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면을 위해서라면 어둠의 자식이 되겠습니다
반-짝. 반-짝.
올여름쯤의 일이다. 새벽 다섯 시만 되어도 세상이 밝아오는 계절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해가 뜨는 것과 동시에 어김없이 내 눈도 뜨기 시작했다. 눈은 태양처럼 매일같이 부지런히 떠야 한다는 점은 같지만, 그 시간이 꼭 태양과 동기화될 필요는 없었다. 내 눈이 감기고 뜨는 건 오로지 출근이라는 녀석에 맞추어야 한다는 쪽이 더 맞는 말이다.
아무래도 눈부신 햇빛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암막커튼을 준비하려 했으나, 비용과 귀찮음을 생각해서 간편하다는 검은색 에어캡(...?)을 대신 준비했다. 쉽게 말해서 암막뽁뽁이라 불린다. 효과는 생각보다 굉장했다. 빛을 차폐한다는 측면에서는 암막커튼에 버금가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애석하게도 암막뽁뽁이가 유리창에 직접 부착되는 형태라 커튼처럼 수시로 걷을 수가 없다. 그걸 포기하고 채광과 환기는 창문을 열어서 해결하기로 했다.
유리창이 밤하늘처럼 에어캡으로 도배된 그날. 해가 산등성이를 넘어간 후에 방안의 불을 모조리 꺼보았다. 캄캄했다. 만족스러운 어둠이 아닐 수가 없다. 그날 밤은 잘 잘 수 있을 거라, 새벽 다섯 시에 눈이 떠지지 않아도 된다는 부푼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눈을 감았을 때 느껴야 할 칠흑이 조금은 달랐다. 뭐지?
그제서야 현관문 위의 비상등 표시가 너무 환하게 느껴졌다. 문위에 붙어있는 초록색 불빛에 탈출하는 사람 모양이 일렁거렸다. EXIT라고 적힌 표시등은 생각보다 환했다. 저 불빛을 끄면 숙면의 길이 보일 것만 같았다. 표시등을 분리한 뒤 안쪽의 램프를 끄려고 이것저것 만져보았지만 도무지 꺼질 기미가 안보였다. 뭐라도 램프를 가려서 빛을 안 나오게 할까, 라는 시도를 하려는 찰나 배전반이 눈에 들어왔다. 그 두꺼비집에는 여러 스위치들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유도등'이라는 손글씨가 적혀있는 스위치가 있었다. 친절하기도 하지.
스위치를 내리고 나니 한결 더 고요해졌다. 고요한 어둠. 숙면을 위해서라면 어둠의 자식이라도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피식했다. 빛 한틈 들어오지 않는 방 안이 마련되어 이제는 눈을 감으면 칠흑의 세상이 펼쳐질 거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다시 오산이었다. 감긴 눈에 펼쳐진 어둠은 시계 초침처럼 규칙적으로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신경이 쓰인다라는 표현이 적합했다. 풀벌레 한 마리 울지 않는 밤에 평안히 눈을 감고 있어도, 온 신경은 초침처럼 반복되는 빛에 몰렸다. 이건 또 뭐지.
반-짝. 반-짝.
눈을 떠보니 하얀 햇빛도 아니고, 초록색의 비상구 불빛도 아니다. 푸르딩딩한 빛이 한 점에서부터 퍼져서 방 전체가 깜빡, 깜빡이고 있는 게 보였다. 인터넷 공유기였다. 컴퓨터와 TV와 연결되어 책상에 얹힌 공유기는 자그마한 로봇처럼 생겨서는 쉴 새 없이 푸른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주 규칙적으로.
