁의 도덕성에 대해 회의를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뇌리에 늘 그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고 본다’는 답변을 한다. 영화 속 몇 장면을 통해 적어도 감독이 그리고자 한 크리스 카일이란 인물은 전장에서의 인간의 생명 및 존엄성 그리고 군사 이익에 대한 딜레마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을 경험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제1차 파병 때, 카일이 맞닥뜨린 첫 저격 상대는 히잡을 쓴 여인과 수류탄을 들고 아군을 향해 달려오는 아이였다. 그는 첫 번째 임무에서부터 애초에 설정한 저격 대상인 ‘병역 연령대의 남성’이라는 범위에서 벗어나는 상황을 직면한 것이다. 교전수칙에 따라 알아서 판단하라는 지시에 따라 카일은 그들을 사살한다. 게임에서 승리한 듯 통쾌하게 웃는 옆에 있던 동료와 달리 카일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주었던 자신감과는 다르게 미묘한 심경의 변화가 얼굴에 드러난다. 지금껏 자신이 믿어왔던 신념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예감한 듯이. 카일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교훈에 따라 ‘양치는 개’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철칙을 실천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가족과 미국을 위협하는 자들에게는 분노를 느끼는 것이 당연했고,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게 사명이었으며, 파렴치한 테러범들은 죽어 마땅한 악마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두 눈으로 목도한 실상은 조금 달랐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훈련해왔던 그의 실제 저격 타깃은 ‘악마 같은’ 테러범들이 아니라 여자와 아이였다. 사실 카일은 성경을 닳도록 지니고 다녔지만 이를 제대로 들여다본 적은 없다는 것을 영화 속 몇 장면을 통해 눈치챌 수 있다. 어쩌면 성경을 지니는 것만으로 위안과 겸허함을 느끼며 살아왔던 그의 행동처럼, 그의 애국심과 책임감과 분노 역시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성경책과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의 신념은 몇 차례의 파병과 가족의 품을 오가는 동안에 조금씩 금이 간다. 이제 막 첫 아이를 출산한 아내 타야(시에나 밀러)가 정신이 나간 듯이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카일에게 전하는 살아 돌아오라는 당부의 말은 그를 조금 놀라게 한다. 내 편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싸우는 게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닫는다. 그가 안전하게 살아 돌아오는 것 역시 그가 지켜야 할 약속이었다. 카일 덕분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에게는 ‘전설’이자 ‘영웅’이었지만 동생과 동료 마크가 조소 섞인 말투로 되물었던 이 전쟁의 무의미함은 그의 별명조차 무색하게 만든다.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있었던 전우는 갑작스럽게 죽음을 고하고, 또 다른 전우는 나의 것일 수 있었던 죽음을 대신한다. 아버지는 어린 카일에게 총을 절대로 내려놓아선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가 주시하고 있는 곳에서 한 소년이 총기를 들려고 하자 카일은 애원하듯 읊조린다.


“제발 들지 마. 어서 내려놔.”


