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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불 Dec 01. 2020

어느 날 그냥, 암이 왔다

죽음 속에서 더 명료해지는 삶, 도서 <아프지만 책을 읽었습니다>

나는 암과 아주 가까이 산다. 무슨 말이냐면 아빠는 암투병 중이고 엄마는 암투병을 했었고 나는 몸속에 난 웬 큰 혹 하나랑 같이 지낸다. 이처럼 누구보다 암과 붙어사는 나에게 이 책은 그야말로 '일상의 기록'이었다.  


솔직하기 그지없는 투병일기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은 늦둥이 아들을 보고 행복하게 지내던 어느 날, 아내와 건강검진을 하던 길에 드라마처럼 '대장암 3기'를 선고받는다. 그는 암을 부정하기도 하고 암에 걸렸다는 사실에 화를 내기도 우울해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가 암에 걸렸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러니까 그는 인생의 새로운 막을 맞이한 것이다. 바로 '암투병'이라는 막과 말이다.

※사진 출처_김보통 작가의 웹툰 '아만자


책에는 암을 선고받고,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고 또 항암치료를 마치는 과정까지 작가의 심리가 기가 막히도록 솔직하게 묘사되어 있다. 오십 줄의 중년 남성이 엄마를 애타게 찾는 일이나 병문안 온 사람들에게 느끼는 괜한 자격지심, 가족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고통을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누구보다 외로워하는 모습, '그래도 내가 이 병은 아니니 다행이지'라는 인간적인 생각 등...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솔직했다.


암과 누구보다 가까운 나인지라 작가의 암 투병기를 따라가는 내내 울다가 웃다가 했다. 심지어 수술 부위마저 똑같아 나는 평소 표현을 잘 안 하는 부모님이 암투병 중 이런 감정이었겠구나 생각하며 뒤늦은 이해를 하기도 했다.  


또 몇 년 동안 수많은 수술과 항암치료를 가까이서 접하다 보니, 작가가 하는 이야기들이 너무 친숙했고 눈 앞에 그려지듯이 생생했다. 수술 후에 복대를 차고 산책을 해야만 하는 엄마와 같이 병원을 걸었던 일, 또 수술 후 물도 못 마실 때 수건에 물을 적셔 아빠 입술에 대주었던 일 등등 힘겨웠던 시간이 복기되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가 버겁거나 부담스럽지 않게 읽혔던 것은 그가 내내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통에 잠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의 깨달음을 무려 경쾌하게(!) 이야기해주었기 때문이리라.


아픔 중에도 읽고 쓰는 이유 

책의 제목 <아프지만 책을 읽었습니다>가 말해주듯 작가는 평론가답게 암투병 중에서도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삶과 죽음 양쪽의 공포를 모두 견뎌낼 힘을 얻는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속에서 용기를 얻기도 하고 그의 표현에 따르면 '딱히 할 일도 없는 병실'에서 지루한 시간을 때울 수 있기도 하고 사람에게서 받지 못한 공감과 위로를 받으며 외로움을 달래기도 한다.


특히나 '발병/ 입원/ 통원치료/ 회복의 순간'의 순서로 소개한 책을 정리해 준 친절함은 이 책의 다정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에게 책이 갖는 의미와 역할은 이 책 속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있다.


나는 살아오면서 어려움을 만날 때면 예의 책을 찾았다. 어른이 된 후 사회를 몸으로 겪으며 상처 받고 아플 때마다 내게 시의적절한 충고와 조언을 해준 윗사람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책은 내게 선배이자 선생님이고, 독서는 선배와 선생님을 만나는 자리였던 셈이다.
(중략) 하지만 그저 넋을 놓고 책에 몰입해 읽다 보면 어느 한 문장에서, 어느 한 단어에서 신기하게도 내가 찾던 답의 실마리를 만난다. 게다가 답은 책을 읽을 때뿐 아니라 책을 읽은 몇 시간 후 걷다가, 샤워를 하다가, 막 잠자리에 들다가 머릿속에 '쓱~'하고 떠오른다. -p.74


암이 생긴 이유? '그냥'

개인적으로 불행이 왔다고 느낄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일이 '원인 찾기'라고 생각한다.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같은 상황을 막는 예방적인 차원에서는 분명 도움되는 일이지만, 대체로 불행의 원인 찾기에 잠식되다 보면 '자책'과 '원망'을 불러일으키는 데 그쳐 더 큰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상 대체로 죽음이나 병 같은 불행은 명확한 원인을 찾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작가 역시 처음엔 '왜 나에게 이런 일이!'에 몰두하며 불행해하다가 이내 책 속에서 답을 얻는다.  


