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단종에게 따뜻한 밥을 차려주고 싶어 하는가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by 이재

※ 주의 : 이 글에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종의 이야기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다뤄졌던 터라 대중들에겐 익숙한 스토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략적인 스토리와 결말까지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단종에 대한 영화가 또 나왔다고?

그래서 나는 이 스토리에 제작진이 어떤 상상력의 옷을 입혔을지, 배우들은 또 주요 인물들을 어떻게 표현했을지가 궁금했다.


영화가 택한 방식은 '온기'였다.




영월 청령포 사람들은 이곳에 유배를 올 누군가를 위해 한마음으로 정성스레 집을 짓는다. 이곳에 오실 분은 마을을 배부르게 하고, 아이들의 출세길을 열어줄 고마운 귀인이 되실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분이 오시기 전부터 웃을 준비, 두 팔 벌려 환영할 준비, 정성을 다해 모실 준비가 되어 있다.

드디어 어린 단종이 유배를 오자, 마을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정성껏 식사를 올린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닫은 단종은 며칠째 수저를 들지 않고, 사람들은 다 같이 모여 걱정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서서히 전해지는 마을 사람들의 순수한 진심에 단종은 비로소 첫 술을 뜬다.

자신 앞에 놓인 소박한 찬들이 마을 이웃들이 힘을 모아 준비한 정성의 결정체임을 알게 된 단종은 밥과 국, 반찬 하나하나의 출처를 묻더니, 특히 "막둥 어미가 끓인 다슬기국은 수라간의 것보다 낫구나"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단종이 식사를 마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을엔 마치 한일전에서 골을 넣은 것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이후 단종과 마을 사람들은 신분을 초월한 친구가 된다. 마주 앉아 밥을 먹고,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이야기에 함께 웃는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동안 순수한 정이 켜켜이 쌓이고, 단종은 배움에 뜻이 있는 청년에게 글도 가르치며 인간 대 인간으로 깊이 소통하기 시작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상상은 내가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비극적인 수류탄의 잔해를 뽀송뽀송한 팝콘으로 바꾸어 놓았던 영화 <웰컴 투 동막골>처럼, 그 비현실적인 인간미가 왠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신파극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신파극

실제 역사 속 영월은 단종에게 '환대'가 아닌 '무거운 침묵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뒤편은 절벽인 섬 같은 지형이다.

당시 이곳은 민가가 섞인 마을이 아니라, 오직 단종만을 격리하기 위해 비워진 고립된 지역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강 건너편에 살았고, 그마저도 배를 타지 않고서는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더구나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하라'는 왕명을 받든 군관들이 엄중히 감시까지 했으니, 영화에서처럼 주민들이 단종에게 가까이 다가가 밥을 챙겨주고 함께 정을 나누기란 구조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다.

단종과 연루되는 순간 피바람을 각오해야하는 엄혹한 시절이니, 사람들은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를 철저히 외면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기록에서도 단종이 죽임 당했을 때 사람들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그 누구도 시신을 거두지 않았다고 전한다.

오직 호장 엄흥도만이 홀로 장례 기구를 마련해 정중히 장사를 치른 후, 아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을 뿐이다.

무고한 어린 생명이 비정하게 스러져간 그 현실에서, 엄흥도를 제외한 그 누구도 차마 나서서 행동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영월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슬 퍼런 권력의 감시 아래 놓인 힘없는 민초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지라도 가족의 생사가 걸려있기에, 그들도 '외면'과 '침묵'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 당시 영월의 비정한 리얼리티다. 하지만 영화는 이 무거운 침묵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작위적인 환호와 수발을 채워 넣는다.

그래서 단종이 밥그릇 하나 비웠다고 온 마을이 축제라도 열린 듯 환호하는 장면은 따뜻하다 못해 오바스럽게 느껴졌다.

실제로는 그러한 집단적인 온기는 존재할 수도 없었을 텐데, 난데없이 그 비극의 땅에 찾아와 과한 친절을 덧씌우려 하니, 이러한 설정이 오히려 단종이 겪었을 진짜 고독을 가볍게 만드는 것 같아 왠지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유배지까지 찾아온 신하들이 강 너머 단종의 거처를 향해 음식과 선물을 던지며 통곡하는 장면은 인위적인 온기의 정점이었다.

