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어려운 대도시에서 나를 사랑할 용기를 가져다주는 영화
네가 너 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어.
예전에 박상영 작가의 동명의 작품을 책으로 접했던 기억이 있어 우연히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의 예고편을 보게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시선이 꽂혔던 것 같다. 긴가민가 했었는데, 거기서 등장하는 배우 김고은이 연기한 여자 주인공의 이름을 듣자 확신이 들었다. 재희. 마치 원작 속 남자 주인공 '영'(영화에서는 '흥수')이라도 된 듯, 오래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둘도 없는 마음의 짝꿍을 재회한 기분이랄까.
원작이 있는 작품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는 사례는 계속해서 쌓이고 있는 추세다. 개인적으로는 똑같은 스토리를 어떤 매체를 통해 먼저 접하느냐에 따라 나도 모르게 편견이라는 게 생겨서 어떤 것이 원작인지와 상관없이 두 번째로 만나는 작품이 약간 만족스럽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대도시의 사랑법>은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재희와 흥수, 독특한 성격과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의 특별한 우정을 여실히 살려내면서도 전혀 다른 작품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의 흐름을 더욱 대중적으로 각색한 덕분인 것 같다. 말하고 싶은 것들이 잘 정돈되어 있다고 느껴졌다. 영화 속 재희의 이런 대사가 있다.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어.' 이 말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는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즐기지만, 그것이 타인의 시선에서는 '좀 특이한 애' 혹은 '가벼운 애'로 비치고 더 나아가 사람에 대한 배려와 존중조차 받지 못하는 재희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게이이면서도 가정환경과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자신의 비밀을 숨기고 살아가야 하는 흥수의 이야기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그들만의 특별한 사정으로 관객에게 호소하지 않는다. 20대와 30대의 세월과 대학시절, 취준 현실과 직장 생활, 결혼과 같은 대한민국 청춘들이라면 공감할 만한 고민들을 그들도 함께 경험하며 우리가 젊은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시련, 남몰래하는 질투, 속 좁아 보일까 봐 심한 말로 둘러댄 변명들, 숙취처럼 밀려오는 지우고 싶은 기억들, 하지만 돌이켜보면 지금보다 더 정신없이 즐거움이 많았던 우리들의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게 한다. 그렇게 <대도시의 사랑법>은 이 특별한 두 사람을 통해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점차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건 아닐까. 재희만큼 자유로웠고 흥수만큼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렇게 우리는 이 대도시에 각자만의 방식으로 녹아든 건 아닐까.
영화 자체가 인물 중심이고 캐릭터가 강하기 때문에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소화력도 매우 중요할 것이다. 내일 세상이 망할 것처럼 오늘을 만끽하고, 마냥 센 척하는 게 아니라 사랑 앞에서는 하염없이 온 마음을 쏟을 만큼 사실은 순수할 만큼 솔직한 사람인 재희라는 캐릭터는 사랑스러우면서도 다양한 연기 변신을 보여주는 배우 김고은에게 참 잘 어울렸다. 흥수 역을 맡은 노상현 배우도 달리 보였다. <파친코>에서는 어른스럽고 묵묵한 남자였다면 여기서는 어딘가 바보 같기도 하고 욱 하면 절대 참지 않는, 그래서 더 현실에 있을 법한 사람 냄새나는 모습이었다. 특히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디어 매체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성소수자 연기가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어쩌면 편견처럼 보일 수 있을 정도로 과장해서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에서의 흥수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게이라는 면모를 '의식적으로'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서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상업영화는 클리셰라고 볼 수 있는 장면들도 많고 깊이감 없이 마냥 흥행 성공 방식을 따르는 사례들이 많아서 영화를 보고 있을 때는 거리낌 없이 재미있는데 돌아서고 나면 마음에 남지 않는 영화들이 많았다. 그러나 <대도시의 사랑법>은 클리셰도 있고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조화로워서 대중적이다 싶으면서도 계속해서 마음에 남는 무언가가 있다. 답은 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공감을 자아낼 만큼의 깊이감의 차이인 것 같다. 그게 울림이 아닐까. 아직 우리나라 사회에서 예민할 수 있는 주제인 성소수자와 여성성에 대한 문제를 한 데 묶어서 가감 없이 터놓으면서도 '나답게 살고 싶다'는 우리 청춘 '전체'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때문에 마음속에 있던 벽이 하나 허물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짜임새뿐만 아니라 마음에 콕콕 박히는 대사들도 그렇다. 앞서 언급한 대사와 함께 '난 보고 싶단 말이 사랑한단 말보다 더 진짜 같아'라는 말이나 '사랑은 보호 필름 떼고 하는 거야'와 같은.
보는 내내 피식 웃게 되면서도 자꾸만 울컥하게 된다. 우리와 전혀 다를 것만 같은 재희와 흥수가 우리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어느 순간부터 그 시절의 내가 못다 한 용기가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실현될 수 있기를 한 마음으로 응원하며 보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게 된다. 재희와 흥수를 사랑하듯 나는 나 스스로 역시도 이 어렵지만 아름다운 대도시에서 있는 힘껏 잘 살아보기를, 마음 죽이지 않고 나를 사랑할 수 있기를 그토록 간절히 바라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그 마음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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