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버지는 죄인이고 저 또한 죄인입니다.

​'아바타 불과 재' 리뷰 1

by 이재

​영화의 문을 여는 것은 죽은 형을 마주하는 동생의 뒷모습이다. 우애 깊은 형제였으나 형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다. 동생은 자기 때문에 형이 죽었다고 자책하며 미안해한다. 그리고 고백한다. 아마 이 죄책감을 평생 문신처럼 안고 살게 될 것이라고.


​사실 이 지독한 부채감은 아버지 제이크 설리로부터 시작된 가문의 운명과도 같다. 오래전, 제이크 역시 유능한 과학자였던 쌍둥이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형의 ‘대체품’이 되어 판도라에 왔다. 형의 DNA로 만들어진 아바타에 몸을 싣고 형이 누려야 했을 삶을 대신 살게 된 제이크에게, 판도라는 처음부터 형의 죽음을 양분 삼아 피어난 공간이었다.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혹은 형의 몫까지 살아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아버지 제이크의 삶처럼, 이제 그의 자녀들 또한 소중한 이를 잃은 상실의 바다 위에 서 있다.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 살아남았다는 서글픈 생존신고. 영화는 그렇게 1편에서부터 이어져 온 ‘남겨진 자의 슬픔’을 동력 삼아 다시 한번 거대한 여정을 시작한다.




증오와 두려움 사이의 이방인, 스파이더

​네이티리에게 스파이더는 결코 품을 수 없는 '적의 씨앗'이다. 1편의 전쟁 직후 패배한 인간들이 지구로 쫓겨날 때, 갓난아기였던 스파이더는 동면 장치에 태우기에는 너무 어려 판도라의 인간 기지에 버려지듯 남겨졌다. 기지에 남은 과학자들이 그를 키웠으나, 스파이더는 자연스럽게 또래인 제이크의 자녀들과 어울리며 자랐다. 제이크는 비록 그를 공식적으로 입양하지는 않았어도 사실상 ‘가족 같은 이방인’으로 곁에 두었다.


하지만 네이티리의 시선은 처음부터 차가웠다.


​네이티리가 스파이더를 이토록 증오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바로 자신의 삶을 파괴한 '악마', 쿼리치 대령의 친아들이기 때문이다. 쿼리치는 네이티리의 고향인 '홈트리'를 파괴하여 수많은 나비족 동족을 학살했으며, 그녀에게 영적 길을 안내했던 스승 그레이스 박사와 남편 제이크의 동료들을 죽인 원수다.

갓난아기 때부터 스파이더를 봐왔음에도 네이티리가 단 한 번도 그를 사랑으로 돌보지 않은 채 늘 경계하고 소외시켰던 것은, 아이의 얼굴에서 원수의 잔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작인 《아바타: 물의 길》에서 장남 네테얌이 인간 군대와의 교전 중 전사한 사건은 네이티리의 마음에 인간을 향한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극도의 증오를 각인시켰다. 이제 그녀에게 스파이더는 단순한 '원수의 자식'을 넘어, 내 아들을 죽게 만든 자들과 같은 인간일 뿐이다. 특히 그녀는 스파이더라는 존재 자체가 앞으로 판도라에 불러올 '인간에 의한 재앙'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이러한 뿌리 깊은 불신과 공포 때문에 네이티리는 기회가 된다면 스파이더를 죽이거나 무리에서 쫓아내고 싶어 한다.


​반면, 제이크와 자녀들은 스파이더를 진정한 친구이자 형제로 여기고 그를 적극 옹호하고 보호하려 한다. '스파이더와 평화롭게 공존하고 싶어 하는 가족들''그를 재앙의 불씨로 보고 제거하려는 네이티리' 사이의 팽팽한 갈등은, 스파이더라는 기구한 운명을 가진 한 인물을 두고 제이크 가족이 마주한 가장 비극적인 균열을 보여준다.




나는 누구인가

한편, 스파이더는 나비족 아이들과 산과 바다를 누비며 자랐으나 판도라의 대기를 직접 들이마실 수는 없었다. 판도라의 대기는 산소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성도 품고 있는 탓에, 그는 늘 ‘엑소팩(Exopack)’이라는 공기정화 장치에 의지해야 했던 것이다.

단 한순간도 엑소팩을 벗을 수 없다는 이 사실은 단순한 호흡의 문제를 넘어, 그에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 세계에 속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정체성의 괴리를 불러왔을 것이다.


‘영혼은 나비족, 육체는 이방인’

그의 영혼은 나비족이었다. 나비족의 언어를 쓰고 에이와를 믿으며, 거울 속 인간의 얼굴보다 푸른 피부의 형제들을 닮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현실의 그는,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나라의 시각으로 비유하자면, 일본인에게 학살당한 피해자 마을에서 나고 자란 일본인 고아와 같았다. 그는 기억에도 없는 혈육의 악행을 전해 들으며, "너는 원수의 아들이야. 악마 같은 네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죄 없는 내 아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라는 네이티리의 서슬 퍼런 원망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처음엔 그도 억울했을 것이다.

