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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생활 #1. 악역의 재구성

캐릭터 설정의 최근 동향, "'틀린' 게 아니야, '다를' 뿐이지."

by 이글로

Head 이미지 출처 :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악역(惡役)

1. 악인으로 분장하는 배역.

2. 나쁜 일을 맡아 하는 역할.

"우리 악역이 달라졌어요!" 그렇게 한 번 외쳐보고 싶다. 제대로 미친놈처럼 보일까봐 생각만 할 뿐이지만.


과거 내가 즐겨보던 스토리에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일관된 프레임이 있었다. 주인공은 한없이 선하고 정의로웠으며, 고난과 역경 끝에 행복을 맞이하곤 한다. 반대로, 악역은 누가 봐도 못돼먹은 성격이었고, 얄미운 행보 끝에 비참한 말로를 걷게 된다.


어린 시절 유행하던 '후X쉬맨'이나 'X이오맨' 같은 전대물이 그랬고, '다X'이나 '케X캅X' 같은 로봇만화도 그랬다. 드라마는 음... 지금도 좀 그런 경향이 보이긴 한다. 개별 작품마다 풀어내는 디테일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밑그림은 비스무레했다. 선은 선이고 악은 악. 흑백의 대비가 두드러졌다는 얘기다.


네이버웹툰 <하루3컷> 中


최근 동향은 좀 다르다. 언제나 '만인의 적' 역할에 충실했던 악당들이 나름의 사연과 논리로 무장하고 등장하는 경우가 꽤 많다. 초반부 악행을 일삼을 적에는 비난을 한 몸에 받다가도, 이후 '사실은 이런 사정이 있었네' 하는 전개가 등장하면 약간의 동정표를 얻기도 한다. 누구나 가슴 속에 하나 쯤은 떠오르는 캐릭터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때때로 악당들은 예의도 바르다. 깔끔한 옷차림은 기본이요, 욕설을 서슴지 않는 주인공을 상대할 때도 차분한 태도로 존댓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설정이 흔하게 쓰이다 보니, 요즘 정중한 태도의 악당들은 '숨겨둔 뭔가'가 있을 거라는 냄새를 물씬 풍기곤 한다.


네이버웹툰 <히어로메이커> 中


요는, 악역의 위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 주변의 누군가가 그들에게 공감을 표한다고 해도 대놓고 비난하기는 어려울 정도라고 할까. 사람마다 가치관과 신념은 다른 거니까. 구체적으로 비교하자면, 과거의 악역이 "저, 저, 천벌을 받아 마땅할 놈!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였다면, 요즘 악역은 "그래 뭐... 사정을 들어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 정도가 되겠다.


악역이 변화를 맞이하면서 주인공과 연결되는 구도 역시 달라졌다. 악역이 주인공과 대척점을 이뤄야만 이야기 전개가 가능해지니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과거의 악역들이 '틀린' 것이었다면, 요즘 악역들은 '다른' 생각을 표방한다. 목표를 추구하는 방법이 다르다거나, 같은 목표를 추구하지만 양립할 수 없는 관계로 설정되기도 한다. 가끔 주인공과 악역의 면면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오히려 악역이 더 바람직해보이는 부분이 보이기도 할 정도.



악역은 결말로 가는 과정에서는 대개 철저히 추락하곤 하지만, 충분한 당위성을 가진 경우 끝까지 살아남기도 한다. 작년 한 해 20% 가까이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정도전>에서 악역으로 묘사된 이방원(안재모 분)의 경우가 그 적절한 예다.


나름의 목표와 욕심, 그리고 신념을 가지고 있던 이방원은 자연스레 정도전과 대립의 길을 걷게 됐다. 고려의 마지막 수호신이라 추앙되곤 하는 정몽주(임호 분)를 척살했으며, 극의 주인공인 정도전을 '결단'냄으로써 드라마를 종결지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특히 정몽주의 죽음을 연출한 장면을 보면 이 드라마에서 이방원을 악역으로 그려내고자 한 제작의도가 엿보인다. 하긴, 그러고보면 많은 사람들이 역사책을 통해 이방원의 행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즉, 정도전의 연대기를 그린 작품에서 그가 악역으로 등장하는 건 어차피 정해진 수순이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이방원은 승리했다. 그리고 익히 알고 있는 역사실록에서처럼, 조선왕조의 태종으로서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숙적이었던 정도전은 무덤마저 갖지 못하고 버려졌으며, 조선 말기 무렵에야 업적과 지위를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 이제 질문을 던져본다. 이방원은 '악인'인가?아니면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에서 한정적으로 그려진 '악역'인가?

