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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저 너머의 하늘 #52.

by 이글로

신현우가 제안한 ‘거래’라는 건, 사실 그리 복잡한 내용은 아니다. 핵심만 발라내자면 ‘명분’을 만들어주겠다는 것. 불천이 백현에게 임무를 준 것은 한 팀의 수장이라는 지위와 그가 가진 능력을 모두 고려한 결정이다. 겉으로 봤을 때 이번 임무는 단순히 ‘규정 이외의 존재’를 척결하는 정도에 불과한 일. 이론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물론, 이론과 현실은 늘 괴리가 있게 마련이다. 다만, 이 정도의 상황이라면 임무 실패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요컨대, 현우의 제안은 백현으로 하여금 임무를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핑곗거리’를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다.


다만, 그 제안을 한 존재가 근원계와 대척점에 있는 현계의 신장, 최고위 간부라는 점이 문제다. 규정대로라면 백현은 현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만으로도 최소 경위서 제출, 혹은 근신 처분을 받을 수도 있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백현은 갈등할 수밖에 없다. 현우가 제안한 거래가 그의 입장에서 매우 현실적이어서다. 실제로 혜월은 그의 팀원이기 이전에 근원계 전체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니까.


본래 비전투 계통의 지원형 능력자는 다른 계통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다. 능력의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같은 능력이라도 그 수준 차이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다소 희귀한 재능을 가졌더라도 그 역량에 따라 투입할 수 있는 임무의 편차가 큰 데다가, 수준이 너무 낮아 실무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지원형 능력자를 필요로 하는 상황은 늘 차고 넘친다. 본래 소속된 팀이 분명 있지만, 그 외에도 ‘협조’라는 명분으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것이 다반사다. 이번 임무에 함께 하려 했던 백현의 또 다른 팀원 태을이 자리에 없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물론, 그런 현실적인 문제를 둘째로 치더라도, 애당초 백현의 성격상 팀원을 포기한다는 선택을 할 리는 없었다.


'어차피 저 존재가 개입한 순간부터 최선이라 할 수 있는 결과는 물 건너갔다. 그렇다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차선인가? 오히려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신중하게 곱씹어봤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극단적으로 말해, 현우의 제안을 거절할 경우 그 뒤의 상황이 불 보듯 뻔하다. 당장 혜월의 안위가 매우 위험해질 것이다. 혜월은 그와 달리 근원계에 소속된 상태로 넘어왔지만, 신장 정도의 능력자라면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만에 하나, 백현이 그녀의 희생과 그에 뒤따를 후폭풍을 감수한다면? 글쎄…… 설령 그렇게 결정한다 해도 최선의 결과가 되지는 않는다. 상대는 현계의 신장들 중 으뜸으로 꼽히는 존재. 백현이 다소 비범한 역량을 가졌다고는 해도 낙승을 점칠 수 있는 이가 아니다. 고로 지금 그가 차지하다시피 하고 있는 휘영의 영체를 빼앗아 소멸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득(得)은 분명하지 않고 실(失)은 확실한 길. 그렇다면 굳이 선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네. 은휘영 씨도 그렇고 자네 부하도 그렇고 곧 깨어날 거거든. 보는 눈이 적을 때 결단을 내리는 게 좋지 않겠나?”

“…….”


현우의 독촉이 이어진다. 백현은 얼굴을 찡그렸다. 보통 장고(長考) 끝에는 묘책이 나온다지만, 생각이 지나치면 악수(惡手)가 나오는 일도 많다. 백현은 머리를 비웠다.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게다가 시간까지 그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결국 ‘믿을 수 없는 상대의 의심스러운 호의’에 전적으로 기대는 수밖에 없게 됐다. 백현은 손을 내려 응축시켰던 힘을 흩어버림으로써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표시했다.


“무척 현명한 판단일세. 꽤 오래 못 본 듯한데 그 사이 아주 신중해졌군.”

“당신에게 칭찬 듣고 싶지 않아.”