실제 무력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에서 저격 대상을 구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그로 인한 민간인 피해 사례도 적지 않다. 문제는 전통적으로 국제인도법은 전쟁이 국가 간의 투쟁일 경우에 예정하여 제네바협약 등을 창설했던 것으로, 9/11 사태 이후의 테러 행위들은 비국가적 주체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어 애초에 상정한 범주에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또한, 국제인도법에서 ‘민간인’의 성격을 네거티브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어 그 정의가 확실하지 않은 측면이 있고, 최근에는 군인이 하던 적대행위를 민간인이 대신해 직접 가담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 역시 민간인을 국제인도법의 일환으로 보호할 수 있는지가 불명확하다. 이로 인해 2009년에는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서 ‘적대 행위 직접 가담에 관한 해석 지침’을 내놓기도 하였다. 무력분쟁의 당사자에게 요구하는 근본적인 규칙 중 하나인 ‘구별의 원칙’(민간인과 전투원을 구별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르면 분쟁 당사자의 군대 구성원이 아니고 국민 총소집령에 응한 자가 아니어야 민간인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리고 해당 민간인이 적대행위에 ‘직접’ 가담한 것이 아니라면 ‘제네바 제 1의정서 제 4편 제 51조’에 따라 무력충돌에서의 공격으로부터 일반적 보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보장된다. 지침 상으로는 민간인 트럭 운전사가 전투가 진행 중인 최전선에 탄약을 운송하는 행위를 전투작전의 불가분의 일부로 간주한다면 ‘적대행위 직접 가담’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이에 대입해 본다면, 카일이 살해한 여성과 아이는 주어진 상황에서는 구별의 원칙에 따라 제대로 확신할 수 없으나 적어도 아군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려던 민간인의 행위는 ‘적대 행위의 직접 가담’이라 판단 내리기에 충분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후에 빈 라덴의 지원을 받고 있는 자르카위와 그의 참모들을 추적하기 위해 정보원을 찾는 가옥 수색 임무는 일정 부분 민간인의 안전에 위협이 되는 점들이 있다. 우선 단 시간에 정보를 추적해야 한다는 한계로 인해 군인들은 1시간에 10채의 집을 수색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불가피하게 비례성의 원칙(제1추가의정서 제 51조 (5)(b))에 위배된 채 위협적으로 민간인들을 대우할 수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도살자라 불리는 자르카위의 심복의 정보를 얻기 위해 ‘셰이크’에게 요구하는 돈을 주고 안전을 책임져준다는 약속을 하지만 이 사실이 들통나고 말아 셰이크는 도살자와 그 일당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는 미군에게 민간인이 알고 있는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는 적군의 수하에 있는 민간인들이 보복을 당할 우려가 있음이 충분히 예상된다면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음에도 철저한 예방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국 전투원들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이 국제인도법에서 정의하는 민간인 보호 범위를 길게 나열한 것은 뒤늦게 크리스 카일이라는 사람이 한 일들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거나 합리화하기 위함이 아니다. 실제로 전쟁이나 무력충돌 상황에서, 그것도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위와 같은 지침들을 모두 대입해 전투원과 민간인을 구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믿고 있는 것과 보고 있는 것 사이의 괴리에서 헤매었던 카일의 모습 자체가 국제인도법이 가지고 있는 현 위치라는 생각도 든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호하고 긴박한 교전 상황 속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또한, 국제인도법의 이상이 무력충돌 상황에서의 민간인 보호에 있으나 해당 조항들을 위반한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당사국에서 관련 국제 조약을 체결하고 있거나 국내법을 통한 ‘인도에 반한 죄’의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구속력과 실효성이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인도법의 존재 가치는 그 한계들을 훨씬 넘어서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한계들을 ICRC 역시 인식하고 있으며, 지속적인 논의를 통해 민간인 보호 범위를 구체화하기 위해 해당 조항들을 보완하거나 새로 도입하는 등의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방점은 이러한 과정과 노력을 통해 ‘최소한의 선’이 지켜진다는 것에 있다. 그 선마저 없다면 무력충돌 혹은 더 심한 대규모 전쟁 상황 속에서 벌어질 수 있을, 그리하여 쉽게 무시될 수 있을 인간의 존엄성을 마지막까지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데에서 그 의미가 크다. 우리는 이미 폭력적인 역사를 통해 그 선이 지켜지지 않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 지를 지켜봤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잔인한 만행으로 인해 유태인들을 비롯한 희생자들이 겪었던 고통과 상처를 다시 반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간인 단 한 명의 생명까지 지켜내겠다는 선이 존재할 때야 비로소 이상이 폭력이 되는 사태를 예방할 수 있다. 민간인을 보호뿐만이 아니라 크리스 카일처럼 전쟁에 파병된 군인들에게도 이 선은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불가피한 자신의 임무에 대한 적정한 기준과 방향을 마련하여 그들 스스로가 죄의식에 갇혀 괴물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법은 방아쇠를 당기려는 자의 손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다.


