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바람 속 붉게 물든 설련

영화 ‘신용문객잔(1992)’이 남긴 인생의 초상

by 이재

영화 <신용문객잔>(1992)을 보았다.

견자단, 장만옥, 임청하, 양가위 등 당대 최고 배우들의 빛나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치밀한 함정 빗나간 계획

황제마저 좌지우지하는 실세 중의 실세, 환관 조소흠은 동창의 우두머리이다.

그는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 만한 충신을 살해하고 가문을 멸문시키면서도, 어린 두 자녀는 살려둔 채 사막 길로 연행하게 한다.

이렇게 하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충신의 동지였던 주회안이 나타날 터! 이때 그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조소흠은 마치 부비트랩을 설치하듯 지도를 펼쳐가며 치밀하게 계획을 짰지만, 인생이 어디 계획대로만 되던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나타난 이는 뜻밖에도 주회안이 아닌 그의 연인 구모언(임청하)이었다.

수려한 외모에 승마와 액션 실력까지 겸비한 임청하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그리고 구모언이 아이들을 구해내는 장면에서 화려한 스턴트 액션이 쏟아져 나왔는데, 황토빛 모래바람 속에서도 출중한 액션 고수들의 연기는 ‘와 저분들은 영화판이 아니라 올림픽에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눈이 호강하는 경험,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사막의 유일한 쉼터, 신용문객잔과 여주인 금양옥

아이들을 구한 구모언 일행은 사막에서 유일하게 영업 중인 ‘신용문객잔’에 들어선다.


객잔의 여주인 금양옥(장만옥)은 요염하면서도 판세를 읽는 눈이 빠르고, 호신 무예에도 능한 강인한 여자다.

그녀의 방에는 여러 개의 비밀통로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주방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녀는 모가지에 현상금이 걸린 범죄자가 자신에게 욕정을 품고 달려들자, 조각 비수를 날려 한큐에 저 세상 보내버리는데,

한 두 번 했던 게 아닌 듯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그렇게 죽은 시체는 비밀통로를 통해 그 즉시 주방으로 떨어져 신선한 만두소로 재탄생된다.


그녀의 방에 그런 비밀통로까지 있다는 건, 의외로 그녀가 아무 남자에게나 몸을 허락하는 쉬운 여자가 아님을 짐작케 한다.


범접하기 어려운 높은 설산에만 피는 하얀 설련을 자신의 방에 장신구로 놓아둔 걸 보면 그녀도 맘 속에 자신만의 고결함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중이떠중이 아무나 오고 가는 그 객잔에서, 생존을 위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속고 속이는 눈치게임 고수가 되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만의 왕자님을 기다리는 여인인 것이다.


하얀 설련이 붉게 물들 때,

예견된 운명의 변곡점

그러던 그녀가 관심을 가지게 된 인물이 주회안이었다.

현상금 전단에서 처음 본 주회안의 단정한 이미지는 어딘가 모르게 여느 범죄자와는 달랐다. 이 사람이 바로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왕자님일까?


그 시각, 주회안은 멀리 사막에서 고고하게 낙타를 타고 점점 신용문객잔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그가 하필 그녀가 거의 벗은 몸으로 객잔 옥상에 퍼질러 앉아 세상사 될 대로 되라는 듯 쩌렁쩌렁 노래하고 있을 때 등장한 것이 참 흥미로웠다.


자신을 보고 "허허허" 웃는 정체 미상의 그에게, 그녀는 "뭘 봐요? 이렇게 벗고 노래하는 거 처음 봐요?"라며 큰소리쳤지만 곧 지붕에서 쏜살같이 뛰어내려, 흙먼지 범벅인 객잔의 천막천으로 몸을 잽싸게 휘감아 "흥"하며 도도하고 요염하게 모델 포즈를 취한다.

여배우 장만옥의 예쁜 청춘과 어우러져 참 재미있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음악이 바뀌자, 큰소리치던 기세는 사라지고 기다리던 왕자님을 알아본 그녀의 눈은 환하고 수줍은 미소로 반짝인다.


“언제 떠날 건지" 묻는 그녀에게 주회안이 "왜? 내가 방세 못 낼까 봐?"라고 반문하자, 그녀는 당신이 안녕이라는 인사도 없이 떠날까 봐 걱정돼서”라고 말하고 험한 날씨를 언급하며 오래 머물도록 권하는데, 이는 객잔 주인으로서의 영업 멘트일 수도 있지만, 내겐 주회안에게 첫눈에 반한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진심을 내비친 장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주회안에겐 이미 사랑하는 연인 구모언이 있다.

