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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로 Nov 24. 2024

[연재소설] 저 너머의 하늘 #44.

지홍은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평소 겁은 없는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바로 코앞에서 폭탄이 터지는 걸 두눈 뜨고 바라보는 건 별개의 일이다. 백광이 점점 짙어진다. 눈을 감았음에도 눈꺼풀 너머로 세상이 하얀 빛으로 덮여간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 거대한 에너지가 한 점으로 모이고 있음을 알려주듯 웅웅웅-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간격도 점점 짧아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이 되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터진다…!!!’


툭-!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먼저 들린다. 


‘…… 툭? …… ‘쾅’이라든가, ‘펑’이 들려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잔뜩 긴장한 채 온 얼굴에 주름이 팰 만큼 눈을 꽉 감았는데… 폭발음 대신 맥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를 가볍게 터치하는 소리 같다. 의식하지도 못힐 만큼 찰나의 순간에 죽은 게 아니라면, 폭발은 실패로 끝난 게 맞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눈꺼풀 너머를 덮었던 하얀 빛이 스르륵 사라졌다. 이어 멍멍해졌던 청각이 돌아오고, 짤막한 정적이 이어졌다. 잠시 후, 잔뜩 긴장한 듯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 당신이 어떻게…]


조금 전까지 자신의 목을 붙잡아 들어올린 채 의기양양하게 지껄여대던 그 목소리가 분명하다. 하지만 내뱉는 대사는 잠깐 사이에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됐다.

뭔가 싶어 슬며시 눈을 떠보니 예상했던 것을 뛰어넘는 광경이 보였다. 먼저 마스크 위쪽, 겁에 질린 눈이 보인다. 인상이나 쓰고 음흉하게 처웃을 줄만 아는 놈인가 싶었는데, 이 자식도 겁을 먹긴 먹는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표정. 그 뒤로 놈의 어깻죽지에 얹힌 손 하나가 보였다. 손으로부터 이어지는 팔은… 지홍에게 무척 익숙한 옷을 입고 있었다. 광택이 없는 금빛의 정장.

그 즈음 지홍의 목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지홍은 털썩- 바닥에 떨어져 주저앉은 채 인상을 쓰며 목 언저리를 매만졌다.


“당신…!”

“여어, 내가 타이밍을 잘 맞춰 온 것 같군?”


잔뜩 찌푸린 표정의 지홍과 달리 신현우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일촉즉발이었던 조금 전 상황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 말투, 그 태도에 왠지 약이 올라, 지홍도 짐짓 여유로운 척 농담조로 응수했다.


“잘 맞춘 건지는 모르겠고, 매우 극적인 타이밍에 나타났다는 데는 백 번이라도 동의해주지.”

“하하, 다행이군. 흑막이 사라진 뒤에 왜곡됐던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바람에 오히려 낯선 공간에서 꽤 헤맬  뻔했는데… 그대가 기운을 흘려준 덕분에 찾기가 수월했어. 그러고 보면 그대 스스로 목숨을 구한 셈인가.”

“어찌됐건 도움을 받았으니 구명의 은혜에는 감사를 표하지.”

“그런 걸로 해두자고. 자… 그럼 이제 일을 마무리해보실까.”


만담처럼 이야기를 주고받던 현우의 표정이 삽시간에 차갑게 변했다. 그의 분위기에 호응이라도 하듯 주변 공기도 얼어붙듯 싸늘해졌다. 현우는 단순히 사내의 어깨에 손을 짚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속박된 것인지 사내는 옴쭉달싹도 하지 못한다. 

현우는 무심한 듯한 눈빛으로 주변을 빙 둘러본다. 휘영에게 시선이 멈췄다. 사내가 제압되면서 짓누르던 기운이 사라지면서 어느 정도 정신을 추스른 상태. 현우를 바라보고 있긴 했지만, 엄청난 충격과 공포에 한동안 시달린 탓인지 몹시 지친 모습이다. 현우는 혀를 끌끌 찼다.


“저래서야… 생각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군. 이 정도라면 애당초 지켜질 수 없었던 계약이었던 건가. 뭐, 일부러 어기려 한 건 아니니… 그냥 넘어가는 수밖에 없겠는데.”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중얼거린 현우는 여전히 어깨에 손을 짚은 채로 걸음을 옮겨 사내의 옆에 섰다.


