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라는 드라마를 봤다.
주인공은 제목처럼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이다.
이 사람은 어린 시절 반장선거에 출마했는데, 개표가 진행될수록 상대방보다 표를 덜 받은 부분에 자책하며 의기소침해했다. 출마한 사람이 둘이라서 반장이 못 되더라도 최소 부반장은 확정이니 완전히 불리한 상황은 아닐 텐데, 맘 속 깊이 내재한 비교심리가 발동하여 자신이 남보다 표를 덜 받았다는 사실이 당당히 고개를 들고 서 있지 못할 만큼 그를 주눅 들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부반장이 되었어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부반장 임명장을 들고 집에 가니, 빳빳한 교복을 입은 형이 바나나를 먹고 있었다. (당시 바나나는 매우 귀한 음식이었다.)
주인공이 부반장 되었다고 이야기하자, 바나나를 먹던 형은
"야, 너는 고작 부반장 된 걸로 그러는 거냐?"
하며 어깨뽕이 잔뜩 들어간 자세로 상체를 펴서 교복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아마도 형이 입은 교복은 일류 학교 교복인 것 같았다. 일류 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 대가로 부모님께 '바나나'라는 귀한 과일로 상징되는 박수갈채와 칭찬을 획득한 것 같았다. 형은 자신이 힘들게 노력하여 얻은 바나나를 동생에게 거저 나눠줄 의사가 전혀 없다는 듯, 반쯤 먹다 남은 바나나를 껍질로 덮으며 동생을 고압적인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너보다 공부도 잘하고 일류 학교에 입학했는데 너는 고작 부반장 타이틀로 유세하려는 거니?'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느껴졌다.
형의 당당한 교복을 본 주인공은 부반장 임명장을 뒤로 감추며 슬며시 구겨버렸다.
그는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비교의식이 만연한 세상, 웬만큼 잘하지 않고서는 박수받을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온 것 같았다. 그래서 비교의식은 어느새 열등감으로 탈바꿈하여 그의 마음속에서 똬리를 틀었고, 그는 자신이 평가받고 재단당했듯 가족을 포함한 자기 주변의 사람들도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대로 평가하고 재단하며 살아온 것 같았다.
그가 기준삼은 조건은 이런 것이었다.
어느 지역 어느 아파트에 살고, 어떤 명품 옷과 가방을 걸치는지, 얼마를 벌고, 차는 어떤 크기 어떤 브랜드의 차를 타는지...
저 드라마를 보고 자서인가
잠에서 깨니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사실 신은 인간이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하는지에 하등 관심도 없다고
신이 관심 갖는 건 그런 게 아니라고...
지극히 T스러운 신 입장에서는
인간이 저런 것에 왜 그토록 연연하는지 사실 잘 이해가 안 가고, 그런 걸 이해하는 데 에너지를 쓰고 싶지도 않지만
본인의 역할이 이 세상이라는 놀이동산의 관리인이자 운영자이기 때문에 단지 그 역할에 충실할 뿐이라고...
놀이동산 운영자는 사람들에게 이런 따위의 질문을 하지 않는다.
당신은 왜 바이킹을 타려고 하나요?
이렇게 길게 늘어서서 오래 기다려야 함에도, 당신은 왜 그토록 바이킹을 고집하나요?
당신에게 바이킹은 왜 그토록 큰 의미인가요?
대신 그는
바이킹이든 청룡열차든
그저 타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안전벨트를 채운 후, 정해진 시간 동안 충실히 운행되도록 스타트 버튼을 누를 뿐이다.
기쁨, 슬픔, 확신, 쓸쓸함, 애착, 분노, 평온, 자존, 충격, 갈망, 연정, 무력감, 감동, 의심, 설렘, 연민, 냉담, 기대, 공허, 즐거움, 혐오, 열등감, 죄책감, 환희, 고독, 불신, 치욕, 전율, 만족, 회한, 위축, 사랑, 충만, 허무, 격분, 다정함, 희열, 애잔함, 체념, 공포, 집착, 보람, 수치심, 감격, 원망, 불안, 혼란, 서글픔, 열망, 무심, 자부, 억울함, 희망, 경악, 초조, 냉소, 질투, 친밀감, 상실감, 좌절, 후회, 증오, 안도, 시기, 긴장, 애정, 거부감, 당혹, 울분, 권태, 신뢰...
없는 게 없는 이 세상이라는 놀이동산에서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 주어진 시간 동안 맘껏 느끼고 즐기다 가세요" 하며 문을 열어주는 게 T스러운 신의 역할이다.
우리가 울고 웃는 건 경험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경험에 대한 해석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감정 때문이다.
입구가 경험이라면 중문은 해석이고, 안쪽 깊은 곳에 감정이라는 놈이 사장실에 앉은 사장님처럼 앉아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수록 이 감정이라는 놈이 내가 인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핵심적인 존재였음을 실감하고 있다.
어쩌면 인생의 놀이동산도 놀이기구 그 자체보다는 그 감정을 느껴보고 싶어서 타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우리가 무서움과 짜릿함을 느껴보고 싶어서 청룡열차를 타려는 것처럼!
고급아파트를 선택하려는 이유도 그 아파트 자체보다는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감정을 느껴보고 싶어서 인지도 모른다. 즉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감정이 아닐까? 일평생 감정을 추구하며 살다가 마지막에도 오로지 그 감정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저무는 것이 인생 아닐까?
그런데 감정에 우열이 있을까?
인간의 관점에서는 특별히 더 선호하는 감정이 있겠지만 신의 시선에서는 동등한 놀이기구일 뿐, 우열이 없을지도 모른다.
청룡열차가 아무리 무서워도 관리인을 원망하지 말라.
그것은 원래 무서운 것이고, '무서움과 짜릿함' 그것이 청룡열차만의 매력이고, 무서워야 제맛이고, 지극히 성실한 신은 당신이 선택했던 그것을 아주 충실히 구현해 주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바이킹 앞에, 청룡열차 앞에 몰려가는데, 나는 왜 회전목마가 좋을까? 나는 왜 범퍼카에 끌릴까?' 하며 의아해하지 말라.
그냥 다 한바탕 놀이기구일 뿐이다.
놀이동산에서는 무엇을 탔느냐보다
얼마나 진심으로 탔느냐가 남는다.
무엇을 선택했든 그 선택에 집중하며
신나게 놀고 신나게 즐기는 자가 winner다.
당신이 요즘 타고 있는 놀이기구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