구모언과 상봉한 주회안은 이제 충신의 어린 자녀들과 함께 무사히 객잔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사막의 날씨를 잘 모르기 때문에 노련한 객잔 여주인에게 조언과 협조를 구하려고 그녀의 방을 찾아갔다.

주회안은 그녀에게 돈을 건네며 철저히 비즈니스 마인드로 협조를 구하지만, 그녀는 모래바람, 폭우 등 변덕스러운 사막의 날씨를 언급하며 더 객잔에 머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때, 그녀는 무예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일인지 그와 대화하던 중에 스스로 손가락에 피를 내고

그 손으로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설련꽃을 집어 그에게 준다.

그 때문에 하얀 설련에는 피가 번졌는데,

이것은 그동안 지켜온 하얀 순정을 그에게 주는 느낌, 그녀의 심리적인 처녀막이 찢어진 느낌, 설련은 흰색이어야 하는데 더 이상 흰색이 아니니 주회안으로 인해 그녀의 삶이 크게 변형되고 깨어질 것이며,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임을 암시하는 복선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붉은 피가 그녀의 얼굴에 번져가는 사랑의 홍조 같기도 했다.


찰나의 진심과 거짓 혼례

객잔 안엔 곧이어 주회안을 노리는 조소흠의 부하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객잔의 복잡한 구조와 정체 모를 사람들 때문에 섣불리 싸우는 대신, 상관인 조소흠이 군대를 이끌고 도착할 때까지 주회안을 붙잡아 두기로 가닥을 잡는다.


그렇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기 시작한 주회안!

어떻게 해야 저들의 시선을 피해 무사히 일행들과 함께 객잔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고민 끝에 그는 객잔 여주인에게 결혼식을 올리자고 제안한다. 오직 여주인의 방에만 외부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기 때문이다. 전에도 그는 여주인에게 비밀통로를 알려달라 부탁했었지만 여주인은 떠나지 말라고만 할 뿐 알려주지 않았었다. 여주인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눈치챈 주회안은 그녀에게 결혼식을 제안하여 그녀의 마음을 느슨하게 만든 다음 비밀통로를 찾아내 자신의 일행들과 빠져나갈 생각인 것이다.


여주인은 그의 속셈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막상 혼례를 올리고 나면 혹시 그의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혼례를 올리는 그 순간만이라도 그의 곁에 온전히 머물고 싶어서였을까. 사랑은 그런 것 같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면, 찰나에 불과한 그의 작은 눈빛과 무심한 표정 하나도 내 마음속에선 슬로 모션처럼 한없는 의미로 늘어나, 어마어마한 깊이를 지닌 한 편의 장편 영화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하얀 설련이 빨간 피로 물들었던 것처럼 평범했던 객잔엔 囍자가 적힌 빨간 천이 여기저기에 나붙고, 그녀의 얼굴에도 빨간 홍조가 번져간다.


그런데 나 아닌 다른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 나를 그저 수단으로만 여기는 남자의 마음을 무슨 수로 붙잡을 수 있을까?


결국 주회안은 그녀의 만류를 뒤로한 채 연인 구모언을 따라 밖으로 도망가 버린다.


아수라장

화가 난 그녀는 조소흠의 부하들에게 분풀이를 시작한다.

그들이 자신의 사랑인 주회안을 위협하며 그녀의 사랑을 방해했고, 삶의 터전인 객잔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으며, 그녀의 충직한 수족들까지 죽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껏 나쁜 놈들을 죽여, 그 시체로 빚은 만두를 팔아왔는데, 그녀에게 조소흠의 부하들은 그녀의 만두가 될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춘 존재였을 것 같다. 그래서 응징하는 그녀의 태도는 매우 떳떳하고 당당함과 동시에, 그동안 숱하게 있어왔던 일을 반복하는 일상적인 느낌이라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매우 열받고 귀찮다는 듯이 조소흠의 부하 한 명을 반죽 맷돌에 밀어 넣어 짓이겼다. 맷돌 아래로 핏물이 시냇물처럼 흐르자, 그녀는 수돗물 받듯이 그 피를 바가지에 받아 조소흠 일당의 우두머리에게 확 끼얹어 버렸다. 흘러내리는 피로 인해 멘붕에 빠진 우두머리가 소리를 지르려 하자, 그녀는 귀찮다는 듯 그의 복부에 비수를 꽉 박아버렸다.


객잔이 곧 격렬한 싸움으로 초토화될 것을 짐감한 그녀는 주방에서 일하던 청년을, 평소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던 국경 호위대장에게 보내어 '구하러 와달라'고 도움을 청하게 했다.

