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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고 May 13. 2021

이연 작가가 깨는 편견

웹툰 <화장 지워주는 남자>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 <화장 지워주는 남자>(이하 <화지남>)를 봤을 때가 생각난다. 썸네일부터 작품 타이틀까지

메이크업을 암시해서 막연히 화장과 관련된 만화라고 생각했다. 초반 회차를 봤을 때도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꾸밀 줄 모르는 평범한 여자 김예슬이 천재 메이크업 아티스트 천유성을 만나 모델 제의를 받고 메이크업을 소재로 한 경합 프로그램 <페이스 오프 신데렐라>(이하 <페오신>)에 나가는 이야기. 하지만 이야기는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작가가 그리는 내용은 화장에서 발현되는 화려함이나 변화무쌍함이 아니라 화장에 내재된 편견이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쟁취하는 성장드라마]


(왼쪽부터) 작품 속 주요 여성 캐릭터인 김예슬, 주희원, 천민성


아름다움은 권력일까? <화지남>에 나오는 주요 여성 캐릭터는 이미 아름다움이 권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 아름다움이 주는 권력 비슷한 힘을 이용해 본 경험이 거의 없는 주인공 김예슬도, <페오신> 참가자이자 SNS 스타로서 높은 인기를 누리는 주희원도, <페오신>을 공동제작한 대기업 GC의 임원이자 뛰어난 실력과 빠른 두뇌회전을 겸비한 천민성 이사도 아름다움이 진짜 권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다만 아름다움은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많이 주목받게 만드는 단발적인 힘이 있다. 특히 인플루언서나 연예인처럼 외면이 부각되는 직업은 조금 더 빨리 영향력을 얻게끔 도와주기도 한다. 세 사람 모두 아름다움이 가진 단발적인 힘을 인지하고, 어느 지점에서는 힘을 활용하기를 원한다. 김예슬은 오랫동안 짝사랑한 선배와 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아름다움을 갈망한다. 주희원은 아름다움을 이용하는 데 가장 능숙한 캐릭터로, 아름다움으로 영향력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과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천민성은 주변 시선을 자기 실력과 실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아름다움에 시간을 투자한다.


여신과 신은 왜 다르게 표현될까? (<화장 지워주는 남자> 118화 中)
여전사와 신부를 향한 편견이 드러나는 장면 (<화장 지워주는 남자> 10화, 115화 中)


아름다움이 주는 힘과 아름다움이 주는 구속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페오신>에서 경합 과제를 해결하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자기만의 해답을 찾아나간다. 왜 신과 다르게 여신은 ‘아름다움’이 반드시 필수조건처럼 따라붙는지, 왜 여전사는 전사와 달리 섹시한 이미지를 겸비해야 하는지, 왜 두 사람이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결혼식에서 신부의 아름다움만이 강조되는지. 참가자는 과제에 내포된 편견을 마주하고 편견에 반박하는 답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편견이 단번에 사라지는 판타지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점도 매우 인상적이다. 시청자 투표로 진행되는 <페오신>에서 어떤 팀은 메이크업으로 시청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로 외면받는다. 어떤 팀은 현장에서 반응을 크게 얻지 못했는데도 모델이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득표를 얻어 다음 단계로 진출한다. 언뜻 불합리해보이는 투표 결과에 누구는 자기 뜻을 펼친 것만으로 만족하고 누구는 경합에서 이겼음에도 결과를 납득하지 못하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공통점은, 참가자가 경합 과정에서 ‘나 자신만의 아름다움’으로 승부하고자 하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페오신>을 경쟁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장으로 삼고 성장해간다는 점이다. 모든 과정을 지켜본 천민성 이사는 일부 참가자와 함께 진정한 실력만으로 승부할 새로운 판을 짠다.




[자기만족을 위한 선택지가 너무 좁다]


<화지남>의 주인공 김예슬이 화장을 꺼리는 인물이기 때문에 언뜻 <화지남>은 화장하지 말고 본연 모습 그대로 살자고 주장하는 작품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가가 김예슬을 통해 다루고 싶은 내용은 화장을 자기 표현 수단으로 삼고 싶지 않은 사람조차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화장을 하도록 내모는 사회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외양은 사회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다면 내 옷장은 아마 슬랙스나 셔츠 대신에 색색깔의 잠옷으로 가득했을 테니 말이다. 작가는 각자가 원하는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이 전부 다르고, 단정함과 깔끔함 이상으로 꾸미는 행동은 선택사항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컷 (<화장 지워주는 남자> 28화 中)


다만 우리가 외양을 꾸미는 일에 얼마나 넓은 선택지를 제공받는지는 다른 이야기이다. <페오신> 32강전에서 김예슬-천유성 팀이 제출한 화보는 우리가 자기만족으로 행하는 꾸밈이 제한된 선택지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시사한다. ‘빨강’을 주제로 하는 경합에서 흑백 화보를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보 속 입술색을 노랑이나 초록 또는 파랑으로 생각하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메이크업이 과연 개성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는가? (<화장 지워주는 남자> 24, 28화 中)


사실 해당 에피소드를 처음 봤을 때, 인간 본연의 혈색 때문에 다른 색이 보편화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입술과 볼 혈색은 붉은 계열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일반 사진도 아닌 ‘메이크업’ 화보에서조차 다른 색의 가능성이 열리지 않는 이유’를 반문하는 예슬의 말처럼, 예술 영역에서조차 다른 색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은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진다.


