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영화
이게 내 최선의 모습이라면?
<프란시스 하>, <매기스 플랜>의 그레타 거윅이 감독한 이 작품은 새크라멘토에서 사는 레이디버드가 뉴욕으로 떠나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이야기이자 그레타 거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반영한 영화이기도 하다.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을 부정하고 '레이디버드'란 이름으로 스스로를 부르는 그녀의 성장을 다루는 이 영화는 아주 발랄하고 유쾌하게 전개가 된다. 더불어 분위기에 걸맞는 통통 튀는 음악과 함께 재미까지 놓치지 않는 유머러스함까지 골고루 갖추어 보는 이로 하여금 함께 울고 웃으며 즐길 수 있다. 코미디 영화이긴 하지만 레이디버드를 둘러싼 아기자기한 소동들은 우리 모두의 조금은 미숙하고 철없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할 만큼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또 간간히 맘 구석을 콕 찌르기도 한다.
특히 모녀 관계를 보여주는 여러 장면들은 엄마와 딸의 사랑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면이 있다. 이를 테면, 영화 초반부 크리스틴은 차를 타고 엄마와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의 오디오북 테이프를 들으며 그 내용에 푹 빠져서 둘 다 눈물을 흘리다가도 학교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순식간에 다퉈버린다. 재미있던 장면 중 하나는 크리스틴이 엄마와 함께 드레스를 고르는 부분이다. 크리스틴이 발을 끌면서 다니자 엄마는 이에 대해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고 둘은 다투려 하는데, 엄마가 예쁜 드레스를 발견하자 '어머! 너무 예쁘잖아!' 하고 이내 풀어지곤 한다. 또, 크리스틴은 하염없이 남들에게 엄마에 대한 불평, 불만을 늘어놓다가도 그들이 우리 엄마 욕을 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이처럼 엄마와 딸은 그렇게 싸우고 다투다가도 곧 아무 일 없단 듯이 지내는 모습이 굉장히 현실적이고 진짜 우리 엄마와 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느낌이 있다. 크리스틴이 카일과 만난 이후에 너무 속상해서 엄마 차를 타자마자 눈물을 쏟아내 버리는데 이때 그녀를 위로해주는 엄마란 존재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위안이자 따뜻한 품이기도 하다.
그런 크리스틴은 자신의 원래 이름을 부정하고 스스로에게 '레이디버드'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이러한 행동은 아마 부모가 정해주는 '이름'을 쓰지 않음으로써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17살 소녀의 열망에서 비롯한 것일 테다. 이름은 어떤 존재에 정체성을 가져다주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이름은 만드는 것은 '내가' 온전히 '나'를 완성하리라는 함의가 숨어있기도 하다. 그녀는 대니와 함께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별들 중 하나를 콕 찍어서 '저 별은 브루스야.'라고 특정 짓게 된다. 이처럼 이름을 짓기 전에는 그저 무한히 많은 별들은 다 똑같은 별일 뿐이지만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 별들 중에 유독 특별한 나만의 별로 존재하게 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일 것이다. 머리 맡 벽에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 아이 이름을 조그맣게 적어 놓는 크리스틴의 귀여운 행동에서도 볼 수 있듯 이름은 단순히 그 사람을 부르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전부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부모에게 받은 이름을 부르면서 신을 믿지 않을 수 있지?
또한 영화 후반부 즈음 그녀의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크리스틴에게 이름이란 신이 만들어내는 것과 동일시되는 면이 있다. 신이 만든 것이라 하면 태초부터 주어진 것, 변하지 않고 본래부터 내재한 어떠한 특질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름'이 갖고 있는 상징성을 바라본다면 크리스틴이 자신이 살고 있는 새크라멘토를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고 세상에 재미있는 일을 찾아내고 싶어 하는 그녀의 행동들과 레이디버드라는 이름의 연관성을 조금은 이해해볼 수 있다.