[다… 당신, 이곳을 어떻게…]

"…닥쳐라. 당장이라도 네놈 명줄을 끊어버리고 싶은 걸 애써 참는 중이니까. 명령만 아니었으면 참을 필요도 없었겠지만… 쯧."

[…….]


나지막하지만 씹어뱉는 듯한 음성. 그 말에 사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위압. 지금 그의 입장을 설명하기에 매우 적절한 단어다. 현우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깨에 짚은 손으로 금빛의 기운을 흘려넣었다. 은은한 빛이 사내의 몸 안으로 스며드는가 싶더니 오래지 않아 겉으로 빠져나와 그 주위를 감싸는 희미한 광채를 만들었다.


“네놈 능력을 봉인해뒀으니 허튼 생각은 하지 않도록 해.”

[제정신이라면 당신을 앞에 두고 그런 짓은 못하지 않을까.]

“뭐, 틀린 말은 아니군.” 

[하… 이렇게 허무하게 잡히다니. 도망다닌 세월이 무색할 지경이야.]

“네놈이 자초한 일이다. 자, 그럼 이쪽 문제를 마무리지어 보실까.”


사내가 체념한 듯 고분고분해지자, 현우는 먼저 휘영 쪽을 바라봤다. 진이 다 빠진 모습이었지만, 아까부터 현우가 하는 모양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일이 좀 꼬이긴 했지만… 결국 제자리를 찾았군요. 좀 어떠십니까?”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정확히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예상했던 시나리오 중 하나이긴 합니다. 말씀드렸듯 늘 변수를 예측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

“상황이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거죠?”

“글쎄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걸 지금 몰라서…… 아니, 됐어요. 이제와서 그걸 따진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그 말과 함께 휘영은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걱정하시는 종류의 일은 없을 겁니다.’라고 하던 현우의 말이 자꾸 맴돈다. 거짓말. 그는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추적해온 존재라 했으니, 그 능력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터다. 자신을 그 외딴 공간에 가둘 수 있다는 것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도 진즉에 파악했을 것이다. …… 사실, 스스로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았기에 믿지 않으려 애썼을 뿐.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한 지홍이 다가가 진우의 상태를 살폈다. 무릎을 꿇고 앉았던 자세에서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미약하게 숨은 쉬고 있었지만, 지홍은 휘영 쪽을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누가 봐도 희망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이다. 게다가 그 상태로 별다른 조치 없이 상당한 시간을 방치돼 있었던 상황. 휘영도 그 사실을 알기에 입술을 꾹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영태를 돌아보았다. 잠이 든 건지 의식을 잃은 건지 모를 정도로 늘어진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호흡은 안정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현우가 말을 꺼냈다.


“할 이야기는 많지만, 별로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군요. 나중으로 미뤄두도록 하죠.”

“…….”


휘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비참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거라 여겨지는 신현우라는 사람을 생각하니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체력적으로도 힘든 상태였기 때문에 복잡한 이야기를 소화할 여력이 없기도 했지만.


“일단 이 자리를 수습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지홍이 대신 말을 이었다. 현우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지홍은 눈짓으로 두 사람을 가리켰다. 휘영은 본인의 거동이나 겨우 가능할 정도로 보이는 상태. 거기다 영태와 진우, 두 사람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다.


“흠…….”


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만큼 단순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사람을 옮기는 일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십 톤짜리 트럭을 옮기는 일도 그에게는 쉬운 일이니까. 다만 문제는 ‘자연스러움’이다. 이 주변은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 한 인적이 거의 없다시피 한 곳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 자체가 몹시 부자연스러운 장소라는 뜻이다.

그나마 휘영 일행은 경찰이라는 신분이 있다. 다소 의심스럽다고는 해도 어떤 식으로든 명분과 개연성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홍과 현우는? 표면적인 그들의 직업은 술집 사장과 흔한 회사원이다. 물론 개인이 어딜 가는지야 본인의 자유겠지만, 최소한 정장 차림으로 찾아오는 건 전혀 일반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부상당한 사람들을 옮겨놓는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설령 눈에 띄지 않고 옮길 수 있다 해도, 그들을 제외하면 이 자리에는 휘영만 남는다. 앞뒤 정황을 따지고 들어가게 되면 수월하게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경찰 한 사람은 부상에, 한 사람은 생명이 위독한 지경. 사건 자체가 쉬쉬하고 덮을 만한 수준이 아니다.


“골치 아프게 꼬여버렸군. 어디… 이건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응? 도움? 누구에게?”