하지만 청년이 돌아와 전한 말은 호위대장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이 영화에서 나는 하찮게 여겨질 수도 있는 이름 없는 이 청년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북방 이민족 출신인 그는 시신이든 사체든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살코기만 귀신같이 발라내는 재능을 지녔다.


그녀는 호위대장이 오지 않을 거라는 소식에 실망하는 것도 잠시, 청년에게 묻는다.

"그런데 (극심한 위기가 닥칠 이 객잔에) 너는 왜 돌아온 거니?"

청년은 말없이 빙그레 웃는다.

"내 곁을 마지막까지 지킬 사람이 바로 너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가 거느리던 객잔의 일꾼들은 다 죽거나 살길을 찾아 자취를 감추었기에, 이제 그녀 곁에 남은 이는 청년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왜 돌아온 것일까?


어쩌면 (속이고 뺏고 죽이는 적나라한 욕망의 구렁텅이에서 생을 이어 오면서도 매일 자신의 방에 놓인 하얀 설련을 바라보며 자신만의 고결한 순정을 지키고, 왕자님을 기다려 왔을 그녀처럼) 사람고기로 포를 뜨는 천하디 천한 짓으로 연명하던 그 청년에게도 한줄기 고결함이 있었을지 모른다.


사막의 레옹이 보여준 순정

이 청년이, 충신의 두 어린 자녀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며 친절하게 대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 장면을 보며 나는 문득 레옹이 생각났다.

레옹도 비정한 살인 청부업자로 살아가긴 하지만 그 일은 그냥 주어진 것이기에 하는 것일 뿐, 돈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는 학대받고 생의 위기에 몰린 아이(마틸다)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며, 자신의 여린 식물이 생을 이어갈 수 있도록 어딜 가든 화분을 애지중지 안고 가는 고운 심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있는 그 기술(사람을 죽이는 기술)로 어린 소녀의 소망을 온 힘을 다해 실현해 주다 생을 마감한다.


이 청년이 그녀에게 다시 돌아온 것도 그녀를 지켜주기 위함인 것 같았다. 살인과 복수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위험한 소망을 품은 마틸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레옹처럼, 그도.. 돈을 위해 사람도 죽이고 속이고 웃음을 파는 그녀의 적나라한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지금껏 그랬듯이 마지막까지도 그녀 곁에서 그녀를 묵묵히 지켜주다 생을 마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토록 순정을 가진 그가 그녀가 찾던 왕자님 후보군에는 전혀 들지 못하고 고려대상도 아니었을 걸 생각하니 엇갈린 사랑의 작대기가 참 안타까웠다.


낮은 자의 칼, 높은 자의 오만을 발라버리다

어느새 조소흠과 군대가 도착하고, 이들은 신용문객잔을 물 샐 틈 없이 포위해 버린다.

하지만 그녀와 주회안 일행은 이미 객잔을 빠져나온 후였다. 이제 몰래 도망만 가면 되는 거였는데, 아이의 빨간 목도리가 바람을 타고 하필 조소흠에게로 날아갔다. 마치 사막의 바람신이 내게 "저들 사이에 이어진 인연의 끈은 아직 끊어질 때가 안 됐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등 뒤에서 날아온 목도리를 통해 주회안 일행이 후방으로 빠져나간 것을 눈치챈 조소흠은 직접 말을 타고 사막을 달려가 그들과 대결한다.


조소흠 vs 주회안, 구모언, 여주인

3: 1의 대결임에도 이들은 조소흠 앞에서 힘도 못 쓰고 쓰러져갔다.


바로 그때, 땅 속에서 갑자기 뭔가가 솟구치더니 조소흠의 다리를 향해 번갯불 같은 칼날을 마구 휘둘렀다. 칼날이 지나간 조소흠의 다리는 곧 살이 다 발라진 채 뼈만 남았다. 바로 그 청년이었다. 청년이 조소흠의 손에도 칼을 마구 휘두르자, 그의 손은 뼈만 앙상한 해골손이 되었다. 더 이상 서 있을 수도, 칼을 쥘 수도 없던 조소흠은 앙상한 다리뼈가 산산조각 나며 쓰러졌다.


황제도 마음대로 부리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하던 조소흠이 가장 낮고 천한 기술을 가진 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높음이 높은 것은 수많은 낮음들이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높음은 마땅히 낮음 앞에 고개를 숙이고 낮음을 섬겨야 한다.