'그냥!'


잔인하지만 그렇다. 물론 이전에 건강관리에 좀 소홀했던 것을 원인으로 들 수는 있겠지만 '좁스홉킨스 연구 팀이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영국 여성의 발암 유전자 돌연변이 원인을 분석해 보니, 환경에 의한 것이 29퍼센트, 유전적 요인이 5퍼센트, 무작위 오류에 의한 돌연변이가 66퍼센트로 나타났'다는 연구만 봐도 거진 암은 그냥 왔다고 볼 수 있겠다는 것이다. 작가가 깨달은 바로는 암의 원인을 찾는데 골몰하기보다는 암을 어떻게 이겨내고 남은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다짐과 생각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고 한다.


그의 그런 고백은 아마 불행을 겪는 이들에게 꽤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체로 사람들은 불행의 원인을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라고 생각하며 자책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래도 암이 남기고 간 선물들 

암이란 놈은 내가 걸려도 사랑하는 사람이 걸려도 정말 X같은 병이지만, 그럼에도 남기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암에 걸렸던 부모님도, 또 이 책의 저자도, 또 저자가 소개해 준 책 속의 저자들도 모두 '암 덕분에' 깨닫게 된 것들이 많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하니 말이다.


우선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배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책의 작가도 그렇고 우리 가족도 그렇고, 가족 구성원이 얼마나 삶의 이유가 되는지, 평소라면 못 느꼈을 애틋함을 느끼게 된다. 책에서 그는 아픈 중에도 다섯 살 난 아들의 육아를 전담하고 가족들과 함께 보낸 모든 시간들을 기록하려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그의 뜨거운 가족 사랑은 눈시울을 붉히게도 하고 슬쩍 미소 짓게도 한다. 또 묵묵히 나무처럼 그를 품어주는 아내의 모습도 여운을 남긴다.


또 죽음을 속에서 더 명료해지는 삶에 대한 깨달음을 느낄 수 있다. 책에는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을 위해서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가 선행되어야 함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사실 그의 암 투병기는 한마디로 '메멘토 모리'를 체화(體化)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우리가 그저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삶을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하게 '살아간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작가는 이야기한다. 잘 죽어 간다는 것은 잘 살아간다는 것. 암은 별생각 없이 시간을 견디던 우리에게 늘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가게 한다.


책에서는 내내 '고통'의 외로움을 이야기한다. 누구도 누굴 위해 대신 아플 수 없다. 고통은 그야말로 고스란히 혼자 겪어내야 하는 삶의 고독의 총합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직접 조금이라도 느껴보았을 때 우리는 남의 고통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게 된다. 나 역시 가족들이 암환자가 아니고 나 역시 건강하고 튼튼했다면 그의 이야기를 이토록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공감하며 읽지 못했을 것이다. 고통의 경험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작가가 책의 중간 소개한 <죽기 위해 사는 법>의 교통사고 환자가 자신의 흉터를 성장의 징표로 삼으려 수술을 거부한 일화도 그러한 깨달음을 설명하는 일화이다.


*


저자가 소개해준 책 중 시각장애인인 작가가 쓴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의 일부를 남기며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비단 암뿐만 아니라 어떤 상실이나 공포가 오더라도 그 속에서 더 명료하고 선명해지는 가치들을 찾을 수 있길 바라며.      


시각장애인은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권리를 잃은 사람이다. 하지만 현대인 대부분은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을 거부할 자유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사는 듯하다. 그래서 정작 보아야 할 것들, 부모의 사랑을 갈망하는 아이들의 눈빛, 화가 났을 때도 감출 수 없는 엄마의 애틋한 표정, 외로움으로 어두워진 배우자의 얼굴빛 등을 보지 못한다. 대중매체나 소셜 네트워크에 사로잡히기 쉬운 오늘, 거기에서 눈을 떼고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자세히, 더 자주 바라본다면, 세상의 '소음'에서 빠져나와 우리에게 소중한 '신호'를 더 의식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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