누군가에게 있어 그는 악인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겐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바라보는 이의 가치관에 따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생각의 여지'를 남길 수 있는 캐릭터가 오늘날 스토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악역의 묘사가 아닐까.


<정도전>에서의 이방원은 '악역'일 수밖에 없다.


수많은 스토리 속의 다양한 캐릭터. 그들 각각에는 작가의 '세계관'이 담긴다. 작가 개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가. 누군가를, 무언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에 대한 간접적인 표출을 맡게 되는 것이다. 이 작업이 반복되다보면 스스로 내적갈등을 겪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는 작가 개인의 힘으로 견뎌내기 쉽지 않은 일이다.


최근 스토리에서 종종 사용되는 코드이면서, 늘 뜨거운 감자로 귀결되는 주제가 있다.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을 감수해야한다는 시각'과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존중해야 한다는 시각'. 이들은 공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어느 것 하나 절대적인 답이라 하기도 어렵다. 이럴 때 대개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두 가지 사상을 각기 다른 캐릭터에 나눠 담는 것이다.


너무 정직한 성품의 캐릭터를 그려내다보면, 때때로 곤란해보이는 상황에 처했을 때 난감해지곤 한다. 그의 일관된 성격을 지키자면 전개가 뻔하거나 답답해질 수 있기 때문. 바로 이때 유혹이 찾아온다. '융통성'을 강조하며 편법 혹은 변칙을 택하라는 거부하기 힘든 속삭임. 게다가 그런 성격의 캐릭터를 이상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는 점에서 유혹은 더욱 강렬해진다.


보다 깊이가 있으면서도 팽팽한 대립이 존재하는 스토리를 빚어내고자 할수록 이 방법은 효과적이다. 그저 '착하게 살면 복이 와요'를 부르짖는 인생역전 감동 일변도의 스토리라면 모르겠지만, 현재에 산적한 문제들을 찌르고 미래를 내다보고자 하는 거시적 스케일의 작품이라면 서로 다른 캐릭터들을 통해 이를 표출할 수 있다.


이 내용이 공감된다면, 당신 가슴 속에도 악당 하나쯤은 있게 되는 거다.


누구에게든 어떤 일에든, 갈등의 순간은 찾아온다. 말로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면 버텨낼 수 있다'고 쉽게쉽게 조언하지만, 그 과정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몰라서든, 일부러든.


스토리를 쓰는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캐릭터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전하고자 하지만, 매번 100%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애초에 이놈의 세상이란 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도록 디자인돼 있지 않던가.


이런 성격으로 하자면 저런 결함이 있고, 저런 성격으로 하자면 이런 단점이 있다. 그건 아마도,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일지도 모른다. 스토리 속 캐릭터도 결국은 그 '불완전한' 인간이 상상해낸 창조물이니까.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절대적인 신념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만, '완벽한 사람'이란 어디까지나 비현실의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완벽한 캐릭터' 역시 비현실적인 개념이 아닐까.


한 가지 상상을 해본다. 만약 매번 가장 이상적으로 행동하고 매번 최상의 결과를 얻는 캐릭터가 있다면 어떨까? 처음에는 현실에 지친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며 활력을 불어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매력을 잃거나 금방 지루해질 거라는데 베팅하고 싶다. 혹은 '재수없게' 느껴져 외면당하거나. 결과가 뻔히 예상되는 패턴이 형성되는 그 순간, 그 캐릭터는 더 이상 이야기의 주역으로서 생명력을 가질 수 없게 될 테니까.


여러 의미로 봤을 때, 과거의 악역들은 이제 '악역'이라는 명칭을 부여받던 시절의 기대치를 벗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다만 '악역'이라는 이름만큼 쏙쏙 와닿는 적절한 표현을 찾기가 쉽지 않기에, 아직은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그들이 주인공의 한계를 비판하고 보다 다채로운 세계관을 투영하는 사명을 짊어지길 바란다.


오늘의 이 짧은 생각에, '악역의 재구성'이라는 나름 거창한 타이틀을 붙여본다. 본디 제목은 직관적이거나 구체적으로 짓는 편이 좋다고 배웠지만... 오늘은 그냥 그러고 싶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3>의 주인공 코너 켄웨이(라둔하게둔). 너무 '올곧은' 캐릭터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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