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의 끝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나의 목소리로 노래하리
본 리뷰는 1ROW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소정의 활동비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내 삶이 곧 오페라예요. 오페라에는 이유가 없어요.
<재키>와 <스펜서>에 이은 영화 <마리아>는 예리한 시선과 풍부한 감성으로 여성 서사 3부작을 만들어낸 파블로 라라인 감독의 작품이다. 이 작품 속 여성들의 공통점은 지나간 역사 속에서 화려한 인생을 살아오며 많은 이들의 사랑과 선망의 시선을 받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파블로 라라인이 재조명하고자 하는 것은 이 여성들의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삶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이나 불안했던 인생의 단면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재키>는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미망인이 되어 어지러운 안팎을 책임져야 했던 재클린 케네디의 삶을, <스펜서>는 왕실 가족이 별장에서 보내는 3일간의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의 이야기로 구속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다이애나 스펜서의 삶을, 그리고 <마리아>는 세기의 소프라노라 불리었지만 더 이상 예전만큼 노래하지 못하는 마리아 칼라스의 마지막 일주일을 담아내고 있다. 이처럼 파블로 라라인은 가장 어려운 순간에 무너지는 여성을 비춤과 동시에 끝끝내 사라지지 않고 가련함 속에서도 끝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마리아는 오페라 공연장을 찾아가 지휘자인 '제프리 테이트'의 도움을 받으며 다시 한번 노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그녀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갔고 목 상태도 좋지 않았기에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어떤 날에는 노래하지 않고 무대를 떠나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상심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마리아는 완벽하게 노래했던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음반을 다시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지점이다. 마리아는 과거의 자신이 쌓아 놓은 업적에 다시금 닿기 위해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진짜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싶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리아의 과거는 행복한 순간들도 있었겠으나 정작 자신을 위해 노래한 적은 없었다. 유년시절에 그녀의 재능은 가난했던 가정환경 속에서 엄마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해 타의에 의해 노래해야 했다. 소프라노로 인기를 얻은 후에는 당시 선박왕이라 불린 '오나시스'라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노래를 부르지 않길 바라는 그를 위해 그녀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았다. 그녀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노래했지만 돌이켜보면 정작 스스로 선택해서 노래를 한 적도, 그만둔 적도 없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던 마리아는 '맨드랙스'라는 약물에 과도하게 의지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환각에 빠지기도 했는데 환상 속에서 '맨드랙스'라는 이름의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삶을 되짚는 방식으로 영화는 마리아 칼라스의 빛나던 과거와 초라하고 비참한 현실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이외에도 그녀가 걸어가는 길목에서나 객석이 빈 무대에서 노래를 연습할 때에도 과거의 빛나던 마리아의 모습을 끊임없이 교차시키는데 이 무자비하고도 꿈결 같은 몽환적인 연출 방식이 그녀가 느끼는 허망하고도 현실로 내쳐진 듯한 감정을 더욱 처절하게 표현한다.
<재키>와 <스펜서>에서도 그러했던 것처럼 <마리아>에서도 마리아의 어려운 순간들마다 가장 가까이에서 힘이 되어주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가정부 '브루나' 앞에서는 마리아도 망설임 없이 노래를 부르며 의견을 구할 수 있었고 집사 '페루치오'에게는 하루가 다르게 집안의 피아노 위치를 바꿔달라며 성가신 고집을 부리기도 하지만 그만큼 곁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리아 칼라스의 마지막 날, 그녀가 침실에서 죽은 듯이 나오지 않는 순간에도 문 밖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을 간절하게 말하며 과거에 얽매이고 현실에 무너지고 있는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미래를 가늠케 해주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사랑과 아낌없는 지지가 있었기에 마리아가 마지막 순간까지 오로지 자신을 위한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촬영상의 노미네이트 되었던 영화 <마리아>는 인물의 감정을 좇는 감각적인 카메라 무빙, 정적인 현재와 역동적인 과거를 대조시키고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연출 방식이 돋보인다. 여느 전기영화처럼 이 사람의 인생을 처음부터 읊는 것이 아니라 과감히 주인공의 가장 불안한 순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 역시 인상적이다. 더 나아가 (전작에서도 그러했지만)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아름다운 뮤즈로 남아있거나 단편적인 이미지로 고착된 여성들의 삶을 이토록 입체적이면서도 생동감 있게 마지막까지 자신의 인생을 펼쳐온 한 명의 '사람'으로 그려낸다는 점은 보는 이로 하여금 뜻밖의 감정에 도달하게 되는 가장 이상적이고도 아름다운 회고의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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