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도 의식도 필요없는 환경을 위해서
꼬박꼬박 2월의 첫주가 넘어가고 일요일이 되었네. 잘 지내? :)
내가 사는 이곳에는 눈이 왔어! 올해 너무 따뜻해서 벚꽃도 군데군데 벌써 피고있었는데 어제만 해도 짓눈개비만 내려서 쌓이지 않을 것 같았는데 오늘 아침 멍멍이 산책을 나갔더니 밤새 하얀 세상이 되어있었어.
눈이 내린 줄은 전혀 모르고 나왔던지라 멍멍이나 나나 눈 밭에서 속수무책으로 젖고 얼어버렸지. 눈이 쌓인 곳마다 들어가서 얼굴을 부벼대는 우리집 멍멍이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말야 ㅎㅎ 너네집 아이도 눈을 좋아하니? 얘네들도 사람처럼 신기해하는 걸까 싶어.
“자아 고갈” 이론에 대해선 이름은 모른채로 그 내용만 여기저기서 들은 적이 있었어. 우리의 의지, 정신력이 한정된 자원이고 그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에도 서서히 고갈되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계획을 세워놓고 그걸 실천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잔잔하게 정신력을 고갈시키고 스트레스를 받게 되서 계획이 너무 거창하면 안된대 - 어떤 계획이든 잘게 조각내서 쉽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같은 이유겠지!
너의 편지를 읽은 그날 밤 바로 <넛지>를 내 독서앱 서재에 넣어두었어. 나도 챗바퀴 돌듯 작심삼일을 반복하면서 아무리 완벽한 계획이나 결심도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으면 이루기 힘들다는 걸 알게된 것 같아. <넛지> 초반 챕터에서 학교 영양사가 하는 급식소 음식 배열에 따라 아이들이 택하는 음식이 달라지는 결과가 나오거든. 이런 영양사의 영향력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음식 배열 중에는 “학생들 스스로 판단해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선택할 때 동일한 순서로 음식을 배열한다”는 것도 있었어. 언뜻보면 학생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으로 보이는 데 이미 음식 배열이 학생들이 선택하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이 나온 상태이니 학생들이 ‘스스로’ 판단한다는 게 무의미 해질 수 있다는 거야.
나는 이 챕터에서 선택 설계에서 “‘중립적인’ 설계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어. 나는 지금껏 내 주변 환경이 ‘중립적’인데 단지 내 의지력 부족으로 내가 옳은 선택을 하고 있지 않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온 것 같아. 이제보니 내가 계획을 외면하면서 하루를 흘려보낼 수 있는 환경에 나를 두어왔더라고. 그러니까 내가 후회하는 선택을 하는 환경을 무의식 중에 방치했거나 의도적으로 설계해둔 것들이 있지. 길이가 아주 긴 침대 맡의 휴대폰 충전줄, 설거지를 넣는 싱크대 옆에 있는 간식 바구니 같은 것들 말이지.
뭔가를 ‘스스로’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에 내 주변 환경에 대한 고려는 늘 없었던 것 같아. “주체성 = 의지” 라고 믿었기 때문이겠지. 그치만 다른 무엇보다도 주변 환경이 가장 첫 번째 고려사항이 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스스로’ 의식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아무 생각없이 ‘스르륵’ 해버릴 수 밖에 없는 환경. 이를 테면 거실 한 가운데 깔아둔 나의 요가매트, 꺼내먹기 쉽게 주방서랍 첫째칸에 넣어둔 영양제와 티백 같은 것들.
곧 이사를 가야하니 당장 우선적인 환경 설계는 “이사하기 편한” 환경 이겠지만, 나의 주변을 어떻게 설계할지 고민하는 일이 생각보다 꽤나 즐거워. 환경이 알맞게 갖춰지면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조금씩 알게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기고 있거든 :)
함께 <넛지>에 대해 말하게 되었으니 너도 이제 설계를 시작하겠지?
너의 환경은 어떻게 가꿔질지 궁금하다 ㅎㅎ
답장 기다릴게 ♥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