그런 크리스틴이 자신을 하필 '레이디 버드'라고 이름 부를까? 아마 '레이디'라는 데에서 드러나듯 소녀, 어린아이에서 숙녀가 되고 싶은 욕망과 '버드'처럼 자유로워지고 싶은 열망의 결합물일 듯하다. 그런 그녀는 조금씩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반에서 예쁜 아이를 보며 동경하기도 하면서 그에 반해 자신의 현재 상태를 상당히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이를 테면, 크리스틴은 자신의 학교에 뮤지컬 동아리가 있다는 것을 3년 내내 몰랐었고, 아버지가 몇 년 전부터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 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위 친구에게 경제 사정이 별로 안 좋은 자신의 집을 대신해 부잣집을 자신의 집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학교까지 바래다주시는 아버지에게 일부러 멀찍이 내려 달라고 말하거나 어느 순간 그 예쁜 친구와 친하게 지내기 위해 절친인 줄리를 멀리하게 되는 모습들을 살펴보면 크리스틴을 마냥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만은 없다. 이런 그녀의 행동은 크리스틴 스스로에겐 자유가 될 수 있을진 몰라도 끊어질 수 없는 관계의 연(緣) 인 가족들에게는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녀는 자유로워지고 싶고, 원하는 일을 하고 싶지만 사실 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줄리가 자신과 멀어진 크리스틴에게 화를 내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크리스틴은 스스로를 주인공이라 생각하고 그 주변 상황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특히 17살 소녀가 꾸는 이상과 꿈은 사실 현실과는 잘 맞아 들어가지 않을 때가 있다. 크리스틴 자신의 말대로 새크라멘토를 떠나 뉴욕에서 살고 싶지만 그런 소망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부모님의 재정적 어려움과 부딪히고, 학업 성적이 안 좋아서 수학 선생님의 시험지를 몰래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는 코믹한 상황까지 이어진다. 또, 자신의 첫 남자 친구와 아주 잘 지내다가 우연히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큰 충격에 빠지기도 한다. 이에 상처를 받고 그를 무시하려 했지만 '시간이 필요하니 다른 사람에게 제발 이야기하지 말아줘'라며 울음을 터뜨리는 대니 앞에서 이내 화가 다 누그러뜨려져 버리기도 한다. 반에서 잘 나가는 친구와 친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카일에게 관심을 표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억지로 센 척, 쿨한 척하다가 민망해지곤 한다. 그토록 꿈꿔왔던 사랑하는 남자와의 첫날밤 또한 생각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내 생각처럼 세상이 굴러가지 않는 것. 그것이 레이디버드가 되고 싶었던 17살 소녀가 조금씩 마주하게 된 현실이었다.
결국엔 우여곡절 끝에 크리스틴은 뉴욕에 왔다. 혼자서.
하지만 그녀는 엄마의 구겨진 편지를 읽고 공허한 마음에 술을 진탕 마시고 혼자 병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성당에서 성가대의 노래를 듣고 나와 부모님께 전화를 건다. 그리고 스스로를 더 이상 '레이디버드'라 부르지 않고 '크리스틴'이라 부른다. 그녀에게 남겨진 유일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흔적이라곤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이 전부였을테니까.
옳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냐. 진실한 게 중요한 거야.
우리를 한 걸음 더 성장하게 하는 힘은 내가 혼자 남겨졌을 때서야 비로소 생겨난다. 한 때 나에게 없는 것들을 갈망하고, 또 그렇게 되려 했었다. 그렇게 좇아가려 했던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는 존재들도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보면 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둘러싼 가족, 친구, 집, 그리고 처음으로 직접 차를 몰고 만끽했던 아름다운 동네 풍경들. 크리스틴처럼 우리는 내 주위에 늘 있었기에 깨닫지 못했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는다. 관심과 사랑은 별개가 아니다. 그녀가 인식하고 있지 않았을지라도 그녀의 지루한 일상조차 사랑이었다. 그리고 주위 이들에게 사랑을 갈구했던 크리스틴도 늘 사랑받고 있었다.
신부님이 이마에 재를 얹으며 말한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우리는 끊임없이 먼 곳을 바라보고 동경하지만 결국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가치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다.
레이디버드가 아닌 크리스틴은 쓸쓸히 뉴욕 밤하늘에 외친다.
'브루스!'
광활한 우주 안에서 나라는 존재를 실감하고 현실의 무게를 알게 될 때 우리는 한 번 더 성장한다.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평점: ★★★☆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