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한 번쯤, 시공간을 뒤흔들며 찾아오는 예쁜 성장통을 그리는 영화
※ 이 글은 브런치무비패스를 통해 영화를 관람한 후 쓰는 리뷰입니다.
이건 가설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념이야.
인생이라는 거대한 실험실 안에서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가설을 세우고, 그것들을 검증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삶의 방점은 그 가설의 답을 찾는 것에 놓여있지 않다. 영화 속 소년, 아오야마가 수미상관으로 읊는 대사처럼 우리를 '매일 성장'시키게 하는 건 바로 그 가설이 틀렸음을 몸소 증명해냈을 때이다.
3888일. 똑똑하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11살 소년, 아오야마가 어른이 되기까지 남은 날을 헤아리기 시작한 건 좋아하는 치과 누나가 맘 속에 내려앉았을 때쯤이었을 것이다. 마음이 어지러운 그때, 소년이 살아가는 동네에도 이상한 일들이 펼쳐진다. 마을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귀염뽀짝한 펭귄 무리들. 소년은 이 이상한 일들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펭귄 하이웨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과연 아오야마는 앞으로 펼쳐질 모험에 대해 어떤 기록들을 써 내려가게 될까.
사실 아오야마와 친구들이 그려나가는 이 애니메이션은 마냥 귀여운 모험기에 그치지 않는다. 펭귄의 정체와 누나에 대한 수수께끼, 그리고 정체불명의 거대한 '바다'까지. 여기서 영화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세상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꿈, 사랑과 죽음에 대한 의문 등이 교차하는 이 영화는 본래의 좋은 의도에서 벗어나 이 모든 것을 한 데 모아 놓으니 다소 복잡한 느낌이 든다. 더불어 11살짜리 어린아이가 시도 때도 없이 언급하는 치과 누나의 가슴에 대한 발언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약간의 결점들 때문에 이 영화를 과소평가하기엔, 많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펭귄 하이웨이>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기보다는 이젠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어른들이 보아야 할 영화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오야마는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 아이처럼 보이지만 소년은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이 많고, '내가 좀 바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 아이의 행동에 우리는 그저 웃으며 넘기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어느 어른만큼이나 매사에 진지했던 소년의 시절이 있었다. 그때 그 시절, 우리에겐 작은 일도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건 같았고, 작은 동네가 온 세상 같았던 때가 있었다.
사랑은 이따금씩 찾아온다. 소년에게도 그랬다. 갑자기 마을에 찾아들어온 펭귄들처럼 정신없이 마음을 헤집어놨을 테다. 그런 소년에게 펭귄들에 대해 조사하는 건 좋아하는 누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과 동일한 범주에 있는 것이다. 아오야마는 그 과정에서 수수께끼 같은 누나에 대해 많은 면을 알아간다. 그녀가 좋아하는 펭귄을 만났고, 그녀가 무서워하는 박쥐를 목격했으며 '바다'에서 멀어질 때 힘들고 약한 모습도 봤다. 더 나아가 소년은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몸소 단식투쟁까지 하며 자발적으로 실험대상자가 된다. 순수하게 좋아하는 감정을 넘어서서 그 사람이 되어보려 하는 모습은 11살 소년이 '사랑'이란 감정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는 순간인 것이다.
펭귄 하이웨이. 펭귄 무리가 바다에서 육지로 가는 길을 이렇게 부른다. 이 말만 보면 왠지 마을 바깥 바다에서 육지로 펭귄들이 온 것만 같다. 하지만 아오야마의 아버지가 작은 천 주머니를 뒤집으면서 보여주셨던 조언처럼 때론 세상을 바라보는 초점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소년과 친구들이 발견한 '바다'가 마을 바깥이 아닌 마을 중심부에서, 그것도 구(球)의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처럼. 즉, 이 영화의 설정상으로만 보자면 바다에서 육지로 가는 길이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안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것일 수도 있다. 누나가 맘에 들어온 건지, 자기 맘에서부터 무언가가 시작된 건지. 귀여운 첫사랑을 시작한 이 소년이 '바다'를 만나게 되는 특별한 경험은 실험을 좋아하고, 외부적인 지식과 객관적인 증거에 의존하며 세상을 판단하려 하는 이 어린 마음에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함을 심어주는 계기가 된다.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것임에도 좋아하는 누나를 지키기 위해서 본 것을 못 봤다고 말할 수 있는 소년의 변화처럼 말이다.
누나에 대해 많이 알아갔을 때쯤. '바다'는 점점 위험해질 정도로 커져만 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소년은 펭귄 무리를 대동한 누나와 함께 '바다'에 직접 들어가 그 세계를 없애버린다. 그리고 소년이 만들어낸 가설에 의하면, '바다'가 사라지면 누나는 사라져야 했다.
그러나,
'바다'가 터져나간 마을 곳곳에는 어지럽혀진 잔재들이 가득했다.
소년의 가설은 틀렸다. 흔들거려서 줄곧 나를 신경 쓰이게 하던 이를 뽑아버리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가 있던 빈자리를 혀로 툭툭 건드려보듯, 사람에 대한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누나는 떠나지 않았다. 기상천외한 그 여름날의 기억은 없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소년의 맘 속에는 여전히 머물러 있다.
결국, 펭귄 하이웨이.
그 길은 바로, 한 없이 세상의 끝을 바라보던 소년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길이었다.
평점: ★★★★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