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동글

흥미로웠다가 불쾌했던, 하지만 다시 기대하게 된 이야기

어느 내성적인 놈의 눈으로 바라본, 드라마 <내성적인 보스>

by 이글로
※ 이 글은 드라마 <내성적인 보스>를 '4회까지만' 시청한 시점에 쓴 것임을 밝힙니다.


#1.


<혼자가 편한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 - "그래요, 난 혼자가 편해요.") '내성적인 사람'을 주제로 제법 깊이 있게 들어가려 했던 책. 그들의 본성과 특징은 무엇인지, 얼마나 많이 존재하며 서로 그 존재를 모른 채 살고 있는지를 말해준 책. 아마 한동안 기억에 남는 책을 꼽으라면 필히 다섯 손가락 안에 이 책이 들어갈 것이다.


유독 이 책이 기억에 남는 이유? 별 거 없다. 그저 나 역시 내향성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 책 안에 수록된 내향성 테스트도 진지하게 해봤고,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서너 개씩의 밑줄을 그어가며 그야말로 공들여 읽었던 건 오직 그 이유다.


글쎄… 책 한 권 정독 좀 하는데 뭐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겠냐마는… 어쩌면 나 스스로도 내성적이라는 걸 단점 내지는 풀어야 할 숙제로 여기고 있던 게 아닌가 싶다. 혼자 있는 게 편해 인간관계를 수월하게 가꾸지 못했던 과거를 아쉬워하며, 그 해결법을 책 속에서 찾고자 했던 걸지도.


city-man-person-skyline.jpg 외로운 도시의 남자. 왜요, 운치 있고 좋잖아요. (이미지 출처 : pexels.com)


#2.


그런 책을 읽었기 때문일까. 이상하게 그 후로 이야기 속에서도 '내성적인 캐릭터' 또는 '특정 인물의 내향성'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이야기 흐름에서 그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한꺼풀 더 생각하게 됐다. 무릇 관심을 가진만큼 더 보이게 마련이고, 보이는 만큼 궁금증은 꼬리를 무는 법이다. 그렇게 도착한 내 호기심의 종착역은, 바로 이것.



내성적 인물이 드라마 주인공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갖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지만 답을 내리는 건 쉬웠다.


No.


아마 책이나 영화였다면 어느 정도 여지를 뒀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아니다. 한국의 드라마 문화는 오래 전부터 굳건하다. 보편적 대중을 위한 콘텐츠의 대표 주자. 조금이라도 넓은 폭의 사람들의 감성을 어루만져야만 주목받기 쉬운 장르다. 최근에는 케이블 채널 등을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 기본 뼈대는 여전히 건재하다.


드라마의 주인공이란, 이야기의 중심에 서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가장 먼저 두드려야 하는 존재. 가급적 더 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캐릭터가 좋다. 주로 훌륭한 인간성과 쾌활한 성격을 갖춘 경우가 많고, 외모와 경제력까지 두루 갖춘 경우도 종종 있었다. (사실 거의 모두가 셋 중 둘 이상을 갖고 있다. 1순위 성격, 2순위 외모, 3순위 돈.)


이러한 '주인공의 조건' 트렌드(?)를 고려하면, 내성적인 캐릭터가 파고 들어갈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아… 본래 내성적이었지만 그걸 극복해가는 플롯을 언젠가 본 것도 같으니, 비좁게나마 자리가 있긴 있다고 해둬야겠다.


내가 본 책에서는 '세상의 3분의 1 정도가 내향인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지만… 바꿔 말하면 나머지 3분의 2는 그렇지 않다는 의미도 된다. 게다가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애시당초 아예 관심없는 사람도 많다.


내성적인 캐릭터의 드라마가 어떤 대중적 메시지를 던지기엔 여러 모로 부족해보였다. 만들려거든 정말 작정하고 만들어야 할 거라는 뜻.


내성적인보스2.JPG 솔직히 이 티저를 봤을 땐 그냥 작정하고 웃기려는 건 줄 알았다.


