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 스피릿>

가장 절박한 순간에 떠오르는 게 무엇인지 느끼게 해 주었던 영화

by FREESIA
운으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movie_image.jpg 출처: 영화 <틴 스피릿>

올해 유독 하얀 나비가 눈에 자주 보였다. 매일 똑같은 길을 걸어가던 나의 일상에 하루에 한 번씩 찾아오는 그 나비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운명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힘든 순간에 나비가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내가 기댈 곳이 필요해서 어느 순간부터 그 하얀 나비를 눈으로 찾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지.


17살 바이올렛은 그저 노래 부르는 것이 좋아서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바에서 홀로 노래를 불렀고, 이어폰으로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음악을 들었으며 방 안에서 혼자 거울의 나 자신과 함께 춤을 췄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집안도 사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바에서 만난 낯선 아저씨가 몇 살이냐고 물었을 때, 21살이라고 했다. 일부러 나이를 높여 속인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내용 상 뒷부분이기는 하지만) 엄마는 집안 사정이 나빠지자 바이올렛의 유일한 친구였던 말까지 팔아버렸다. 게다가 어릴 적에 집을 나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원망 혹은 그리움이 있다. 그랬던 그녀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버스를 타고 가다 우연히 길거리에 쓰인 틴 스피릿 광고물을 보게 된다. 이후에도 틴 스피릿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아르바이트하는 식당 티비에서도,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의 화제 이슈로. 가장 힘든 순간에 찾아오는 게 이런 우연들이라, 너무 뻔한 우연들이라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쉽게 코웃음 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우연 조차도 정말 절박한 이에게는 마치 운명처럼 다가오는 게 아닐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내가 그것을 찾고자 했는지 아님 그것이 나를 찾아왔는지도 모를 만큼. 블라드 아저씨의 말처럼 이 세상에 운으로 이뤄지는 것은 없다. 가슴으로 노래할 때, 진심으로 무언가를 원할 때 꿈도 눈에 가까이 들어오는 법이다.


솔직히 대회에서 우승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국내외로 이미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영화의 서사면에서 접근해보았을 때 주인공이 실패 없이 결승까지 올라가는 건 아무래도 재미가 없다. 이 영화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준결승에서 주인공이 2등에 머물고만 말지만 1등이었던 참가자의 실격처리로 그 자리를 대신해서 올라가게 되는 전개를 취한다. 나름의 반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끌고 간 영화의 마지막 결말은 좀 아쉽다. 결국 우승을 차지한 바이올렛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자신의 옆자리는 그녀를 진심으로 도와준 블라드 아저씨 대신 우승 트로피가 놓여 있었다. 블라드 아저씨도 프랑스로 돌아가 자신의 딸을 만나게 된다. 나름 해피엔딩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관객들이 이런 영화들에서 원하는 것은 주인공이 당연히 거머쥐어야 할 우승 자체가 아니다. 차라리 1등이 아니어도 좋다. 바이올렛이 비록 우승하지 못했어도 자신의 옆에 있는 가족과 블라드 아저씨와 먼 길까지 따라와 도움을 준 친구들과 함께 웃으면서 노래하는 모습만 보여줬어도 좋았을 것이다. 혹은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의 결말처럼 불가능할 것 같았던 싱크로나이즈 대회에서 우승을 한 주인공들이 신문에 난 기사도 잠시, 오래 지나지 않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 일상을 마주하는 마음가짐이 훨씬 달라졌던 모습을 보여주는 엔딩도 충분히 멋졌다. 영화 <틴 스피릿>의 이야기가 끝이 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바이올렛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뉴스에서 비춰준다. 평범한 동네 소녀에서 실력 있는 스타가 된 모습을 마지막에 한 번 더 보여주니 그게 과연 이 우승의 목적이었나 싶다.


그래서 영화의 이런 요소들이 짜릿한 감동을 선사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무대에 오르기 전 아무 음악도 깔리지 않은 채 원 테이크로 긴 무대 뒤편을 돌고 돌아 결승 무대에 오르는 바이올렛의 모습이 오히려 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사실 그녀는 대회 전 날 앨범 계약 제안에 쉽게 마음이 흔들렸고,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패기롭게 이야기하던 그녀가 그곳에서 만난 남자아이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을 때, 정말 스크린으로 들어가서 뜯어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면서 중요한 순간을 코 앞에 두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블라드 아저씨에게 고래고래 소리치는 모습을 볼 때면, 이렇게 의지 없는 아이가 정말 이 대회에서 우승한다고 하면 어떤 감동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돌이켜보면, 쉽게 흔들리고 마는 게 사람이 아닌가. 특히 영화 안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10대들에게는 더더욱. 누구나 실수를 한다. 아니 땐 유혹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하지 말았어야 할 선택을 내리는 것도 결국 나 자신이니 누구를 탓할 수 없을 때도 있다. 물론 끝까지 열심히 준비해서 원하는 무대에서 나의 역량을 전부 발휘하는 것도 엄청 멋진 일이다. 하지만 나의 선택이든 어쨌든 간에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무대에 오를 때 완전히 최상의 컨디션을 기대할 수 없을 때가 분명 있다. 바이올렛이 목에 지니고 있던 아버지의 목걸이가 가지고 있는 의미처럼 그게 운을 가져다줄지, 아니면 그 반대를 가져다줄지 그 어떤 예측도 할 수 없다. 차라리 그런 것에 기대할 바에 바이올렛은 목걸이를 벗어버린다.


다시 그 장면으로 돌아가, 무대 뒤편에서 한참을 걸어갈 때 여러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부담 가지지는 않는다고 했지만 주변이들의 기대와 한번 떨어져 봤으니 느껴봤을 그 패배감, 내 미래에 무엇이 있을지도 알 수 없는 그 막연함, 게다가 어제의 실수로 오늘의 무대를 망칠 게 뻔한 이 상황. 이 모든 것들로 머리는 복잡하다. 하지만 관객들의 환호성, 무대 뒤편을 침범하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로 걸어가는 바이올렛과 그녀를 바라보는 나는 그 순간 오히려 머리가 새하얘져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지금까지 준비해온 모든 것들, 후회했던 것들보다는 정말 내 가슴이 시키는 말, 노래하고 싶었던 그 마음 하나만 떠오를 뿐이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우리는 그 무엇보다 거짓 없는 본연의 그 마음에 충실해진다.


그러니 가장 불안한 순간이 오히려 가장 간절한 순간이자 나의 꿈이 가장 잘 보이는 순간이다. 위태로운 순간들이 도처에 깔려 매번 나를 끌어내리려 해도 결코 불행도, 악몽도 아니다. 그 불안한 순간이 나를 더 간절하게 한다. 나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그러니 그런 순간들이 찾아와도 절망하지 말자.


불안한 곳에 서 있는 순간, 가장 나답다.


평점: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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