퉁명스러운 대꾸에 현우는 다시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런 다음, 쓰러져 있는 휘영을 안아 들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움직임이다. 그가 의도한 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찜찜함을 애써 떨쳐낸 채, 백현은 혜월에게로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치명적인 부상은 없어 보였다.


“제법 역량이 되는 이 같던데. 손속이 과하지는 않았으니 큰 탈은 없을 걸세. 길어야 10분 남짓이면 깨어날 거라 예상하네.”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겠다.”

“아무렴. 자네가 만족할 수 있는 복수의 기회가 오기를 손꼽아 기대하겠네.”

“…….”


왠지 약 오르는 말투다. ‘물론 그런 일은 절대 없겠지만’이라는 말이 뒤에 생략된 것 같달까. 백현은 이를 뿌득- 갈았다. 그런 그를 보며 현우는 싱긋 웃어 보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아졌다. 현우는 변함없이 느긋한 태도로 자신이 설치했던 결계를 걷어낸 다음 유유히 걸어서 떠나갔다. 백현은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 노려보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공간. 어디선가 비쳐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줄기만이 유일한 조명이 돼 공간을 희미하게 밝혀준다. 복도 한켠에 닫힌 문이 보이고, 그 앞에는 우재와 권오가 열중쉬어 자세로 지키고 서 있다. 생명이 없는 목석처럼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둘은 문득 복도 한켠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저벅- 저벅-

우재가 서 있던 방향에서 느릿하고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우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주시했다. 어둠 속에서 점차 뚜렷해진 실루엣은 이윽고 노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해강현 님 아니십니까.”

“자네, 누구였더라…? 아, 강림팀의 우재였던가? 오랜만일세.”

“마지막으로 뵀던 게 꽤 오래전인데 아직도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헐헐헐, 그래도 명색이 학자인데 머리 하나는 쓸만해야 하지 않겠나. 그나저나 마침 면식이 있는 친구라 다행이군.”

“아, 여기 오신 이유가…?”

“그래. 안에 있는 친구를 좀 만나러 왔다네.”

“그러고 보니…”


우재는 과거 백현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해강현은 근원계 두뇌 집단의 수장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학자이자 교육자다. 즉, 수많은 제자를 길러왔다는 뜻이다. 특히 비전투계 능력자 중에는 단 한 가지라도 그의 가르침을 거쳐가지 않은 이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렇게 성장한 해강현의 제자들은 근원계와 현계, 양쪽에서 비정규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모두가 해강현이 직접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연구하는 주제로 열리는 특강을 듣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기존에 양성한 제자들이 사범으로서 다시 사사(師事)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직접 가르치시는 건… 그 가운데서도 까다롭게 고른 일부 인원뿐이라고 했었지…’


그리고 지금 이 문 너머에 있는, 자신들이 압송해 온 자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해강현이 직접 발굴해 가르친 직전제자 중 하나. 그렇게 따지고 보면 꽤나 거물이라 할 수 있다. 우재는 희미한 조명 아래 노인의 얼굴에 뚜렷하게 드리운 그늘을 보았다. 그로서는 차마 이해하기 어려운 깊은 근심까지도 어렴풋이 느껴진다.


“해강현 님, 어떤 심정이실지 저로서는 감히 짐작하기 어렵습니다만… 저는 원칙대로 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헤아려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알고 있네. 지위를 이용해 특권을 받을 생각은 없어. 그래서 이걸 받아왔다네.”


해강현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불천의 인증이 찍힌 실물 서류다. 그 내용을 확인한 우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선임의 태도를 본 권오 역시 말없이 길을 열었다.


“고맙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세.”

“길어지셔도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안으로 들어선 해강현은 초췌한 모습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방 안의 환경은 그리 열악하지는 않았다. 침대도 있었고,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하지만 지홍은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무릎을 세워 고개를 파묻은 자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움직임이 없다. 해강현은 쓸쓸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곧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어디, 상한 데는 없는가?”


뚜렷한 인기척에도 아랑곳 않던 지홍은 스승의 목소리에 움찔- 하더니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 오셨습니까, 선생님.”