#3.


바로 그, '작정하고 만든' 드라마가 나왔다. (사실 매주 <도깨비> 본방 사수하다가 얻어걸린 거다.) 내성적인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것만 해도 눈길을 끄는데, 게다가 그가 한 조직을 이끄는 '보스'란다. 내가 봐왔던 '주인공의 조건' 3박자 중 첫 박자부터 과감한 엇박자를 시도한 캐릭터.


설정에 어울리게, 스토리 곳곳에 답답함이 팍팍 깔려있다. 대략 고구마나 닭가슴살 한 덩어리 씹는 듯한 느낌이랄까. 과거의 경험들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하게 되는 장면도 몇 있었다는 건 그나마 다행.


4회는 조금 다른 속도로 다가왔다. 불안한 전개와 예측 가능한 갈등. 사람들 앞에서 집중되는 시선을 견디지 못해 뛰쳐나가는 은환기(연우진 분). 그로 인해 망쳐버린 경쟁 프레젠테이션. 흠… 그 장면에서 '내성적인 사람'보다는 '심리적 고통을 겪는 사람'을 보았다면 내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내성적인보스3.JPG 동공지진 - "쟤들 뭐야, 무서워…"


은환기라는 캐릭터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서툴다. 표현을 잘 못하고 시선을 피하며 혼자 있기를 즐긴다. <혼자가 편한 사람들>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둘 중 한 가지 성향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대전제를 뒀지만, 은환기는 정말 100% 내향성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어차피 가상의 인물이긴 하지만.)



#4.


4회의 마지막 씬. 만취한 팀원들을 하나하나 택시에 태우고, 기사에게 집 주소를 알려주며, 기사의 얼굴과 택시 번호판을 사진으로 남기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게 다가온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채로운(박혜수 분). 타고난 성격 + 술의 힘으로 화끈한 돌직구를 연이어 날린다.


왜요? 왜 사람을 몰래 뒤에서 지켜봐요?
앞에서는 왜 안 봐요?
…못 보는 건가?

사람을 무시하는 줄 알았더니,
혹시… 무서워요?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질문을 쏟아내더니 결정타를 꽂는다.



그렇게 조용히 지켜만 보면 아무 일도 안 생겨요.
지켜보기만 해선 아무도 지킬 수 없어요.

내성적인보스1.JPG 동공지진 2 - "얘 뭐야, 진짜 무서워…"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조금 불편했다. 내향성을 정면으로 자극하는 대사로 느껴졌고, 앞으로의 이야기가 은환기의 성격을 바꿔가는 쪽으로 흘러갈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성적인 보스>라고 제목을 달아놓고, 결국은 <내성적'이었던' 보스>로 끌고 가려는 모습을 예상했다.


불편한 대사에서 느낀 불편한 마음을 안고, 이 글을 시작했다. '재미있지만 불편한 이유'라고, 제목도 제법 까칠하게 잡았었다. 그 후, 소재와 필요한 이미지 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들락거렸다. 그러다가 TVING 공식 홈페이지에서 이 드라마의 기획과 관련된 웹툰을 발견했고, 생각의 방향을 바꾸게 됐다.


INKDDJWX74PV8CUFEMFG-vert.jpg 출처 : '서밤님의 <내성적인 보스> 웹툰


TVING <내성적인 보스> 홈페이지 [내보스X서밤] 웹툰


총 4화로 이루어진 짤막한 웹툰. 하지만 처음 품었던 불편했던 감정을 없애고, 글의 방향을 돌리기엔 충분했다. 오히려 <혼자가 편한 사람들>에서와 같은 접근 방식을 느낄 수 있어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고 할까.


진정한 의미의 내향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만 하는 드라마. 과연 가능할까? <내성적인 보스>를 끝까지 지켜볼 명분으로 충분할 호기심이 생겼다.


안 되도 상관없다. 어쨌거나 시도했다는 게 중요한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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