이러한 '선물 투척'은 멋진 피겨 스케이팅 경기를 감상하는 여유로운 관람객들에게나 가능한 풍경이지, 연루되는 즉시 목숨줄이 날아가는 판국에, 가문의 안위를 뒤로한 채 대놓고 충심을 드러낸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런데 이런 인위적인 온기가 드러나는 장면은 한둘이 아니었다. 영화는 곳곳에 따뜻한 장면들을 배치하며 단종의 이미지를 계속 바꾸려 하고 있었다.

기존의 우울하고 슬프고 외롭고, 두려움 속에서 떨던 피해자의 이미지를, 좋은 사람들 속에서 따뜻한 온기를 얻고 점차 밝은 표정을 되찾아 가다가 마침내 자신만의 주체적인 선택도 할 수 있는 그런 인물로 말이다.

그런데 제작진은 왜 이렇게 단종의 이미지를 바꾸려 하는 것일까.




세속적 기회주의자

유해진이 연기한 촌장 캐릭터는 전형적인 '생존형 소시민'에서 '각성한 목격자'로 급커브를 트는 인물인데, 그 태도의 변화가 너무 가팔라서 내게는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철저히 결핍에 기반한 생존주의자다. 도덕이나 충심보다는 배고픔이 행동의 원동력이며, 언제나 나(자아)와 내 자식(확장된 자아)이 세계의 중심이다. 유배 온 왕이라는 거창한 존재도 그에겐 그저 등 따숩고 배부르게 해 줄 도구이자, 내 아들 출세를 위해 필요한 귀빈일 뿐이다.

유배가 당사자에게는 척추가 꺾이는 듯한 극한의 고통일 텐데도 그는 타인의 비극을 자신의 삶의 양분으로 치환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내 자식의 출세와 마을의 풍요를 위해서라면 타인의 고난마저 당연한 발판으로 여기는 세속적 기회주의자의 면모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뭐가 어떠냐"고 반문할 법한 그에게 생존은 곧 정의다.

그래서 단종이 탄 가마가 청령포를 건너다 반파되어 물에 빠졌을 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에 빠진 이를 걱정했지만 그는 물에 젖은 생쥐 꼴로 서 있는 어린 단종이 자신이 기대했던 '부유하고 지체 높은 귀빈'의 모습이 아니라서 어이없고 실망한 기색을 보인다. 그래서 심지어 산에 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까지 한다.

"내가 당신을 데려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당신은 왜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고 어째서 나와 우리 마을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거요?"

이게 영화 초반 촌장이 단종에게 가진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단종이 실세 한명회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직접 목격했다.

단종은 촌장의 아들이 죄도 없이 관아로 끌려가 매 맞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관아로 왔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방안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한명회를 향해 "한명회 네 이놈!" 하며 공허한 호통을 내지르는 것뿐이었다.

그 모습이 우습다는 듯 한명회가 주위에 촌장의 아들을 더 심하게 매질하도록 명령하자, 보다 못한 촌장은 단종에게 "그만 가셔요. 당신이 가야 내 아들이 산다잖아요."라며 단종을 밀어낸다.

어쩔 수 없이 단종이 관아 밖으로 비참한 걸음을 떼기 시작했을 때, 등 뒤에서 촌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한명회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이러한 충성 서약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이제 누구 말을 들어야 하고 누가 진짜 왕인지를 똑똑히 알았습니다."

강자의 압도적인 힘을 확인한 소시민이 생존을 위해 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도 비굴한 방어 기제다.


급하게 '착한 사람' 칸으로 옮겨진 촌장

그런데 이런 인물이 단종의 위험천만한 역모 계획을 눈치채고도 관아에 고발하지 않고 돌아선다??

찰나의 즉흥적인 선의가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만, 자신과 마을 전체가 피바람에 휘말릴 수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충의지사처럼 행동하는 대목은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내 아들 하나도 지켜주지 못하는 나약한 왕을 위해 마을 전체의 목숨까지 담보로 거는 것은 그의 뿌리 깊은 생존 본능에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입버릇처럼 마을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여겼던 그가 평생 지켜온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면서까지 역모를 묵인해 주는 설정은, 캐릭터 내부의 자연스러운 변화라기보다는 극의 감동적인 결말을 위해 작가가 강제로 부여한 역할처럼 느껴졌다. 인물이 스스로 움직인 게 아니라, 감독이 급하게 그를 '착한 사람'칸으로 옮겨 놓은 셈이다.




