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GENIUS, 난 '천재'가 아니니까.
글을 쓴다는 게 무서웠던 적은 없나요?
가끔 이런 질문을 듣는다. 왜 없을까. 당연히 있었다. 그것도 꽤 여러 번.
텅 빈 노트를 펴놓고 손가락으로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몇 시간이고 앉아 있던 적이 있었다. 뭔가 쓰고 싶은데 대체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애꿎은 시간만 죽였다. 컴퓨터에 익숙해진 뒤에는 워드 프로그램의 하얀 화면을 보며 멍 때리던 때가 많았다.
깜빡이는 커서가 나에게 "뭐라도 적어보라"며 채근하는 것만 같았다. 노트 위에 적은 문장이 뭐였는지 알 수 없도록 북북 그어버리고, 화면 위 활자를 향해 백스페이스 키를 연타하던 시간. 그럴 때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무기력 상태가 찾아오곤 했다.
글이 싫어졌던 건 아니다. 돌이켜보면 분명 그렇다. 뭔가를 쓰고 싶은 욕망은 여전했고, 틈틈이 떠오른 생각들을 메모한 것은 계속 쌓여갔으니까. 다만, 그것들을 다듬고 정리해 완성시켜야 하는 단계에서 머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데이터를 아무리 집어넣어봐도 결괏값을 보여주지 않는 맛 간 컴퓨터처럼.
똑같은 증상을 몇 번 겪으면서, 나를 지배하던 감정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확신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지만, 그건 두려움이었다.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을 내놓는 것에 대한 꺼림칙함.
한 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듯, 한 번 적은 글 또한 그러하다. 부족하거나 경솔했던, 혹은 잘못됐던 부분은 몇 년이 지나고서도 고치면 된다지만…… 그걸 깨닫고 실행에 옮기기 전까지 퍼져나가는 건 막을 도리가 없으니까.
다 내가 부족한 탓이니, 더 많은 걸 접하고 배우다 보면 자연히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모르던 것을 알아갈수록 두려움은 커졌다. 하긴, 애초에 평생을 배워도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거늘.
'이 사람은 왜 이렇게 글을 잘 쓰나. 무엇을 접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기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나.'
내가 잘 모르는 것을 잘 풀어놓았거나, 혹은 그 자체로 매우 잘 썼다고 느껴지는 글을 볼 때면 어김없이 들던 생각이다. 부러움, 질투심, 난 대체 뭘 했나 하는 자괴감 등으로 채워진 비생산적인 감정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견고해졌다. 스스로에 대한 '셀프 채찍질'은 더 나아지기 위한 수단이 돼야 마땅하건만, 아슬아슬한 유리 멘탈에게는 버티기보다는 깨져버리는 쪽이 더 쉬웠나 보다. 계속 쌓여가는 정신적 대미지는 '이제라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닐까?'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일에 대한 기우杞憂에 푹~ 젖어, 현실의 목적의식과 의욕을 깡그리 갖다 버렸던, 지금 생각하면 참 못난 꼴.
평범함, 미지근함, 특별하지 않음, 무의미함. 내가 써놓은 수많은 글들에 스스로 부정적인 딱지를 붙여버린 일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남들의 시선을 의식했고, 남들의 생각을 지레 짐작했다. 내 머리에서 나왔고 내 손으로 쓴, 어찌 보면 내 자식 같은 글들에게는 다시 못할 몹쓸 짓을 해버린 거다.
최근 <모든 순간이 꼭 의미 있어야만 해?>라는 글을 쓰면서 새삼 다시 한 번 깨달은 게 있다. 멋지고 훌륭한 글은 생각만 거듭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오는 게 아니다. 백 년,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을 가졌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난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저 글 쓰는 걸 좀 더 좋아하는 범인凡人일뿐이지. 그러니 나는 무수한 시도와 삽질, 그로 인해 발견한 부족함을 인정하고 채워나가는 방향을 택해야 함이 당연하다.
그래…… 어쩌면 무의식 중에 스스로 천혜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시건방진 자만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주위에서 '잘 쓴다'는 인정을 곧잘 받아왔으니, 자연스레 우쭐해지며 글쟁이야말로 내 사명이라 여긴 걸 수도 있다. 글로 옮기는 것조차 민망한 이야기지만, 그게 삽질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해야 비로소 고칠 수 있을 듯하다.
내가 쓰는 글은 모든 면에서 완벽해야만 한다는 강박증, 그로 인해 생긴 '부족한 글'에 대한 기피증, 혹시라도 결함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흘려보냈던 시간. 모든 건 결국, 스스로 옭아맨 것이었다.
몇 주 전 종영한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을 한창 챙겨볼 때, 출연자 중 누군가(아마 유재석이나 유희열 중 하나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음악은 아는 만큼 들리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시간 아득한 절망을 느끼게 했던 '글이 무서웠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 여겨진다. '글'이라는 것에 대해 내가 조금이나마 더 많은 것을 알게 됐기에, 그 낯섦이 두려움으로 나타났다는 것. 이게 정답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냥 그렇게 믿기로 했다. 언젠가 또 찾아올지 모를 '하얀 종이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나만의 처방전인 셈이다.
철학적인 주제인데…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엄밀히 다른 사람이라는, 뭐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그 논리대로라면 '과거의 내가 부끄럽다'는 건, 현재의 내가 그때보다 어떤 쪽으로든 더 나아졌다는 의미다. 즉, 나는 끊임없이 더 발전하고 있으며, 나아가 내가 살아있다는 근거가 돼 준다.
"과연 내가 글 쓰는 사람으로 대성大成할 수 있을까?"
꿈에서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건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혹 누군가 그런 말을 하더라도, 그건 결국 그럴듯한 '예측'이거나 넌 잘 할 거라는 '응원'일뿐이다. 운명을 관장하는 신이 정말로 내 앞에 나타나 이야기해준다면 모를까… (물론 누군가 나타나 자신이 운명의 신이라고 한다면 미친놈 취급하고 안 믿겠지만)
꽤 이른 나이부터 평생 글 쓰는 일'만' 하며 살고 싶다 생각했었다. 모르는 것이 수두룩했던 어린 나이에 겁 없이 뱉은 다짐이었고, '그땐 어렸다'는 말을 핑계 삼아 스스로를 합리화하려고도 해봤다. 최근에는 눈을 좀 낮춰서 어떻게든 글로 먹고살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요즘은 또 주된 직업보다는 그냥 글을 써서 누군가와 공유할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다 필요 없고 그냥 쓸 수만 있어도 충분히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유야 어찌 됐든, 나는 여전히 글을 쓴다. 두려움을 많이 극복해낸 요즘, 한 마디 문장을 적고 나면 또 쓰고 싶은 말이 차고 넘치게 많아 매번 엿가락처럼 늘어진 글이 될 때가 많다. 이 글도 결국 마찬가지가 됐고, 앞으로도 못내 부족하고 부끄러운 글을 많이 쓸지도 모른다. 아니, 100%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겠는가. 나는 천재도 아니고,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완벽한 글을 써야 할 '의무'를 진 사람도 아니다. 세상 사람은 저마다의 '다름'을 간직하고 있는 법인데,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안 되는 일이라면, 나는 그냥 즐겁게 쓰는 데만 애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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