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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자 시즌? 흑심이 보이는 것 같아...

'코리아 블랙 프라이데이'가 영 불편한 이유

by 이글로

코리아 블랙 프라이데이가 한창이다. 혹여 지름신이 강림하실까 두려워 애써 관심을 끊고 있는 관계로, 다음주 수요일인 14일까지 하는 걸로 대략적인 개요만 알고 있는 정도다. 국내 최초, 최대 규모로 시행하는 할인 이벤트. 타이틀은 거창하다. 하지만 왜 이 모습이 못내 삐딱하게 보이는 걸까.


본래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는 미국에서 11월 마지막 목요일,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다음날을 가리킨다. 추수감사절은 1621년 영국을 떠난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도착했을 즈음부터 시작된 전통 있는 공휴일로, 그 다음날인 금요일이 휴일이 되면 목-금-토-일의 연휴 기간이 완성된다. 본래 블랙 프라이데이는 공식 지정된 휴일은 아니지만, 꽤 많은 수의 직장이 이 날까지 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실제로 블랙 프라이데이 주간은 미국 연간 소비의 약 20% 가량이 집중된 희대의 쇼핑 시즌이다. 매출 장부가 흑자(黑字)로 돌아선다는 뜻에서 '블랙'이라는 말이 붙었다지, 아마......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는 유통업체들의 '연말 재고 땡처리'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마트에서 폐점시간이 가까워왔을 때 신선식품 재고를 저렴하게 판매하듯, 연말 재고로 남아있는 물건들을 평소보다 좀 더 싸게 처분하는 것이다.


유통업체 입장에서는 괜스레 창고에 처박아두느니 조금이라도 품질이 좋을 때 싸게라도 파는 편이 이득일 수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당장 급하게 필요한 게 아니라면 이 시기에 저렴하게 살 수 있다.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 윈윈(win-win)이 되는 셈. 실제 블랙 프라이데이 시즌에 물건을 구입해본 적은 없지만, 슬쩍 가격만 둘러봐도 할인율은 상당하다. '혹시 뭔가 하자가 있어서 싸게 파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랄까.


shoppingcover.jpg 잇힝~ 달려라! 이 시즌 외신 일간지를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


블랙 프라이데이가 가져오는 매출 증대. 내수진작, 그리고 경제성장. 이것이 무척 아름다운 광경이라 생각했나보다. 그러니 정부가 '코리아 블랙 프라이데이'를 추진했겠지. 뭐, 딱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근현대사 부분만 얼핏 살펴봐도 우리나라는 '국가 차원에서 실시하는' 뭔가를 참 좋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딱히 좋게 보이진 않는다.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는 경제성장 같은 거창한 목적을 띠고 시작한 것이 아니다. 연말, 추수감사절, 징검다리 금요일 같은 키워드를 토대로 만들어진 일종의 '자발적 문화현상'에 가깝다. 여기에 누군가의 의도가 있었다면, "이 시즌에 물건을 싸게 내놓으면 잘 팔릴 거야"라는 유통업체 사장님들 담합이나 있었을 거다.


본래 '문화'라는 건 몇 마디로 콕 찍어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미묘한 개념.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자율성'만큼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관계나 특정한 목표의식보다, 자연스러운 필요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 당사자들에게 가장 안성맞춤인 하나의 '문화'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정부에 의해 기획되고 주도된 느낌이 강한 코리아 블랙 프라이데이는 문화로서 자격미달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려는 생각인 거 같은데...... 이후에 어떻게 바뀌어나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은 영 별로다. 기획이라는 게 필요한 영역이 따로 있지, 경기가 안 좋으니 돈 쓰라고 부추기는 행사를 기획하다니 정말 정신이 제자리에 박혀있는 게 맞는 건가.


mug_obj_144371150001540150.jpg 코리아 블랙 프라이데이에 관해 이런 짤방도 돌아다닌다. (출처 : 네이버 포스트)


누군가 지휘봉을 잡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분명 효율적이다. 하지만 인간적이라거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측면에서는 비루하기 그지 없다. 계획되고 통제된 환경에서 제도와 시스템이 갖춰질 수는 있지만, 문화가 탄생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정부가 이번 행사를 얼마나 원대하게, 어디까지 내다보고 기획한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시장에 맡겨둬야 할 문제는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라는 것, 그리고 정부는 그 자신이 해야할 역할이나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것. 높으신 분들 이해 못할 것 같아 친절하게 좀 더 부연해드리자면...... 돈 안 쓴다고 사람들 주머니 털 궁리하지 말고, 왜 돈을 안 쓰는지 그 진짜 이유를 살펴보라는 뜻이다.



사실 이건, 코리아 블랙 프라이데이 주간이 시작하던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며칠을 망설이다가 이제야 대충이나마 끄적인다. 이번 기회에 만족스러운 쇼핑을 하고 있는 사람도 많을텐데, 구태여 그 만족감에 흠집을 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의 뉴스로 보니 실제 매출이 오르기는 한 모양. 물론 그렇다고 정부의 의도가 적중했다고 보기엔 이르다. 정말 필요해서 점 찍어뒀던 물건이 마침 싸게 나와서 샀을 수도 있으니까. '허울만 좋다'는 식의 뉴스도 종종 보이는 걸로 봐서는 코리아 블랙 프라이데이를 나처럼 고깝게 보는 시선도 꽤 있는 듯하다.


본래 쓰려던 의도와 많이 어긋난 것 같아 못내 망설여지지만, 과감하게 발행 버튼을 누른다. 나중에 살펴보면서 첨삭하고 고치면 되겠지 뭐...... (이래놓고 안 할 가능성 70%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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