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는 것'보다 '알아갈 수 있는 것'에 더 눈길을 줄 수 있기를.
최근에 VOD로 봤던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에서 김태원을 봤다. 어쩌다보니 '국민할매'라는 코믹한 캐릭터를 얻긴 했지만, 그의 본분이 무엇인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가장 먼저 부활이라는 그룹을 이끌어온 장본인, 국내 3대 기타리스트, 그리고 가수 또는 작곡가.
어…… 요즘은 작곡가라는 수식어에 관해 평가가 엇갈리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가 '좋은 곡을 많이 썼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는 않으련다.
당시 방송에서 김태원에 대해 이런 말이 나왔다.
이 분은 다른 뮤지션들의 노래를 잘 듣지 않는다.
타인의 색깔에 영향을 받을까봐서다.
방송에서 김태원 본인은 "이제는 좀 영향을 받고 싶다. 요즘 곡이 잘 안 써져서……"라고 재치있게 받았다. 농담처럼 이야기하긴 했지만, 일각에서 들려오는 '자기복제형 작곡'이라는 비판을 스스로 의식한 멘트가 아닐까 싶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매번 비슷비슷한 결과물만 내놓는다는 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김태원 정도 커리어를 쌓아온 사람이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간 떠오른 것은, 쉴 새 없이 팔랑거리는 내 얇은 귀에 대한 자각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난 글쟁이요~"라며 내세우고 다니지만, 사실 스스로 제대로 된 창작을 해본 적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누군가의 작품을 보고 알게된 내용을 어떻게든 써먹고 싶어 발버둥친 기억이…… 확실히 더 많다. 부끄럽게도.
장담하건대, 나는 책이나 잡지, 그 외의 텍스트들을 꽤 많이 보는 편이다. 인터넷에 둥둥 떠다니는 편향적이고 짤막한 것들부터 거대한 축을 타고 흘러가는 대서사시까지, 최소한 국민 평균 혹은 그보다 조금 이상은 될 거라고 스스로 굳게 믿고 있다.
충분한 여유가 있음에도 그보다 더 많은 텍스트를 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것들을 보다 보면, 한없이 우울해질 때가 있기 때문. 그건 대부분 특정 분야에 대한 누군가의 해박한 지식이나 통찰력을 발견했을 때다.
멋진 논리에 탄복하게 되고, 본능처럼 인상 깊은 문구를 옮겨 적기 위해 만년필을 찾는다. 감탄과 깨달음을 얻었다는 기쁨은, 딱 펜 촉이 종이 위에서 떨어질 때까지. 그 뒤로는 잠시 깊은 감상에 젖곤 한다.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세상만사 모든 것에 통달한다는 건 한없이 어려운 일임을 안다. 누군가 어떤 분야에 박식하다면 다른 어떤 분야에서는 부진할 수도 있음을 안다. 하지만 텍스트를 읽는 그 순간, 그 안에서 배어나오는 지식과 시야의 폭을 발견할 때면 미칠 듯이 부러워진다. 그건 '앎'이 아닌 '느낌'의 영역, 어떤 멋들어진 말로도 위로될 수 없는 내 솔직한 심정이다.
나는 어떤 것에 몰입해왔나. 어떤 걸 가지고 '남들보다 잘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누군가와 경쟁하는 것보다 공존하는 쪽에 끌리면서도, '그래도 경쟁해야만 한다'는 지독한 프레임을 벗어던지지 못해 항상 고뇌하고 힘겨워한다.
'최고'라는 표현을 얻기 위해 꼭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즐겨보는 음악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최고의 보컬리스트', '최고의 래퍼' 같은 수식어를 수도 없이 듣고 살지 않던가. '최고(最高)'라는 수식어는 '가장 높음', '유일무이(有一無二)'를 가리킨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실제로 우리는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는 걸, 난 분명 알고 있다. 적어도 머리로는.
자신의 길을 정해 우직하게 걸어온 사람이라면 누구든 '최고'라는 수식어를 받을 자격이 있다. 어차피 다같이 더불어 사는 세상인데, 꼭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의 왕좌에 올라야만 가치 있는 삶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부디, 그 마음가짐을 말 뿐만이 아닌
실천으로 옮길 수 있기를.
부디, '알고 있는 것'보다
'알아갈 수 있는 것'에 더 눈길을 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