이쯤 되니 내가 이런 적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가끔 불면이 있긴 했어도 잠들 때 불빛을 인식한 적은 없었다. 이런 게 심하면 신경쇠약이 되는 건가. 난데없이 느껴버린 예민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침대에서 다시 일어나 책상 앞에 있는 소설책 한 권으로 못된 로봇의 불빛을 가로막았다. 그제서야 정말로 어둠이 찾아왔다. 김연수 작가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빛과 수면은 아주 찐한 사이일 거다. 빛과 수면의 관계는 건 지구에 터를 마련한 모든 생명체들이 느낄 수 있는 우주의 원리급(級)이지 않을까. 음, 생각해보니 야행성인 생명체들은 모를 수도 있겠다.(^^;) 적어도 낮에 활동하는 호모 사피엔스는 빛이 없는 밤에 잠을 잤다.
불면증 환자에게 강조되는 수면 위생(sleep hygiene)이라는 개념이 있다. 낮엔 활동하고, 밤엔 잘 자는 패턴을 만들어주기 위한 습관과 환경을 일컫는다. 수면 위생에는 일주기리듬(Circadian rhythm)을 지키기 위해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중 아침 기상 후 햇빛을 어느 정도 쐬주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밤에 잠들기 전 일정 시간 동안은 밝은 빛에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항목이 있다. 빛의 노출을 일주기리듬에 따라 조절해주지 못하면 잠에 들기도 어렵고, 들어서도 얕은 잠을 자게 된다.
옛날 말을 하나 가져와보자면, 낮동안에는 우리 몸의 기운이 몸의 바깥에서 운행하면서 몸이 깨어서 활동하게 되고, 밤이면 기운이 몸 안의 장부에서 운행하게 되면서 보거나 듣는 등의 지각을 하지 못하고 잠이 든다는 말*이 있다. 낮과 밤이 올 때 우리 몸의 생리가 바뀐다는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이면 상식적이다. 그런 몸의 생리가 이미 옛날부터 인식되어 왔다는 거다. 그리고 오늘날, 멜라토닌과 빛의 관계로 보는 일주기리듬은 그 생리에 대해 더 구체적인 설명을 가져다준다.
*동의보감 內景篇卷之二 夢에서 참조. 동의보감에서 레퍼런스를 『영추(靈樞)』로 달고 있는데, 영추가 기원전에 쓰인 책이란 걸 생각해보면 어마무시한 옛날부터 나온 말이다.
심지어 『활인심(活人心)』에는 사람들이 잠에 못 들 것을 우려해서 구체적으로 이런 말까지 있다.
睡留燈燭令人神不安.
수유등촉령인신불안.
별 소린 아니고. 잠잘 때 등불을 켜 두면 정신이 불안하다라는 소리다. 그 앞 구절에는 침대에 누워있을 땐 말하지 말라는 소리도 있다. 이것도 수면 위생의 한 종류일 거다. 잠자리에서는 딴짓하지 말라는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도 있고 이미 수면 위생이라는 개념으로 의학적으로 권고되고 있는 포인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밤의 빛에 시달리면서 산다. 요 몇 년 사이에는 시공간 제약 없이 언제든 재생시킬 수 있는 컨텐츠들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늦은 시각까지 보게 되는 SNS와 유튜브, 각종 OTT들. 이게 오늘날에서는 옛날의 등불 같은 존재들일 거다. 숙면을 원하시는 분들은 오늘날의 등불을 꺼두시는 편이 좋겠다.
사족을 붙이자면. 그래서 정말로 어둠이 찾아온 뒤로는 잠을 잘 이루었나? 그건 또 아니다. 새벽에 깨는 일이 조금 덜 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 후로도 종종 깨기도 하고 꿈도 자주 꾼다. 05시에 찾아오는 햇빛, 초록색의 비상등, 못된 로봇의 푸른 불빛만이 전부가 아니었던 걸로. 불빛이 나를 신경 쓰이게 하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면, 비단 물리적인 빛만이 내 숙면을 방해한 건 아닐 터이다. 방은 어두워졌지만 나는 충분히 어두워지지 못했나 보다. 애꿎은 불빛들을 피로하게 느끼는 건 불안한 우리 자신이다. 정신적인 긴장을 풀지 못하게 하는 내면의 불빛들을 들여다볼 차례다. 글로 엮자니 아직은 어렵다. 고민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