“역시, 그러실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홍의 반문에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언제 나타난 건지도 모르는 사이에 웬 소년이 다가와 그 옆에 서 있었다. 


“앗, 시… 아니, 깜짝이야. 당신은 누구…?”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던 욕설을 눌러넣은 지홍은 늘 하던 습관대로 소년을 탐색했다. 겉모습은 푸른 빛의 외투를 걸친, 잘 사는 집 도련님처럼 세련된 느낌을 자아낸다. 하지만, 지홍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읽어낼 수 없었다. 가늠할 수 없으니 정확히 단정하는 것도 애매한 일이지만 현우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설마 이 녀석도 신장神將…? 아니, 무슨 신장이 동네 옆집 아저씨마냥 흔하게 튀어나와? 이게 맞아?’

“처음 뵙겠습니다. 한빛찬이라고 합니다. 껍데기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요. 저기 계신 분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그쪽 분은… 근원계 소속이시군요?”


소년은 싹싹하게 지홍을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그 살가운 태도에 산전수전 많이 겪은 지홍으로서도 당황스러울 정도다. 특히 그의 마음 속 짐작이 맞다면 더욱 더 낯선 장면이다. 자신에 대해 금세 파악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얼떨결에 지홍은 끄덕하고 인사를 받았지만, 빛찬은 그의 답례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으로 빛찬은 휘영 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을 바라보고는 있었지만 별다른 관심이 없는 눈빛. 잠시 고민하던 빛찬은 그냥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현우가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나?”

“아,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먼저 처리할 일이 있었거든요. 이 근처에 와 있었던 건, 저 친구? 라는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저 친구가 제압된 이후부터였습니다.”

“주군의 지시인가?”

“딱히 명령하신 건 없습니다. 돌아가는 정황을 보아하니 손을 거들 일이 좀 있을 듯하여.”

“그렇군. 불쾌했다면 미안하네. 좀 예민한 사안이라.”

“괜찮습니다. 충분히 그러실 수 있다고 봅니다.”


둘의 대화는 기묘하다. 현우는 하대를 하고 빛찬은 존대를 하는 걸로 보아 언뜻 상하관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면 어떤 면에서는 동등한 사이 같기도 한 느낌이랄까. 그 모습을 보며 지홍은 짐작을 굳혔다. 무엇보다도 밝은 푸른빛이라는, 비교적 흔치 않은 색상의 옷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모습이 그의 추측을 확신으로 이끌었다.


“그래, 그럼 의견을 들어보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간단합니다. 저 분들의 남은 동료를 이 곳으로 인도하면 해결됩니다.”

“남은 동료? 아… 그러고 보니…”

“네, 알고 있으셨을 겁니다. 반대편 진입로 쪽에서 허겁지겁 도망쳐 오는 걸 제가 발견했지요. 곧장 합류하게 두면 오히려 더 문제가 커질 듯해, 제가 잠시 손을 써 두었습니다.”


그 말에 내내 잠자코 있던 휘영이 반응을 보였다.


“설마… 최 형사님?”

“통성명을 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만, 짧은 머리에 덩치가 크고 우직하게 생긴 분이라면 맞습니다.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으니 지금쯤 이 근처에 도달해 있을 겁니다.”

“이 근처라고? 제길, 그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괜찮습니다. 이 자리는 인식하지 못한 채 근처를 헤매고 있을 겁니다. 흑막이 깨진 순간부터 이 일대는 다시 온전히 제 관할로 들어왔으니까요. 눈치채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아니, 애당초 자네가 근처에 있다는 걸 조금 전에 알았으니까. 가만… 그럼 내가 저 친구의 흔적을 빨리 찾아낼 수 있었던 것도…?”

“허락 없이 손을 쓴 점 송구합니다. 가만히 둬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셨겠지만… 상황이 좀 급박하게 돌아가더군요. 저는 잠시 자리를 비워야 했던 터라 부득이하게 연결을 도와드렸습니다.”

“하하하… 재미있군. 완전히 자네 판 위에서 뛰어다닌 기분이야.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주된 목적은 달성했으니 달리 문제 삼지는 않겠네.”


현우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빛찬의 말대로라면 그는 지홍이 싸우는 상황까지도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지홍이 수세에 몰리는 것을 보고도 일절 개입은 하지 않았다. 자칫 존재를 들키면 일이 어그러질 수 있었으니까. 또, 현우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문제기도 했고. 현우는 그의 신중한 판단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그 동료라는 자를 이곳으로 인도하고 우리는 빠지면 되나?”