하지만 점차 자라며 그는 자신을 품어주고 보호해 주고 친구가 되어 준 나비족의 상처를 마음깊이 통감하며, 결코 사과하지 않을 악한 혈육을 대신해 기꺼이 돌팔매를 맞음으로써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어 졌을지 모른다.


"제 할아버지는 광주학살 죄인이며, 저 또한 죄인입니다."

울먹이며 엎드려 사죄한 고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 씨나, 스탈린의 잔혹함을 폭로하며 선을 그었던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처럼...

혹은 중드 《영안여몽》에서 아버지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죄책감으로,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몸의 희생도 불사하던,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안에 흐르는 악한 피"와 절연하려 처절하게 몸부림치던 사위처럼 말이다.


이들은 자신의 그 어떤 행동으로도 무고한 희생자들의 피 값을 치를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엎드리고 칼 끝을 자신에게 돌려서라도 세상에 진 빚을 만 분의 일이라도 갚고 싶 않았을까? 그 행동을 통해 자기 안에 흐르는 악인의 피와 절연하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악한 피를 다 흘려버려 새 피로 교체하고 싶 않았을까?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은 그 악인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새로운 정체성으로 다시 살고 싶지 않았을까?

스파이더도 악인의 자녀로서 충분히 이런 고뇌와 혼란을 겪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그도 '언젠가 나 하나 희생하여 나비족을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나마 빚을 갚고 내 진짜 가족인 에이와와 나비족을 지킬 수 있다면 기꺼이 나서고 나를 던져야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해왔을지 모른다.


그의 이런 의지는 영화 곳곳에 드러난다.

영화 중반부에 그는 제이크와 함께 본부로 끌려가 갇히게 되는데, 그는 탈출하자마자 제이크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와,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도 온몸 바쳐 전면에 나서며 제이크를 구하기 위해 애쓴다.


제이크가 고심 끝에 판도라 전체의 안위를 위해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숲으로 데려갈 때도, 그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라고 묻기는 했지만, 이것은 제이크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을 뿐이다. 제이크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최종 확인 한 후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선택을 한다. 그는 온몸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죽이세요. 저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어요. 저 하나 죽어서 에이와와 사랑하는 나비족 형제들이 안전할 수 있다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판도라에서 자기 잘못이 아닌 것에 항변도 하지 않고 누군가의 날 선 원망의 에너지를 온전히 수용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했을 그에게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그를 지지해 주는 제이크 설리와 친구들, 그리고 에이와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자가호흡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매 순간 그에게 비참한 자각을 안겨주었다.


'에이와 조차도 내게 대지의 숨을 허락지 않으시는구나. 악인의 피가 흐르는 나같은 이는 정말 아무리 노력해도 성스러운 이 땅에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건가...'


에이와에게서 마저 외면당한 듯한 이 고통,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삶의 혼란이 느껴질 때마다 그는 아마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 껍데기와 자신을 인간으로 규정당하게 하는 이 붉은 피를 없앨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그는 더욱 인간의 특성을 지우고, 파란 형제들처럼 되기를 동경했을 것이다.


하지만 엑소팩은 단 1초도 쉬지 않고 그가 ‘인간’ 임을 일깨웠다. 형제들이 물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할 때 혼자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어야 하고, 전투 중에도 마스크의 파손을 걱정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그는 스스로를 '미완성의 나비족' 혹은 '불청객인 인간' 그 사이 어딘가에 놓아두고 방황했을 것이다.

매번 느껴지는 네이티리의 차가운 시선도 그에게는 "너는 결코 우리와 같아질 수 없어!"라는 확인사살과 같았을 테니까.


에이와의 인정을 받은 판도라의 아들

그러던 중 엑소팩이 고장 나 죽음의 문턱에 이른 스파이더를 키리가 살려낸다. 에이와와 교감한 키리가 자연의 생명 에너지를 그의 폐부에 불어넣자, 그의 체질은 나비족과 똑같이 호흡할 수 있게 변화 것이다.


몸과 정신은 연결되어 있고 본질적으로는 하나이기에, 이 사건은 그의 정체성에도 엄청난 지각변동을 일으켰을 것이다.

더 이상 위험하지도 폐부를 찌르지도 않는 대지의 공기는, 가시철조망을 치우고 '나의 아들아 어서 오너라.' 하며 따뜻한 품으로 맞아들이는 사랑의 음성이었고, 죄사함과 용서의 자유였다.


'악인의 피가 흐르던 이물질 같은 나를 에이와가 드디어 안아주시고 성스러운 공기를 허락하셨어. 내 몸을 정화하여 새롭게 바꿔주셨어!'


그는 이제 더는 인간의 기술(엑소팩)에 생명을 구걸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모습을 기쁘게 응시하며, "나는 더 이상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확신으로 자신감을 회복했 것이다. 엑소팩이라는 물리적 장벽이 사라진 순간, 그는 비로소 나비족 형제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판도라를 '나의 집'이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것은 '인간의 피를 가졌으나 판도라의 숨을 쉬는 새로운 적장자'로서의 정체성, 나비족보다 더 나비족다운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의 자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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