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다보면 어지럽혀지는 나의 환경들
잘 지냈어?
나는 어쩌다보니 한국에서 부모님과 합류했어. 그러면서 오랜 기간 뵙지 못했던 친척분들을 만나며 지내다 어제 일본으로 왔어. 너가 미루는 습관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아니다 다를까 나는 이렇게 또 나의 편지쓰기 미뤄놓고 있다가 이제야 랩탑을 열었어. 사실 답장을 써야한다고 깨달은 건 저번 주 토요일이었는데 시간을 잘 쪼개서 썼다면 분명 썼겠지만, 나의 ‘패닉몬스터’가 정말 너가 써놓은 그대로 열심히 내 머리 속을 헤집어놓더라구. 이게 감정 편도체하고 관련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금방 납득이 되었어. 감정이 관여되어있지 않다면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는데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거 같거든. 편도체가 저장해둔 강력한 부정감정이 “글을 특정 날짜까지 다 쓴다” 라는 단순한 결론 앞에 많은 허들을 세워두었거든. 이런 이론 뒤에 숨어 변명하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것마저 회피하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안해버리는 지경이 되겠지. “답장이 늦어져서 면목없다” 라는 말을 좀 장황하게 써보았어. ㅋㅋㅋ
어제 저녁에 공항에서 집에 오자마자 든 생각이 뭔지 아니?
‘아.. 집 정리해야 하는데’ 였어.
생각해보면 나는 정리정돈과 유지에 정말 많은 신경을 쏟아왔어. 잘하고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늘 정리가 안되고 정리가 어려워서였지. 누군가를 집에 초대하거나 외출을 하지 못한 이유들 중에 “집이 정리가 안되서” 가 한 80% 이상 차지해온 것 같아. 결혼한 이후로 이사를 2-3년마다 해야했던 나의 특수한 생활도 한 몫 하지만 나와 짝꿍에게 탁 들어맞는 시스템을 아직 찾지 못한 이유도 있는 것 같아. 그래도 10년이상 그런 생활을 반복하면서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했지만 정리정돈은 나에게 아직도 어렵고 부담되는 활동이야.
정신과 의사 오동훈 님이 유튜브 <뇌부자들>에서 말한 내용에 따르면 정리는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래. 사람의 뇌는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쪽으로 진화했는데 청소를 하면서 물건의 카테고리를 나누고, 자리를 지정하고, 그곳에서 꺼낸 물건을 다시 그 자리에 놓는 행위 자체가 뇌에게는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하는 일인거지. 오히려 손에 잡히는 대로 사용하고 그 자리에 두는 편이 에너지 소모 면에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이고.
그럼에도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정리를 중요시 하는 이유는 나의 주변환경에 대한 통제력을 갖는 느낌 때문이래. 통제력을 가짐으로서 무의식적으로 불안을 낮추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지. 실제로 집정리를 할 때 전두엽에서 여러 프로세스를 거쳐야 하는데 불안감이 높거나 우울한 사람들은 전두엽 기능이 저하되어 있어서 힘들 수 있대. 이와 관련된 기전으로 인지적 과부하(Cognitive Overload) 상태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느라 대부분의 에너지가 소모되어서 물리적 환경을 정리할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다는 거지. 너가 미루는 습관과 관련해서 찾았던 내용과도 비슷하네!
반대로 집을 정리함으로서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효율이 급격히 상승할 수 있다는 프린스턴 대학교 뇌과학 연구소의 연구 내용도 있어. 무질서한 환경에서는 뇌의 신경 자원 경쟁이 일어나는데, 물건이 정리될수록 뇌가 중요한 정보에만 선택적으로 집중하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대. 간섭 선택 (Interference Selection)은 수많은 정보 중 나에게 필요한 정보만을 선택하는 과정인데, 어지러운 집안에서 이런 간섭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 계속 노출되어 있으면 우린 다른 곳에 쓸 에너지를 가소시키고 무기력해지기 쉬워지는 거지. 그 결과 에너지를 덜 쓰는 선택을 반복하는 것이고. 지난 번 내가 인용했던 <넛지>의 내용과도 이어지는 것 같아. 결국 환경 설계가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것 말야.
결론적으로 바쁘고 복잡한 마음의 결과로 나의 집이 방치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틈나는 대로 조금씩 치우고 정리해보려고. 너에게는 정리정돈이 어떤 의미인지, 나에게 정리정돈이 늘 부담스러운 숙제인 것처럼 너에게 비슷한 숙제가 있는지 궁금하다.
이제 한국도, 일본도, 낮 기온이 영상 10도가 넘는 날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곧 벚꽃과 봄꽃이 만개하겠지.텍사스 3월의 풍경이 문득 궁금하다. 다음 편지에 한 장 부탁해 ㅎㅎ
그럼 또 쓸께,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