“그렇습니다. 그 뒤는 저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요. 사건에서 저희의 존재 자체가 빠지는 셈이 되니 엮일 일도 없죠. 저희 모습을 본 건 저기 계신 한 분 뿐이고… 용의자를 본 건 총 세 사람이지만, 한 분은… 증언을 하실 수 없을 거 같군요. 그럼 나머지 두 분이서 도주한 걸로 하든 알아서 합의하시지 않겠습니까?”

“잠깐, 그럼 나는?”


자신을 빼놓은 채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는 것을 본 지홍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빛찬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희와 같이 빠져나가시면 됩니다. 이 일대만 빠져나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특별히 원하시는 장소가 있다면 일단 이 공간만 빠져나간 뒤에 따로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음… 아니… 뭐… 그건 고맙긴 한데…”

“어울리지 않게 쭈뼛거리는군. 뭐 할 말이라도?”

“그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긴 한데, 지금은 좀 그렇고…”

“음?”


머뭇거리는 지홍의 모습에 현우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본래의 맥락으로 돌아왔다. 그는 상황을 정리해본 다음 휘영을 향해 말을 건넸다.


“아무튼, 그렇게 됐다고 하니 저희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그 동료라는 분이 찾아오실 겁니다. 저 친구…의 일은 안타깝게 됐습니다만… 제가 수습할 수는 없는 일이군요.”

“…….”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필요한 이야기가 있다면 나중에 나누도록 하시죠. 그럼 이만 가세.”


어차피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 현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빛찬을 향해 손짓했다. 빛찬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곧바로 허공에 문을 열었다. 현우가 포획한 사내와 함께 먼저 공간 너머로 사라졌다. 지홍은 휘영을 향해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슬며시 외면하는 그녀의 모습에 말을 삼켰다. 그리고는 현우의 뒤를 따라 문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빛찬이 들어가자 허공에 열려 있던 문은 사라졌다.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새삼스럽게도 뒤늦게 한적한 야산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휘영은 한바탕 휘몰아치듯 흘러간 상황을 되짚어보았다. 한 마디로, 아무 것도 한 게 없었다. 고집을 부려서 혼자 여기까지 왔으면 뭐라도 내세울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무력하게 갇혀 있다가 뒤늦게 빠져나와 공포에 억눌려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성과는커녕 장면 속 엑스트라가 되어 그냥 휩쓸려가고 말았다.


“뭐야, 대체 이게…….”

“팀장님! 어디 계십니까! 오 형사! 대답 좀 해봐!”


저만치서 재한의 목소리가 들린다. 휘영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소리를 지를 정도의 힘은 남아있지 않아서,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몇 번 더 외침이 들리다가, 휘영의 모습을 발견한 듯 소리가 멎었다. 오래된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은 형사! 어떻게 된 거야? 팀장님은 왜 저러고 계시고?”

“저도 다시 합류한지 오래되지 않았어요. 팀장님은 저와 만난 직후에 의식을 잃으셨고요. 다행히 지금은 괜찮으신 것 같은데…”

“같은데? 뭐야, 왜 말을 끝까지 안 하고… 어…?…”


재한은 여전히 나무에 기댄 채 조금 기울어진 영태의 자세를 바로잡아주고 다시 일어섰다. 말을 받으며 휘영 쪽으로 몸을 돌리던 그는 눈을 의심할 정도의 충격적인 장면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모로 쓰러져 있는 진우의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찼다. 낙엽 부스러기와 흙먼지로 범벅이 된 옷, 얼굴을 비롯해 여기저기 말라붙은 핏자국, 그리고 결정적으로…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한쪽 팔.


“저기… 은 형사, 내가 지금 뭘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니지…?”

“…….”

“오 형사… 진우야…….”


휘영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재한은 진우의 이름을 부르며 비척비척 걸어갔다. 불과 반나절 전 즈음, 조를 나눠 헤어질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가늘게 호흡은 있었지만, 그 숨이 오래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재한 역시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휘영은 재한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할 수 있는 말도 없었고, 뭐가 됐든 말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무엇을 잘못 선택했던 걸까.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한 답없는 의문만 가슴을 먹먹하게 죄어온다.


“그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충격에 빠져있던 재한은 머지 않아 정신을 차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영도 묵묵히 그를 도와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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