리얼리티

그렇다면 단종이 실제로 겪었을 법한 리얼리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도 그는 사람에 대해 극도의 불안과 회의를 느끼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나로 인해 죽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월에 가서도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은 채, 아무도 믿지 않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며,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철저히 소외되어, 어두운 구석에 숨어드는 새끼 길냥이처럼 외롭게 저물어 가는 모습에 가까웠을 것이다.

『세조실록』은 승자의 기록으로, 단종의 서사는 상당 부분 왜곡되거나 생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나는 정사만이 아니라 야사에 남아 있는 조각들을 모아, 그가 실제 겪었을 법한 시간을 조심스럽게 상상해 보았다.




가시 울타리에 갇힌 소년

단종이 '영월 청령포'라는 완벽한 고립지로 내몰린 것은 그를 중앙의 정치 세력으로부터 철저히 격리하려는 숙부 세조의 야욕 때문이었다.


단종이 머물던 좁고 초라한 집 주위로는 가시 울타리가 쳐져 있고, 그 경계 밖은 왕명을 받드는 군관들이 지키고 있다.


단종은 자신을 사랑해 준 사람들은 이미 죽거나 다쳐서 멀리 유배 가거나 노비가 되었기에, 지금 이곳에는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줄 이가 아무도 없음을 느끼며 절망한다.

그는 방 안으로 밀어 넣어지는 거친 밥과 시든 총각무를 보며 '혹시 독이 든 게 아닐까' 의심한다. 그 온기 없는 음식들은 끼니라기보다 생존을 확인하는 비정한 신호에 가까웠다. 그렇게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어린 소년의 육신은 하루하루 피폐하게 말라간다.


이따금 노산대에 올라 금성숙부가 유배 중인 순흥쪽을 바라보지만 그래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숙부는 무탈하게 잘 지내고 계실까?

이름이라도 시원하게 불러보고 싶지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기에 마음껏 부를 수도 없다. 내가 숙부 이름을 부른다면 나로 인해 숙부에게 어떤 재앙이 닥칠지는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강 건너 마을 사람들은 저 강줄기 너머 가시 울타리에 갇힌 소년이 죄 없이 쫓겨난 어린 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측은함을 느낀다. 하지만 나룻배 근처에라도 섣불리 다가갔다가 재앙을 당할까 두려워, 어린 자녀들에게 "나루터 근처에는 절대로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며 단속한다.


단종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방바닥에 누워 그동안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사람들을 한 명씩 떠올려 본다.


인자하셨던 할아버지(세종)와 할머니, 일찍 곁을 떠난 아버지(문종)와 어머니, 그리고 유모와 아내...


그들과 함께 웃으며 온기를 느꼈던 시절이 마치 아득한 꿈처럼 멀게 느껴진다. 그리고 곧 그들 대부분이 죽어 이승에 없음을 떠올리고는, 하늘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눈물짓고 있을 그들에게 원망도 해본다.


'나도 데려가지, 왜 나만 남겨두었나요?

나 혼자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라고요!!'


적막한 이 공간...

지난 일을 아무리 곱씹어본들 마음만 아프고 시간은 멈춘 듯 가지 않는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데...

그래서 죽음만이라도 제 뜻대로 해보려고 시도해 본다. 하지만 육체가 너무 약해져서 스스로를 죽일 힘마저도 내지 못하는 것에 비참함을 느낀다.


두 달여의 시간이 흐르고, 갑자기 불어난 강물로 청령포가 잠길 위기에 처하자, 단종은 영월 관사인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겨가게 된다.


왜 아무도 나를 돕지 않는가

금부도사 왕방연은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렀으나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시간이 지체되자 수행하던 나장들만이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마침내 왕방연이 관풍헌 뜰 한가운데 사약을 내려놓고 엎드리자, 단종이 대청마루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현장의 모두가 놀랐다.

폐위된 지 수년이 흘렀건만, 소년은 정갈하게 갖춰 입은 익선관과 붉은 곤룡포 차림이었던 것이다.

