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증같은 삶에 열이 날 때
"스물세 살이오―삼월이오―각혈이다."
그저께 밤까지 이어지는 스터디에서 결핵을 다시 공부했다. 학부 때 호흡기계 파트를 강의해주시던 교수님의 강의력이 출중했기도 하고, 의외로 폐 공부가 재미있어서 나름 충분하게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다시 강의를 들으며 짚어보니 처음 보는 듯한 내용이었다. 결핵이 사실 내 현장에서는 보기 어렵다 보니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멀어졌었다.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지 않나. 많은 지식들이 다시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PPD, 이그라, 4제요법... 얘네들도 사실 자연스레 멀어지겠지, 내가 쓰는 건 아니니까!) 정작 강의 중에서 노트에 끄적이게 된 소재는 홍조다.
사흘이나 눈이 오고 또 사흘이나 눈보라가 치고 다시 며칠 흐리었다가 눈이 오고 그리고 날이 들고 따뜻해졌다. 처마 끝에서 눈 녹은 물이 비 오듯 하는 날 오후인데 가엾은 아가씨가 나타났다. 더 창백해진 얼굴에는 상장(喪章) 같은 마스크를 입에 대었고 방에 들어와서는 눈꺼풀이 무거운 듯 자주 눈을 감았다 뜨면서,
“그간 두어 번이나 몹시 각혈을 했어요.”
이태준 『가마귀』의 아가씨는 등장부터 '발그레해진 얼굴'로 등장한다. 죽음을 앞둔 가녀린 몸에 발그레한 미모의 아가씨를 그려가다 보면 비운의 여주인공이 탄생한다. 알고 보니 결핵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학뿐 아니라 미술에서도 아름다운 질병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더라. 천재 이상도 젊은 나이에 결핵에 걸려 비운의 천재와 같은 이미지가 있지 않나.
홍조, 관홍, 그리고 조열
발그레해진 얼굴은 우리 쪽에서는 관홍(顴紅)이다. 광대뼈 관(顴)에 붉을 홍(紅)을 합하여 생겨난 한자어다. 뺨에 나타나는 붉은 기를 말하는 거다. 풀어서 말하자면 말초혈관 확장으로 인해 혈류가 뺨 주위를 많이 돌면서 붉은 기운을 나타내는 것일 테고. 말초혈관이 확장되는 이유는 많이 있겠지만, 결핵에서 직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발열이다.
관홍은 한의학 교재와 문헌들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단어다. 특히, 국시에서는 더 쉽게 마주쳤던 듯하다. 왜냐면... 문제 중에 관홍 증상이 있다면 백에 아흔아홉은 정답이 음허(陰虛)*로 귀결된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세트로 따라 나오는 말 중에 조열(潮熱)**이라는 말도 있다. 더 가보면 도둑땀이라고 불리는 도한(盜汗)***까지. 한의사라면 다 공감할 거다. 물론 진료 현장에서 저렇게 일차원적으로 진단해선 안된다. 약간 이야기가 샜다. 다시 돌아가서.
*음허(陰虛) : 한의학에서 사용되는 병리이자 진단으로, 허증(虛證) 중의 하나.
**조열(潮熱) : 오후나 저녁무렵에 나타나는 열
***도한(盜汗) : 수면 중에 나오는 식은 땀. night sweat.
흥미로운 건 관홍, 조열과 같은 fever-related symptom들이 음허를 기반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럴싸한 관찰이다. 빼빼 말라서 허약해 보이는 사람이 양쪽 볼이 빨갛게 물들어서는 기침을 폭풍같이 해대다가 피가 묻은 흰 손수건을 훔치는 장면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진다. 허하기 때문에 열이 난다. 이러한 섬세한 관찰을 기반으로 문헌들에 기록되는구나...하고 한번 곱씹어본다. (오늘날의 결핵환자는 이미지나 예후면에서 물론 다르다ㅎㅎ) 실제로 결핵은 면역기능이 취약해져 있을 때 발병하는 것으로, 가난한 나라에서의 기아 상태, 홈리스들, HIV 감염 등의 컨디션에서 흔한 걸로 알려져 있다. 어느 정도 대충은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열병에서 채움으로
여하간에. '부족해서 열이 난다'라는 말 자체가 좀 재미있다. 학술적으로도 재밌긴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건 아니라 각설하고... 저 말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보면, '열병을 앓는다'는 표현에서도 무언가 비슷한 포인트가 느껴진다. 보통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으나 얻지 못하였을 때 우리는 열병을 앓는다. 그게 사랑이든 꿈이든. 이루고 싶지만 이루어지지 못할 때, 가슴이 아프고 몸은 달구어지기 시작해서 시름시름 앓게 된다.
그것도 일종의 염증일 것이다. 삶의 염증. 삶을 지켜내기 위해 발열이 동반된 reaction이 일어나는 것. 그 과정이 과해서 우리 삶을 병들게 하기 전에, 적정한 수준으로 조절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열병을 잘 이겨낸 사람들은 그만큼 견고해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이기는 방법을 열을 꺼버리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에서 찾은 옛사람들의 기록이 묘하게 울림을 준다.
세상에 염증(厭症)이 날 때, 내 삶이 만성 염증(炎症)을 겪고 있을 때, 삶을 회복하는 방법은 채울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닐까 싶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온전한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주변 사람과의 시시콜콜한 대화에서 오는 미온의 정겨움일 수도 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면역세포들이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채움의 기술들을 잘 단련해서 평소에도 우리 삶을 꽉 채우고 있어야 한다. 속이 꽉 찬 배추마냥 풍성하고 신선할수록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채워져 있어야 앓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