메이크업을 이용한 개성 표현 방법이 늘어난 사례 (<화장 지워주는 남자> 55화 中)


위에서 보듯이 이가리 메이크업이나 스모키 메이크업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개발한 메이크업이었으나 대중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트렌드가 된 사례이다. 트렌드가 변화하면서 최근에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개성 표현 방법이 확장됐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예술계의 새로운 시도는 때로 일상 속 선택지를 넓히기도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노랑, 초록, 파랑 등 이제까지 보지 못한 색깔 립스틱이 유행하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색깔은 혈색과 유사한 색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성이 항상 자연스러운 형태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개성을 드러내기에 적합하다 판단되면 그냥 쓸 뿐이다. 지금은 나를 포함해 내 주위 모든 사람이 질색하는 딸기우유 색 립스틱이 한때 유행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바나나우유 색 립스틱이 유행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화장 지워주는 남자가 사랑하는 방식]

 

<화지남>의 주인공은 김예슬이지만 작품 타이틀이 가리키는 인물은 김예슬 전담 메이크업 아티스트 천유성이다. 천재 메이크업 아티스트인데 왜 화장 ‘해주는’ 남자가 아니라 화장 ‘지워주는’ 남자일까. 이유는 바로 천유성이 김예슬을 사랑하는 방식에 있다.

천유성은 뭘 발라도 예쁜 얼굴이 아니라 화장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화하는 얼굴을 찾다가 김예슬을 만나게 된다. <페오신> 경합에서 두 사람은 다양한 메이크업을 시도하지만 천유성이 김예슬에게 빠져든 원인은 메이크업을 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김예슬이라는 사람이 가진 에너지 자체이다. 김예슬은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도 곤경에 처한 사람을 지나치지 않고 용기를 낸다. 부당한 말을 들으면 속상한 마음이 들지만 우는 대신 불 같이 화를 내며 뒤엎는다. 트렌드를 마냥 따라가기보다 자기 시선으로 트렌드를 바라보며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천유성이 원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 (<화장 지워주는 남자> 93화 中)


사진과 학생인 김예슬은 <페오신>에 참가하기 전에도 자기만의 독특한 시점이 담긴 사진을 찍을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페오신>에 참가하고 자기 가치관을 표현하는 데 재미를 느끼면서 김예슬은 하루가 다르게 빛이 난다.

김예슬이 짝사랑하는 상대이자 같은 학과 선배인 연승우는 예슬의 변화가 싫다. 예슬이 자기 길을 갈수록 연승우만 바라보고 연승우만을 위하고 연승우에게 맞추고자 하는 김예슬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천유성이 사랑하는 방식은 연승우와 다르다. 천유성은 김예슬이 계속해서 빛나길 바란다. 자신을 표현하는 김예슬을 넘어 스스로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자신감을 느끼는 김예슬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천유성은 화장 해주는 남자로 김예슬을 만나서 화장 지워주는 남자가 되어 예슬의 곁을 지킨다.


선우윤이 민시현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선택을 순전히 개인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화장 지워주는 남자> 64화 中)


상대방이 나만 바라보는 존재가 아닌 그 자체로 빛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커플은 또 있다. <페오신> 참가 팀 민시현과 선우윤이다. 선우윤은 30대 중반인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업계 스태프에게 깐깐한 여자, 퇴물 취급을 받지만 민시현에게는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하고 자기 분야에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20대 중반인 인기 유튜버 민시현은 자신의 고백이 행여 선우윤의 커리어를 망치게 될까봐 배려하려 노력하고 선우윤에 어울리는 어른이 될 방법을 고민한다.

자세히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두 커플 이외에도 <페오신> 참가자 명은결-정승윤 역시 상대방이 지향하는 방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응원하는 커플이다. 이러한 사랑 방식이 처음은 아니지만 다수이자 주류로 등장한 작품은 별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전히 워킹맘의 고충이 TV 예능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시대에 김예슬-천유성 같은 커플이 더 많은 콘텐츠에 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현재 이연 작가는 네이버웹툰에서 신작 <살아남은 로맨스>를 연재 중이다. 소설 빙의와 타임루프 등 흔한 설정이 혼재되어 있지만 1화만 봐도 흔한 빙의물/회귀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갑자기 신작을 언급한 이유는 <살아남은 로맨스>에서도 <화장 지워주는 남자>와 같이 나도 모르는 편견을 자각하게 해주는 장치가 여럿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막 17화가 오픈된 신작이니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다만 작품에 녹인 여러 장치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전작인 <화장 지워주는 남자>가 생각날 만큼, 이번에도 흔한 소재를 흔하지 않게 풀면서 편견에 마구 도끼질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신작도 어떤 방식으로 편견을 부수며 이야기가 전개될지 벌써부터 흥미진진하다. 작가가 반드시 메시지를 전하는 스토리만 만들 필요는 없지만 앞으로 이연 작가의 작품을 접할 때면 어떤 편견을 깰지 기대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작품명: <화장 지워주는 남자>
작가: 이연
플랫폼: 네이버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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