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이 흐려진 우리네 품앗이
저녁식사 도중 아버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 사람이 무슨 일이지?" 하시며 거실로 나가 통화를 하셨다. 잠시 후 들어오시더니 혀를 끌끌 차신다.
이유는 이렇다. 동창회 모임 멤버 중 한 명이 최근 자녀 결혼식을 치렀는데, 아직 동창회 쪽에서 지원금을 못받았다며 총무에게 전화를 했더라는 거다. 총무는 알아보겠다고 한 뒤 곧장 재무담당인 아버지께 연락해 확인을 부탁한 것이다.
주위의 모임들이 흔히 그렇듯, 아버지의 동창회 모임에서도 멤버들의 경조사비를 지원한다. 하지만 언제나,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는 불성실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회비는 몇 번 내지도 않고 딱히 이유도 없이 모임에 종종 빠지면서, 받을 혜택은 꼬박꼬박 챙겨가는 사람.
아버지의 동창회에서는 이런 일을 줄이고자 모임 규정을 정했다. 경조사비 지원은 최소 1번 연회비를 내고 3번 이상 모임에 나와 참가비를 내는 멤버에게만 준다는 것.
총무에게 전화를 했던 그 멤버는 연회비 1회는 충족했지만 모임은 1회 밖에 나오지 않은 상황. 그것도 내내 불참하다가 올해 들어서 한 번 참석. 즉, 경조사비 지원을 노리고 슬쩍 발만 걸치려는 의도가 보인다는 것이 아버지의 설명이다. 타인의 입장을 함부로 장담할 수는 없는 법이지만, 듣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래보였다.
모임 뿐만이 아니다. 요즘 아버지는 부쩍 청첩장을 자주 받으신다. 형과 내가 흔히 '결혼적령기'라 부르는 나이대니,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둔 주위 친구나 지인들이 청첩장을 보내오는 것이다. 그런데 씁쓸한 건, 청첩장에 은행 계좌번호가 떡하니 적혀 있더라는 거다. 그것도 두 번 중 한 번 꼴로 무척 빈번하게.
이것을 뭐라 받아들여야할까. 아버지는 "식대 들어가니 결혼식 오지 말고 축의금만 보내라는 뜻"이라고 다소 공격적으로 해석하신다. 나는 좀 완곡하게 생각해봤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지 못하게 되면 이 계좌번호로 입금해달라"...... 음, 그래도 씁쓸하긴 매한가지다.
설령 계좌번호가 오갈 일이 있다면, 주는 쪽에서 "일이 있어 못 가게 돼 미안하다. 계좌번호 주면 축의금이라도 부쳐줄게."라고 먼저 요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 이전에 다른 지인을 통해 전하는 방법도 있고.
요즘 문자메시지로, 카카오톡으로 청첩장을 주고 받는 사례는 흔하다. 하지만 아무리 변했더라도, '사람' 사는 세상이란 것은 변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기술발달에 따른 삶의 변화는 인간의 의식과 사고방식을 언제라도 바꿔놓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일만큼은 늘 성실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오랜만에 뜬금없이 연락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수많은 인연을 일일이 꼼꼼하게 챙기는 게 무척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으니까. 다만, 휴대폰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연락이, '모바일 청첩장' 대신 "청첩장 줄게 만나서 차라도 한 잔 하자"는 내용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경조사에 찾아가 인사를 전하고 부조금을 내는 것은 과거 우리네 품앗이 전통과 맥이 닿아있다. 서로 도우며 살자는 훈훈한 마음으로 이어져왔을 현대판 품앗이라고, 돈이 아닌 인사 한 마디가 절대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그 순서가 뒤바뀐 경우가 자주 보이는 것 같아 아쉽다. 자본주의 사회에 너무 치열하게 적응해버린 탓이려나...... 휴우.
나 하나라도 그러지 말아야지, 사람을 대하는 일만큼은 늘 성의를 다 해야지, 라고 또 한 번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