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러다가 '신성모독금지법'도 생길 기세
저녁 무렵, 컴퓨터 앞에 앉은 채로 등 뒤로 들리는 뉴스를 듣고 있었다. 그때 들려온 당황스러운 이야기.
현행 교과서들이 좌파적 세계관으로 써졌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모든 문제를 사회 탓으로 돌린다.
현재 중고등학교 교과서는 우리 역사를 부정하는
반(反) 대한민국 사관으로 써져 있다.
다소 민감한 이야기를 해야하니 일단 솔직히 고백하고 시작하겠다. 인용한 두 멘트를 토씨 하나까지 그대로 받아적은 건 아니다. 다만, '좌파적 세계관', '모든 문제를 사회 탓으로 돌린다', '반 대한민국 사관'이라는 표현은 분명하다. '올바른 국가관 형성과 국민 통합을 위해'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필요하다는 논리.
일단 질문을 좀 하고 싶다. 역사에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틀린' 걸까? "그 부분은 국가의 책임입니다"라고 말하면 '반(反) 국가적인' 사람일까? 그저 과거를 모두 업적이라 칭송하고 박수를 보내야만 비로소 '올바른 국가관'을 가졌다 할 수 있는 걸까?
여당이 내세우는 '국정화 교과서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근거부터가 석연치 않다. 여당 대표가 이야기했다는 위의 발언들이 영 고깝게 들려서, 그 내용을 가지고 자의적 해석을 좀 해봤다.
'좌파적 세계관'으로 써졌다는 말은 "우리가 보기에 불편하다"는 뜻. '젊은 사람들이 모든 문제를 사회 탓으로 돌린다'는 말은 "그건 사회가 아닌 니들 개개인의 책임"이라는 뜻. '현행 교과서들이 반(反) 대한민국 사관으로 써졌다'는 말은 "우리네 역사에는 오점이 없다"는 뜻. 좀 삐딱하게 적긴 했지만, 그간 여당 대표가 보여왔던 몇몇 행보(신림동 고시촌이라든지, 쇠파이프와 국민소득이라든지......)를 생각하면 완전히 억지스러운 해석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현재 검인정 교과서는 편향된 소수 집필진의
회전문식 집필로 유명무실해 졌다.
기존 검인정 제도에서는 출판사가 자체적으로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육부의 인가를 받아 시중에 내놓는다. 이렇게 내놓은 교과서를 각 학교들이 채택하는 방식이다. 이에 비해 국정화 제도는 교육부가 직접 집필에 관여하고 저작권을 갖는 방식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기존 검인정 교과서 역시 교육부의 인가를 받아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현재 검인정 교과서가 편향된 시각과 회전문식으로 집필됐다니? 그동안 교육부는 교과서를 검토할 때 집필진이 누군지, 중복되지는 않는지, 어떤 부분이 어떤 내용으로 써졌는지 제대로 확인을 안 했다는 말인가? 음... 아니면 내가 말을 잘못 이해한 건가?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
객관적 사실 그대로의 역사는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옳은 방법은 아닌 듯하다. 국정화 교과서가 있으면 정말 객관적인 역사 교육이 가능해질까? 오히려 집필 주체가 하나로 통일됐으니 '누군가'의 입맛에 맞춰질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문제가 될 만한 사실은 지우거나 줄이거나 포장할 것이고, 잘했다 싶은 부분을 크게 부풀려 서술하고. 너무 뻔할 뻔 자여서 다른 숨겨진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알고,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건 개인이 누려야 마땅한 '지적 권리'다. 역사라는 것은, 해석을 붙이려 할수록 객관성이 퇴색하게 마련이다. 조선왕조실록처럼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기술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다.
만약 조선왕조실록을 왕들이 직접 적었다면 어떨까? 그랬어도 오늘날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었을까? 국가가 나서서 역사 교과서를 만든다면 과연 그것을 가리켜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자료'라 말할 수 있을까? 왕의 입맛대로 적은 실록이라니, 아마 '조선왕조일기'라는 이름이 어울릴 것이다. 하물며 국가가 직접 쓴 교과서라니......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진짜 속내가 뭔지, 나는 도무지 확신할 수 없다. 위 발언들을 토대로 대강 추측해볼 수는 있겠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두려워하는 것. 설마 하니 만약 그게 전부라면, 나도 해줄 말이 있다. "세상천지에 '욕 하나 먹지 않는 완전무결한 역사' 같은 게 대체 어디 있느냐"고.
역사를 해석하고 잘잘못을 판단하는 건, 전적으로 역사를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의 몫이다. 설령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게 써진 책이 있으면 어떠한가. 누군가는 믿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의심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부정할 것이다. 같은 내용을 놓고도 누군가는 박수를 치는가 하면 누군가는 욕설을 뱉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던가.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제목의 게임이 있다. 민주주의의 지도자로서 최선의 정책을 펼쳐 나간다는, 얼핏 보기엔 무척 단조로워 보이는 게임이다. 실제로 화면도 매우 단순하다. 하지만 막상 해보면 정말 골치 아프다. 사회를 이루는 수많은 계층과 집단. 하나의 정책에 따라다니는 무수한 이해관계. '모든 국민을 만족시키는 정책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즈음이면 자신의 혈압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도 언젠가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역사'가 될 것이다. 현실의 정치가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처럼, 시간이 흘러 지금 이 시간이 역사가 된 후에도 모든 이에게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는 법이다. 사극이나 대하드라마에서 이야기하듯, 모든 것은 역사가 판단할 일이다. 현재의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는 거다.
열심히 목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정부와 여당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는 만큼 결과는 아직 불투명하다. 만약 이 제도가 통과된다면 정말 머지 않아 '신성모독금지법'도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부디 이 나라의 이름이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인 이유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