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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유 Dec 29. 2022

응답하라 청춘이여. 1

열여섯 그 겨울엔.

낡은 졸업 앨범을 발견했다. 30년이 훌쩍 지난 내 중학교 앨범이었다. 먼지를 대강 털어내고 색이 바랜 앨범을 펼쳤다. 불그레한 뺨을 가진, 촌스러운 내가 있었다.


얼마 있으면 내 생일이었다. 엄마한테 선물로 오리털 파카를 사달라고 했다. 딸 부잣집 넷째 딸인 나는 언니 옷만 주구장창 물려 입었다. 언니가 입던 옷 말고,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솜 점퍼 말고, 제발 오리털 파카 좀 사달라고 두 달 전부터 졸랐다. 비싼 탓에 몇 안 되는 아이들만 입던, 고급스러운 볼륨감의 오리털 파카. 생일 선물 겸 중학교 졸업 선물로 사주면 고등학교 가서도 아껴 입겠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 집은 형편이 좋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작은 부식 가게를 했는데 가까운 곳에 큰 슈퍼마켓이 생긴 후, 손님은 눈에 띄게 줄었고 시들해지는 채소와 과일은 늘어났다.  


생일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확답을 듣기 위해 가게로 달려갔다.

 “엄마, 오리털 파카 사줄 거지? 어?”

 “......”

 “왜, 대답 안 해! 사줄 거지 그치? 친구들한테 자랑했단 말이야.”

 “장사되는 거 봐야제. 그만 허고 어여 집에 가.”

 “또 이래. 확실하게 말해 봐. 사 준다고. 어? 그래야 집에 가지.”

대답을 피하는 엄마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집요하게 물었다. 가게에 딸린 방으로 엄마를 따라 들어갔다. 방에는 아빠가 주무시고 계셨고 둘째 언니는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방에서도 투쟁은 계속됐다. 언니가 티브이 보는데 시끄럽다고 했지만 나는 목소리를 한층 높였다. 아빠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저놈의 지지배, 확 때려 버리소. 엔간히 좀 해야 할 것 아녀. 그깟 생일이 대수여? 시끄러우니까 나가! 어여 안 나가!” 울면서 나왔다.

 ‘그깟 생일이 대수여?’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참을 걷다 집에 돌아왔다. 방으로 가서 책가방에 교과서와 문제집을 담았다. 다른 가방에는 옷을 쑤셔 넣었다. 비상금을 탈탈 털었다. 7,600원이 있었다. 신발을 신는데 둘째 언니가 왔다. 옆에서 거들어주지 않던 언니가 미워 쳐다보지 않았다. 두 개의 가방을 메고 있는 나를 보고 언니가 말했다.

“너 어디 가? 혹시 집 나가는 거 아니지? 엄마 걱정하니까 일찍 와!”

독서실에 갈 거라고 말하고 집을 나왔다.


가출했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가출이었다.

엄마 아빠가 싫었고, 가족이 싫었고 집이 싫었다. 모든 게 지긋지긋할 만큼 다 싫었다. 밤새울 수 있는 독서실이라 잠자리는 걱정 없는데 먹는 게 문제였다. 7,600원. 이 돈으로 얼마 동안 버틸 수 있을지. 저녁을 굶은 터라 독서실 근처에 있는 재래시장 노점에서, 술꾼 아저씨들과 나란히 앉아 떡볶이 천 원어치를 사 먹었다. 6,600원이 남았다.


독서실에서 새우잠을 자고 일어나 대충 씻고 학교에 갔다. 피곤하고 우울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고 지친 몸으로 독서실에 들어서자 총무가 통유리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사무실로 가니 총무가 낯익은 남색 체크, 보온 도시락을 내밀었다.

 “자유야, 너 집에 안 들어갔니? 아침에 엄마가 가지고 오셨어. 너 학교 갔다니까 두고 저녁밥으로 먹으라던데.”

 “이런 걸 왜 받아놔요! 내일 또 받아 놓으면 독서실 말고 딴 데로 갈 거예요.”

황당한 표정을 짓는 총무를 뒤로하고 도시락을 들고 나왔다. 이제야 챙겨주는 엄마가 미우면서도 도시락을 맡기고 돌아갔을 엄마를 떠올리니 괜스레 울적해졌다. 사발면으로 배를 채우고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엄마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더 일찍 등교했다. 수업 시간에 계속 졸았다. 독서실에서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보니 너무 피곤했다. 푹 자고 싶었다. 배도 고팠다. 우리 집이 그리웠다. 그날 저녁, 독서실에서 기말고사 대비 문제집을 풀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툭 쳤다. 돌아보니 둘째 언니였다.

“잠깐 나와봐.” 언니가 말했다.

열람실 밖을 나오자 고단해 보이는 엄마가 서 있었다.

 “잠바 사러 가게 나온나.”

말없이 걷던 엄마가 뭐라도 먹자고 했다. 재래시장에 들어서자 비릿한 멸칫국물 향이 났다. 설움과 함께 심한 허기를 느꼈다. 주황색 천막을 젖히며 순이네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엄마가 잔치국수, 순대, 떡볶이를 시켰다.

 “집 나오니 편하드나? 나와 보니 생고생이란 거 알았제. 다시는 그라지 마라.”

 엄마가 그동안 뭐 먹고살았냐고 물었지만 대답하면 눈물이 떨어질 거 같아 말없이 먹기만 했다. 옆에서 조잘조잘 떠드는 둘째 언니가 오늘은 무척이나 고마웠다.


엄마가 옷 가게로 데려갔다.

“내일이 생일이니께 맘에 드는 걸로 골라 봐라. 아지매, 어느 게 진짜 오리털 잠밥니꺼?”

비싼 가격에 엄마 눈이 몇 번이나 커지는 걸 봤다. 나는 너무 비싼 거 말고 적당한 걸로 사달라고 했다. 흰색이 진짜 갖고 싶었는데 때가 탄다며 어두운 색을 사라는 엄마 말에 결국 남색으로 샀다.

함박눈이 내린 그 밤,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 위에 세 사람의 발자국이 뽀드득 새겨졌다.  


 “엄마, 이 사람이 엄마야? 진짜 엄마라고?” 초등생 1학년 딸이 앨범 속 나를 보며 물었다.

 “어, 엄마 맞아. 엄마도 이럴 때가 있었다. 귀엽지?”

 “아니, 못생겼어. 우리 엄마 아니야.”  


남색 오리털 파카. 가장 밝게 빛나는 함박웃음의 열여섯. 내가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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