“절차를 밟고 오려다 보니 생각보다 늦었다네.”

“오랜만에 뵙는데 이런 모습으로 인사를 드려 송구할 따름입니다.”

“내가 어디 그런 걸 신경 쓰던가. 다행히 몸은 괜찮아 보이네만.”

“죄수치고는 대우가 나쁘지 않습니다.”

“몹시 피곤해 보이네만. 쯧쯧… 그래, 마음이 많이 상한 게로구먼.”


지홍은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강현은 짧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후회하나?”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이 못난 스승에게 처벌을 피하게 해 줄 방법이 없다고 해도?”

“애초에 그런 걸 기대한 적도 없습니다. 그저… 제가 옳다고 생각한 바를 선택했을 뿐입니다.”


해강현의 입가가 살짝 실룩였다. 제자의 대답이 꽤나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 자네는 그저 자네의 신념대로 행동했을 뿐이지.”

“선생님께서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누누이 강조했던 거였지.”

“처음 인도자로 발령을 받을 때도 한 번 더 물으셨죠. 굳게 믿어왔던 것과 상충하는 상황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신념을 택하는 쪽이 제게 손해가 된다고 해도 여전히 선택할 것인지.”

“흠… 그런 것까지 기억하는가? 사실 그건 별 의미 없이 던진 질문이었네만.”

“그러셨습니까?”


해강현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조곤조곤 이야기를 꺼냈다.


“그 질문을 던졌을 때, 신념을 행하겠다고 말하는 이는 많다네. 사실 거의 대부분이지.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게야.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순간의 대답이 아니라네. 막상 그런 상황을 현실로 맞게 되면 누구나 고민하고 망설이게 되거든.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 그저 말로 묻고 답하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지.”

“다른 동문들도 같은 질문을 들었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의미가 없다고 하신 것치고는 거의 공식처럼 반복하신 것 같은데요.”


해강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테지. 꽤 자주 그랬으니까. 모든 제자에게 그랬던 건 아니지만… 자네처럼 처음 실무 투입을 앞둔 제자들에게는 거의 대부분 물었다네. 보통 그렇게 인상 깊은 순간에 어떤 질문을 받으면 오래 기억하는 경향이 있거든. 살아가면서 실제로 그런 상황을 만났을 때, 내가 했던 질문을 되새길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정도라네.”

“저는 그것도 귀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고 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꿈보다 해몽이군 그래. 헐헐헐.”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는 식으로 이야기를 나눴지만, 사실 꺼내야 할 중요한 주제가 있다는 것은 해강현과 지홍 모두 알고 있었다. 무거운 주제를 던져야 하는 짐은 스승이 먼저 나서서 짊어졌다.


“… 자네가 이미 각오했다 말한 것처럼, 처벌 자체를 피할 방법은 없네. 민감한 부분에 관해 정해진 규정을 어겼고, 그 과정에서 상황을 무마하려던 직속상관에게 항명까지 한 셈이니까.”

“…….”

“하지만… 결과가 최악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참작이 될 여지도 있네.”

“… 네?”


의외의 말에 지홍이 반문했다.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저지른 과오가 작지 않다는 데서 이미 중징계를 각오했던 터다. 그런데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다.


“사실 이 건과 관련해서 태황께서 불천과 다른 의견을 내셨네. 규정을 어긴 건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욱 커다란 원칙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과정보다 결과에 주목할 수도 있다는 거지. 나 역시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태황의 뜻을 지지하는 쪽이고. ”

“하지만…….”

“아직 가타부타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자네가 너무 자포자기하고 있는 것 같아 말해주는 거라네. 자네도 마찬가지겠지만… 일반적으로 근원계에 알려진 불천의 이미지는 지독한 원칙주의자일 걸세. 그러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있었던 거겠지.”

“…….”

“하지만 내가 오래 알고 지낸 터라 아는데… 원래 그리 답답할 정도로 꽉 막힌 친구는 아니야. 앉아있는 그 자리가 그 친구를 그렇게 만든 것이지.”


