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강준만'을 처음 읽던 날

그는 말한다. 모든 것은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 때문이라고.

by 이글로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잠시 접어둔 채, 한동안의 방황 끝에 겨우 정한 목표였다. 집에서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부터 이런저런 조건까지 따져봤을 때, 현실적으로 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 신문방송을 전공해 기자가 되면 텍스트도 꾸준히 다룰 수 있을 것이고, 못내 부족한 사회성도 가다듬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원하던 길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도 있었고.


전북대 신방과를 목표로 잡으면서 강준만이라는 이름을 듣게 됐다. 인터넷 검색을 몇 번 해보며 뇌리에 새겨뒀다. 만약 진학에 성공한다면 꼭 기억해야할 이름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건대, 그건 굉장히 무모했던 도전이었다. 국립대학 경쟁률이 치솟던 시절. 그 중에서도 신문방송학과의 문턱은 내 성적으로 넘기에는 너무 높았다. 고3 막바지에라도 정신줄을 부여잡고 공부했더라면 가능했을까? 글쎄,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는 법. 결국 나는 다른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강준만 교수와의 새로운 연결점은 전혀 생각해본 적도 없는 방향에서 찾아왔다. 회사생활 2년을 거의 채워가던 시점에 이직해온 고향 선배. (선배라는 호칭이 적합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냥 그렇게 부르련다.) 그와 친분이 생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그가 강준만 교수에게서 사사받은 사람임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내가 원했던 대로 진학했다면 내 '학과선배'가 됐을지도 모를 사람이었던 거다.


그 선배는 시종일관 강준만 교수를 "우리 교수님"이라 칭하며 친근감과 존경심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썩 좋은 타입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일부러 꾸며낸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긴, 나한테 없는 말 꾸며내서 어디다 쓰겠냐마는.



오랜만에 생각이 나 다시 포털 검색창에 강준만이라는 이름을 넣어봤다.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저서가 추가돼 있었다. 얼핏 봐도 1년에 대여섯 권씩은 책을 쓰는 듯했다. 한 권 쓰기도 녹록치 않은 일일 텐데 그야말로 놀라울 따름. 책을 쓰는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 왕성한 저술활동에 대해 선배는 "끊임없이 생각이 바뀌고 진화하는 사람"이라 평했다. 사회적 지위나 연배와 무관하게 새로운 것을 계속 접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들을 토대로 늘 시각이나 관점을 바꾸려 시도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던 어느 시절의 가르침이 떠오르며 의문은 더 커졌다.


물론 그건 선배의 주관적인 의견이다. 하지만 적어도 강준만 교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나보다는 훨씬 신빙성 있는 평가일 것이다. 호기심이 생겼다. '끊임없이 생각이 바뀐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내 시각으로 볼 때도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그 의문을 해결할 실마리는 이미 충분하다. 한 해에도 몇 권씩 출간되는 그의 저서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게다.



2015년 중순에 출간된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 갑질 공화국의 비밀>을 떠올렸다. 언젠가 강남 교보문고를 방황하다가 눈에 띄어서 한참 쳐다보고 있었던 책. 그 당시에는 더 먼저 출간된 책부터 보자 싶어 지나쳤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목이 너무 끌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출간된지 1년 정도가 지난 시점. 결국 질렀다. 별 망설임은 없었다.



책의 절반을 조금 넘게 읽은 지금, 아직까지는 선배가 이야기해준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하긴… 그가 출간한 수십 권 중 고작 한 권, 그것도 아직 다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너무 의욕만 앞세운 꼴이긴 하다. 그래도 그 사이에 문구를 옮겨 적거나 따로 내 의견을 정리해서 적어놓은 분량이 꽤 되는 걸 보면,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 책인 건 분명하다.


비교적 최근 뉴스를 장식했던 이 사회의 '갑질' 사례들을 나열하며, 강준만 교수는 그 뿌리들을 하나의 점으로 연결한다. 사회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시스템을 건드리고, 누군가에게는 꽤 불편할지도 모를 예리한 지적을 가감없이 쏟아낸다. 나 역시 사회 시스템에 불만이 가득한 불평분자에 속한다. 하지만 겁도 많고 모르는 것도 많다는 핑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이 책은 그런 이야기들을 대신 해주고 있었다. 훨씬 깊이 있게, 논리적인 만족감까지 채워주면서.



차마 생각해본 적도 없던 부분까지 이어지는 문장의 인과관계. 그 속에서 나는 한 가지 후회를 떠올린다. 10여 년 전 그 날, 좀 더 욕심을 내서 이 사람의 사상을 배울 기회를 잡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자신감 넘치는 불평분자'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한 사람의 지나간 시간은 어떤 식으로든 고유의 의미와 향기를 남기게 마련이라고, 그렇게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그래도 그 후회스러움을 달래기에는 부족하다. 조금. 아니, 꽤 많이.



1년이나 지난 책을 읽고 있지만, 이제라도 강준만이라는 사람을 읽기 시작했음에 의미를 두고 싶다. 아마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사람의 다른 책을 또 찾아나설 듯하다. 선배가 전해줬던 평에 대해서도 확인해야 하고, 그러면서 나만의 감상도 발견해야 하니까. 그걸 해낼 때까지 난 이 사람의 책을 계속 어나가겠노라고 다짐한다.


그 다짐을 담아, 노란색 형광펜을 들어 또 하나의 곱씹을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힘을 꾹 주어서, 눌러 긋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다른 건 너무나 당연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