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을 견뎌준 모든 존재들에게 올리는 책, '지구에서 스테이'
보통 1월이 오면 지난해를 되돌아보고 올 한 해를 구상해보기 마련이다. 하찮거나 초라하더라도 내가 지난 한 해 무엇을 남겼나 꼽아보고 그것을 발판 삼아 다가오는 년도를 어떻게 지내야 하나 고민하는 것이 이맘때의 우리네 모습이었다.
그러나 2021년, 이번 연도만큼은 다르다. 2020년도를 회고하며 굳이 무언가를 건져 올리지 않아도 괜찮다. 사실상, 지난 한 해는 견뎌낸 것만으로도 제 할 일을 다 한 것이기 때문에.
놈은 박쥐를 점유했다가
사람을 점유했다가
도시와
국가, 대륙을
지구 전체를 점유했다
놈의 세력은 나날이 확대됐다
1킬로미터에서
1만 킬로미터까지
11월에서 1월
또 다른 1월까지
탄알 하나 보이지 않고
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놈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무형무색의
소리 없는 습격이다.
천위홍, <먼 끝 -바이러스 2019> 중
어느 날, 저 먼 중국 땅에서 바이러스가 퍼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처음에는 남의 나라 이야기 듣는 듯했지만 그 소리도 형체도 없는 바이러스는 점점 퍼져 우리의 일상을 잠식한다.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기에 더 두려웠다.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또 가끔 생각보다 한참 가까운 곳에 숨어 있기도 했다.
헤이, 나의 적은 공산주의나 제국주의인 줄 알았는데... 외계인이나 악몽인 줄 알았는데...
당신이었군요.
이장욱, <적의 위치> 중
바이러스는 사람들끼리 서로 반목하고 혐오하게 만들었다. 한 재일 한국인 시인은 팬데믹 상황을 관동 대지진에 빗대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겁이 곧 미움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도시 곳곳에서 가미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중략) 너는 가미가 아니야? 돌림병을 옮기고 다니는 거지? (중략)
그때부터 백 년이 지났습니다. 문명개화의 백오십 년이 지났습니다. 세계는 더욱 멋지게 겁을 먹고 미워하고 살기로 가득합니다. 당신은 누구를 죽였습니까? 당신의 구멍들은 굼실거리고 있습니까? 당신은 누구에게 살해당하시겠습니까?
교 노부코, <가미를 죽이는 이야기- 코로나의 밤에> 중
코로나 19로 이름 붙여진 그 바이러스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수많은 제약은 안겨주었다. 사람들은 이 지구에서 스테이(stay)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멈추고 '스테이 홈' 해야 했다. 강아지도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지만 사람인 우리는 마스크를 써야 했고, 서로의 안전을 위해 일정한 거리를 둬야 했다.
당신과 사진 찍은 게
작년의 일
중지된 연주회
포스터 옆에서
종달새는 노래 연습
(중략)
저녁의 산책
맙소사! 엄마의 애완견조차
마스크 쓴 나를 보고 짖는다
다니엘라 바르바라, <호흡 연습> 중
두 손을 내 뻗는 거리가
우리의 안전거리다
안전이 이처럼 요원하다는 것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이전에는 줄곧
서로를 껴안는 것이 안전이라고 생각했다.
추안민, <밤의 노래> 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멀리서 서로를 그리고 사랑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구에서 견뎌낼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췌장암으로 투병 중인 친구가
택배로 보낸 누룽지 상자 속에
연애편지처럼 곱게 접어 동봉한 쪽지
거리가 조용하다니
종일 집에 있겠네
비상식량으로 안부 전한다.
어디 나가지 마라
밥도 먹기 싫고 답답할 때
고요와 적막 반찬 삼아 꼭꼭 씹어 보게
2020년 3월 21일, 성재가
서울이 옆 마실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윤일현, <거리 좁히기> 중
아무리 거리를 둬도 좁아지지 않는 거리도 있다는 것을 위 시는 이야기하고 있다.
또 스테이 홈, 하는 동안 잃은 것도 있지만 얻는 것도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다짜고짜 멈춰 섰다. 스테이 홈!을, 개에게 명령하는 것처럼 서로에게 외치면서. 나는 바로 이 '스테이' 체험이 인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기야 어쨌든 우리들은 모두 '멈춰 서'야 했다. (중략) 내가 어떤 간편조리식을 진짜 좋아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Zoom으로 온라인 회식을 하면서 이전과 다른 친구하고 마음이 통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렇게도 하기 싫었던 하체 운동을 했다. (중략) 포스트 코로나가 된 후에 다시 '달리라'라는 말을 들어도, 우리들은 '멈춰 섰을 때'의 경험을 잊지 못할 것이다. (후략)
이코 세이코, <지구에서 스테이하는 우리들은> 중
*
56명의 시인들이 참여한 시집 '지구에서 스테이'는 작년 한 해를 견뎌준 우리에게 온 선물이다. 마치 전시 상황처럼 절망적인 이 디스토피아에, 112개의 맑은 눈동자로 본 지구의 모습은 반목과 혐오로 가물어가는 세상에 단비와도 같다.
또한 '지구에서 스테이'는 세계 18개국에서 각국을 대표하는 시인들이 참여한 프로젝트라는 데에서도 의미가 깊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국가적으로도 서로 증오하고 공격해왔다. 그러나 시에는 하나 되게 하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같은 고통을 이야기하고 같은 감동을 이야기하는 동안 시는 세상에 조금씩 스며들고 분열되었던 지구는 마침내 촉촉한 원으로 합쳐진다.
*
지난 한 해, 지구에서 견뎌내 주느라 정말 고마웠다. 살아남아줘서, 존재해줘서, 이 지구에 있어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 지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 책도 그런 것 같다. 책 속 56명의 시인들이, 18개 나라에서 당신을 향해 말하고 있다. 그래도 살아줘서 고맙다고, 잘했다고, 고생 많았다고. 맨 처음 소개했던 시의 마지막 부분을 여러분과 공유하며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대지가 조용히 멈췄다
태평양은 여전히 소란스럽지만
페이스북과 마스크를 사이에 두고서
나는 너를 만난다. 불완전한
가상의 너를 만난다
너의 미소는 저 먼 끝에 있는데
-적어도 아직 살아있다고 너는 말한다
가상의
불완전한 만남이지만
그래도 너를 만나
새롭게 느끼고 새롭게 본다
그 보이지 않는, 가상에 적응한
불완전한 인생이, 거꾸로 매달린
그 박쥐처럼
적응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천위홍, <먼 끝- 바이러스 2019>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