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그런 영화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진실은 사람들이 믿기 나름이라는 또 다른 진실을 속삭이는 영화

by FREESIA

본 리뷰는 1ROW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소정의 활동비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또 아르망이 문제네요.
common (2).jpg 영화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흔히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라고 하지만 현실은 저 멀리 산을 향하기 위해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 사이를 수 없이 지나쳐야만 한다. '진실'도 그러하다. 갑자기 이유 없이 흐르는 코피처럼 어떤 일은 정말 별 거 아닌 해프닝으로 넘길 수도 있지만 실은 어떤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조증상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완전한 진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새삼스레 무겁다. 숲을 보기 위해 수많은 나무를 거쳐야 한다. 나무 없는 숲은 없다.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에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아들 아르망과 관련해 담임인 순나의 호출을 받고 학교로 가게 된다. 그날의 날씨는 흐리고 이상했으며 학교의 화재경보기는 이유 없이 불연속적으로 시끄럽게 울려 댔다. 구체적인 내용을 듣지 못한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6살 아이가 오래도록 머물렀을 교실에 앉아 순나와 함께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렸다. 머지않아 문이 열렸다. 폭행 사건의 피해자인 욘의 부모(사라와 앤더스)였다.

common (5).jpg
common (1).jpg
common.jpg
영화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흩어져있던 퍼즐 조각들을 하나씩 맞추듯 조금씩 밝혀지는 진실은 미스터리해서 긴장감이 맴돈다. 이를 테면, 이 사건에서 '폭행'은 엄밀히 말하자면 철없는 어린애들이 한 번씩 저지를 법한 싸움 정도가 아니라 '성폭행'에 가깝다는 사실, 엘리자베스는 욘의 부모와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였고 특히 사라와는 꽤나 껄끄러운 인연이라는 사실, 배우라는 직업과 함께 보여지는 이미지와 달리 엘리자베스가 숨기고 있는 그녀의 본모습. 이 모든 게 그 어떤 회상씬 없이 오로지 몇 안 되는 등장인물들의 말들을 통해서 서서히 드러난다. 특히 이 영화에서 독특한 지점은 여기에 있다. 바로 어린아이들의 폭행 사건을 정리하고 수습해야 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아르망과 욘은 한 번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진실은 오로지 어른들의 말을 통해서 재구성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사람들이 '진실'을 대하는 태도를 하나의 실험적 상황에 빗대어 보여주려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과 같이 명확하지 않은 어떤 상황을 규명하고자 할 때 사람들은 때때로 객관적인 진실을 찾으려 한다기보다 조금씩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과장하거나 별다른 상관이 없는 또 다른 원인을 가져와 자신의 명분을 채우려 할 때가 있다. 그러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이와 같은 논쟁에서의 승자는 명백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3자의 마음을 휘어잡을 만큼 그럴듯한 논리로 내 편을 더 많이 만드는 사람이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마치 하나의 경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진실에 더 가까운 말을 하는 사람이어도 한 번 자신의 약점을 들키게 되면 그 순간 케이오되어 쓰러지고 만다. 또다시 화재경보기가 울린다. 마침내 이 게임은 끝났고 승자와 패자가 가려졌다.

common (3).jpg 영화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이 영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아무래도 엘리자베스일 것이다. 레나테 레인스베 배우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서 사랑스러우면서도 자유로운 삶과 사랑을 갈망하는 '율리에'를 연기하기도 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섬뜩할 정도로 지독한 심연의 끝을 보여주었다. 특히 학교 선생님들이 아르망에게 취해질 조치들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엘리자베스가 눈앞의 상황이 어이없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분간 계속해서 숨 넘어가듯 웃어대는데 정말 한 마디로 '미친' 것만 같았다. 조커가 떠오를 만큼!


스타일리쉬 심리 스릴러라는 소개에 걸맞게 이 영화는 특히 스토리라인은 은밀하게 감추면서도 그 사이에 갈등하는 각 인물들의 감정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아붓는 듯하다. 예를 들어 각 인물들이 홀로 있거나 누군가와 비밀스럽게 대화를 나눌 때에 어두운 계단, 끝없는 복도, 불빛만 새어 나오는 스크린이 있는 교실과 같이 학교의 다양한 장소들이 배경으로 나오는데, 그 안에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불안은 더 심화되고 이야기도 절정을 향해 치미는 것만 같다. 행위예술처럼 묘사하는 장면도 등장하는데 그런 것들이 스토리를 다소 모호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 자체로 이 영화만의 차별화된 분위기를 형성한다. 학교에서 풀어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사건은 주로 엘리자베스와 사라의 입을 통해서 '말'로 실마리를 잡아가는 반면에, 정작 두 사람이 처한 답답한 현실은 '행동'으로 묘사되는 셈이다. 앞서 언급했듯 엘리자베스가 미친 듯이 웃는 모습이나 사라가 남편에게 소리 내지 않고 고함치는 것처럼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 마지막에 빗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모습들처럼 말이다.

common (4).jpg 영화 <모든 것은 아르망에서 시작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건의 전말 같은 것 따위는 사실 우리들에게 있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잔혹하게도 진실은 사람들이 믿기 나름인 것 같기도 하다. 나무 없는 숲은 없다고 했다. 완전한 진실에 도달하기까지 무수한 갈등과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감정의 씨앗이 있기 마련이다. 적당한 거리에서 보면 온전한 하나의 숲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리저리 가지를 치고 있는 나무들이 빼곡하다. 애초에 그럴 듯 해보이는 숲을 보며 가장 완전한 진실이라 믿는 행위만큼 무의미한 게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심리스릴러 #행위예술적인 #스타일리쉬한 #비밀스러운 #여운이남는 #1ROW #원로우 #영화리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해 크리스마스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