한편,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침묵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전쟁으로 ‘희생한 자’들을 숭고한 마음으로 기린다는 의미이다. 영화는 크리스 카일이 제대한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한 상이군인에게 총을 맞아 사망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고통을 무릅써왔고, 제대 후에도 상이군인들을 위해 지원하며 그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했던 뼛속까지 미군이었던 그가 이처럼 아이러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은 씁쓸한 결말이다. 카일의 실제 추모 장면 이후에는 어떤 웅장한 음악도 흐르지 않은 채 오로지 정적 속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조국을 사랑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에 대한 묵념의 시간인 것이다. 하지만 그 묵념의 시간 동안 명예롭게 조국을 수호한 자들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전쟁으로 인해 현장에서 희생된 많은 민간인들 역시 이 마음에 남아있다. 승리자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이 전쟁의 끝에서 피로 얼룩진 양측 모두의 죽음과 고통을 바라보고 있자면 이 끝나지 않는 싸움의 연속에 조금씩 지치고 마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여기에 침묵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가 더 남아있다. 바로 기로에 서서 선택을 앞둔 이들이 침묵으로 망설이는 숱한 시간들에 대한 희망이다. 정적 속의 엔딩 크레딧을 벗어나 다시 영화의 첫 장면을 떠올려본다. 크리스 카일은 약 180m 거리의 히잡을 쓴 여인과 수류탄을 들고 아군을 향해 다가오는 아이를 조준하고 있다. 그는 그 민간인들을 확인하고 끊임없이 교전하며 교전수칙에 따라 최선을 찾기 위해 고민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가 저격하기 바로 직전, 플래시백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린다. 총 2시간 12분의 러닝타임에서 장장 25분가량을 할애하여 카일의 과거 서사를 보여주고 카일이 이 선택의 순간까지 오게 된 그의 일생(history;역사)을 되돌아보게 한다. 사람의 선택에는 역사가 따른다. 그가 방아쇠를 당겨 날아간 총알은 그의 일생이, 그리고 미국의 역사, 더 나아가 세계의 역사가 모두 함축되어 저격 대상에게 치명상을 남긴다. 만약 그의 일생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고, 어떤 경험을 했으며 어떤 가치관을 체화했는지에 따라 그는 또 다른 선택을 했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어떤 역사를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언젠가 또다시 같은 총을 손에 쥔 자의 선택 역시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까, 불가피한 무력 충돌에 있어서 서로가 찾는 이상에 부합하는 최선을 찾고자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개개인이 이를 적극적으로 협조하려는 태도를 가질 수 있을 때 조금은 ‘평화’라 불리는 것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저격총을 쏘는 바로 그 순간에는 정작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총알이 발사되어 표적의 심장에 도달하고서야 우리는 실제 그 소리를 듣는 셈이지만 총알이 소리보다도 빠른 속도로 발사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렇듯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바로 그 침묵의 순간에. 우리가 그 짧은 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뒤이어 들려올 소리는 달라질 것이다. 죽음의 공포에서 떨고 있는 자들의 비명소리, 혹은 따사로운 햇살 아래 아이들의 사랑스런 웃음소리. 폭음과 폭격의 소리, 혹은 평화롭게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우리는 이 침묵의 끝에 어떤 소리가 다가오길 바라는가.


참고문헌:

박흥진,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ECONOMYChosun」, http://economychosun.com/client/news/view.php?boardName=C03&t_num=8661  

성재호, “[발제 Ⅱ-1 : 무력충돌 시 개인보호를 위한 당면과제와 도전] 국제인도법의 최근동향”, 「인도법논총 30호」, 2010.12

신창훈, “무력충돌시 “민간인”에 대한 재정의 : 새로운 무기 기술과 전투 유형의 발전에 따른 민간인 보호 문제의 재조명”, 「인도법논총 35호」, 201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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