해강현은 혀를 끌끌 찼다. 이건 지홍으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다. 제자였다고는 하지만 지식이나 연구와 관련된 사항 외에는 그다지 깊은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해강현 역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해주는 성격도 아니었고.


“이 늙은이는 운이 좋아 지난 평생을 연구에 바치며 지낼 수 있었다네. 덕분에 모든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많은 걸 알 수 있게 됐지.”

“선생님께서 아시는 게 ‘꽤 많은’ 것이라고요? 농담이시죠?”

“헐헐헐, 언젠가 자네도 깨닫게 될 거야. 지식이란 참 오묘하거든. 알면 알수록 새로운 눈이 열리고, 그만큼 더 많은 걸 알아야 한다는 걸 느끼게 되지. 아이러니하게도…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모르는 게 더 많다는 걸 알게 되고, 그게 반복될수록 끝없는 허무함과 싸우게 된다네.”

“…….”

“잠시 딴 길로 샜네만… 아무튼, 많은 것을 알게 되면 예측과 예상이라는 것도 제법 잘 들어맞게 된다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자네의 길이 여기서 끝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

“푸후후… 그건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지홍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떨구듯 숙였다. 결과에 따라 달라질 거라는 스승의 말은 분명 위안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워졌다. 차라리 이것저것 재지 않고 징벌이 확정된 상황이었다면 보다 빠르게 체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망이라는 것이 생기니… 그에 상응하는 절망도 함께 따라왔다.


“만약,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새로운… 기회라고요?”

“말했듯이 나는 자네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질 거라고 예상하네. 물론 어디까지나 예상이기에 빗나갈 수도 있는 거지만.”

“그 말씀이 더 잔혹하다는 거 아십니까?”

“헐헐헐, 그런가? 하지만 그 예상이 제법 잘 들어맞는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나? 확률이 제법 높다니까?”


심각한 주제이건만 유쾌하게 받는 스승의 모습이 묘하다. 정말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그저 실의에 빠진 제자를 위로하기 위해 애써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는 깊은 뜻일 수도 있겠지만.


“휴우…… 뭐,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규정’이라는 울타리 너머에 발을 디뎌보고 싶습니다.”

“호오…? 벌써부터 위험한 계획을 세우는 건가?”

“어차피 한 번 끝난 거나 다름없는 생 아닙니까. 지금 상황에 여한이 남은 일이라면 그게 가장 우선입니다.”

“그래, 그건 일리가 있군.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겠나?”


해강현은 진심으로 호기심을 보이며 되물었다. 덩달아 지홍도 대화에 몰입하고 있었다.


“글쎄요. 뭐라 정확하게 말씀드리는 게 쉽지 않습니다만…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흐음… 자네, 예전에 나와 통화할 때 나눴던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어느 정도는요.”

“그때 자네가 ‘두 세계의 중간에 걸쳐 있는 듯하다’는 표현을 썼었네.”

“아, 기억납니다.”

“난 그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네. 어쩌면 지금 자네가 답한 가능성이라는 말도 그 연장선이 아닐까 하는데.”

“딱히 그걸 의도한 건 아닙니다만, 말씀을 듣고 보니 결이 비슷하군요.”

“그거면 됐네. 여전히 큰 꿈을 품고 있음을 알았으니, 스승으로서는 아주 만족스러워. 그럼 이제 그만 가봐야겠군. 밖에 있는 친구들에게 금방 나오겠다고 했는데… 너무 오래 지체해 버렸구먼.”

“또… 뵐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선생님.”


해강현은 대답 없이 푸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지홍을 바라본 다음,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멈칫하더니 고개만 돌린 채 말했다.


“나는 변함없이 자네를 믿네. 그러니 오늘 내게 말하지 않은 어떤 만남에도…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하고 들춰내지는 않을 게야. 물론… 모든 것을 살피시는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내가 봤을 땐 그분께서도 그리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먼. 헐헐헐.”


흠칫한 표정의 지홍을 뒤로하고, 해강현은 유쾌하게 웃으며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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