높음이 기고만장하여 자신의 본분을 망각할 때, 낮음은 불시에 솟구쳐올라 마구마구 칼을 휘둘러, 더 이상 높음이 설 수도 없고 손 쓸 수도 없게 그의 뼈를 산산이 발라버릴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황량한 바람만이 그 자리에

"술 한 바가지 마시고 오줌을 싸네. 그녀의 다리는~~~"

매일 눈과 귀를 가리고 싶어질 정도의 통속적이고 적나라한 노래가 울려 퍼지던 신용문객잔!


인간 안에 내재된 더러움과 추악함, 웃음과 슬픔, 애잔함, 더운 열기와 축축한 욕망, 날씨처럼 변덕스러운 인간의 마음, 하지만 그 안에 고이 간직해 둔 순수한 사랑...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신용문객잔은 인생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소흠도 죽고, 주회안의 연인인 구모언도 죽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사막의 모래바람 따라 흩어진 그곳에 이제 주회안과 여주인, 그리고 여주인을 위해 온몸을 던져 싸우던 청년만 남았다.




평소 피리 부는 것을 좋아했던 구모언은 자신의 유일한 애장품인 피리를 사랑하는 주회안에게 선물로 줬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모래사막에 통째로 삼켜져 흔적조차 사라지고, 황량한 바람만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피리를 불고 있을 뿐이다. 지친 몸으로 그 피리를 바라보는 주회안은 어떤 심정일까...




객잔 여주인은 주회안에게 말한다.

"나랑 객잔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지 않을래요?"

주회안은 거절하며 말한다.

"나는 당신처럼 다시 적나라한 욕망을 상대할 만큼 강하지 못해요. 객잔에 다음 손님이 올 때쯤이면 당신은 나를 잊게 될 거예요."


그리고는 처음 왔던 모습 그대로 혼자 낙타를 타고 고고하게 사막을 향해 떠나간다.


주회안은 충신의 두 아이를 지키고 거둠으로써 자신이 믿고 따르던 신념을 지키고 싶었겠지만, 그 과정에서 맘에도 없던 객잔 여주인과 결혼식을 거행함으로써 자신이 정말 사랑했던 연인에게 큰 상처를 줬다.


그 후 다시 좋은 시절을 함께할 겨를도 없이 그녀가 허망하게 죽어버리자, 그는 자신이 정말 지키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헷갈리고, 마음의 기반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나는 당신처럼 다시 적나라한 욕망을 상대할 만큼 강하지 못해요."

그래서 이런로 자신의 무너지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객잔에 다음 손님이 올 때쯤이면 당신은 나를 잊게 될 거예요."

지금 겪는 상처도 언젠가는 시간이 아물게 할 것이며,

아무리 진하게 울고 웃어도 모래바람 한방이면 그 흔적조차 사라지는 사막처럼

인생이란 그렇게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돌고 도는 것...

이런 부질없는 인생사에 이젠 초연해지고 싶다는 감정이 느껴졌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신용문객잔을 떠나며

청년은 여주인을 사랑하고,

여주인은 주회안을 사랑하며,

주회안은 죽은 구모언을 사랑한다.

엇갈리기만 할 뿐 도통 서로를 향하지 못하는 사랑의 작대기가 참 야속하기만 하다.


이제 객잔 여주인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는 그녀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처럼 다시 무너진 객잔을 수리하고 부러진 기둥을 세우는 선택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녀는 객잔의 허물어진 벽에 미련 없이 술 항아리를 던져 불을 붙이고 객잔을 태웠다.


활활 타는 객잔의 잔해..

그 그을음 내 나는 욕망의 소용돌이를 뒤로 한 채, 그녀도 주회안을 따라가고, 청년도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뒤를 따르며 영화가 끝다.


어쩌면 우리는 자꾸만 그 누군가, 그 무엇인가를 향하게 하고 따라가게 만드는 사랑이라는 강력 접착제 때문에 오늘도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가 주회안을 따라가고, 청년이 그녀를 따라간다 해서 그 사랑이 이뤄질까?

알 수 없다.

그러나 나의 노력이 상대방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더라도 그 불완전한 상태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도 사랑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장면의 여운 때문인가..

객잔을 떠나 미지의 사막으로 나아가는 세 사람이, 내겐 인생사의 바깥으로 물러나 이 모든 것에 초월한 시간을 살아가려는 신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 어딜 가든 인생사의 욕망에 버무려지는 것은 피할 수 없을 터! 이 세상에 신용문객잔이 아닌 곳이 어디 있을까?


심장이 뛰는 한 저들은 또 어디선가 자신만의 새로운 객잔을 열고 만남과 이별, 사랑과 미움을 뜨겁게 경험하며 한바탕 꿈같은 인생을 땀냄새 가득한 진한 인간미로 물들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