단종은 오늘이 마지막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세종의 손자이자 문종의 장자로 태어나 정통성을 부여받았지만, 무도한 권력 앞에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사랑하는 이들도 지키지 못한 채 여기까지 흘러온 세월이었다. 왕의 옷을 벗은 뒤의 그는 그저 함부로 다루어지는 힘없는 소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런 모습이고 싶지 않았다.

본래 자신에게 부여된 옷을 입은 본연의 모습, 훼손되지 않은 고귀한 왕의 모습으로 서고 싶었다.

또한 이 복식을 입음으로써, 저들이 자행하는 짓이 단지 무력한 소년 하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죄 없는 왕을 시해하는 ‘역모’ 임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

의자에 정좌한 단종이 사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것은 '네가 하려는 짓의 무게를 아느냐'는 준엄한 문책이었다. 사약을 바칠 승지도 대동하지 않은 채, 격식마저 무너진 살인 현장에서 왕방연은 끝내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정적이 길어지던 그때, 누군가가 나섰다.

평소 단종 곁에서 잡다한 심부름을 하면서 단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아에 고해바치던 통인(通引)이었다.

그는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며, 금부도사의 봇짐에서 활줄을 꺼냈다.

사약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세조 측이 준비한 비정한 예비책이었다.


통인은 활줄에 긴 노끈을 잇고, 단종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유배까지 온 죄인이 어찌 이다지도 더디 죽는가."

단종이 분노했다.

"네까짓 하인이 감히 나를 죽이려 드느냐? 나를 죽이려거든 명을 받드는 승지를 불러 정당한 절차를 갖춰라!"


통인은 왕의 마지막 위엄을 무시한 채 소년의 목에 차가운 올가미를 걸었다. 그리고 노끈의 끝을 창문 틈으로 밀어 넣어 뒷방으로 넘겼다. 고통에 일그러질 왕의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벽 너머 어둠 속에 숨어 줄을 당기는 비겁한 가해자가 되기를 택한 것이다.

벽 너머에서 노끈이 팽팽하게 당겨지자 단종의 상체는 뒤쪽 창문으로 바싹 끌려갔다. 단단한 벽과 창틀이 지지대가 되어 목을 더욱 조여왔다. 나무 의자는 비명을 지르듯 삐걱거렸고, 단종의 목에선 "꺽꺽" 억눌린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허공을 휘젓는 발과 곤룡포의 처절한 펄럭임.

뜰에 있던 나장과 관리들은 왕의 위엄이 산산이 부서지는 과정을 정면에서 목도했다.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는 이도 있었으나, 그들 역시 방관을 통해 국가가 저지르는 살인에 가담한 공범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벽 뒤의 가해자는 오직 손바닥에 전해지는 장력에만 집중하며 기괴한 집행을 멈추지 않았다.


단종은 목을 조르는 활줄보다 자신을 '죄인'이라 부르며 달려든 통인의 무례함에 더 큰 모멸감을 느꼈다.

담장 너머에서도 소식을 듣고 모여든 주민들의 숨소리가 들려왔으나, 그 수많은 눈동자 중 누구 하나 손을 내미는 이가 없었다.


'왜 아무도 나를 돕지 않는가.'


그는 철저히 버려지고, 철저히 혼자였다.

비참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할아버지! 아버지! 저를 보고 계신가요?'

먼저 떠난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 고통의 강만 건너면 그분들을 만날 수 있으니.

어서 빨리 끝나기를..

빨리 이 고통의 강을 건너가 사랑하는 이들의 품에 안겨 쉴 수 있기를...'


단종은 점차 숨막힘을 받아들이며 저항을 멈췄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 눈물이 떨어졌고, 마침내 소년의 고개는 힘없이 툭 꺾였다.




그런데 영화를 이렇게 만들었다면 천만 영화는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기존에 반복되어 온 피해자 서사를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비극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때로 우리 안의 트라우마를 강화하기만 할 뿐, 내재된 한(恨)을 풀어주지는 못한다.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은 결국 사람들 안의 신명을 실컷 울게 하고 웃게 하며, 그 응어리를 만져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아까 던졌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제작진은 왜 단종의 이미지를 새롭게 바꾸려 했을까?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 영화에 왜 이토록 크게 반응하는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단종과 동시대를 살았건, 수백 년 뒤의 시대를 살고 있건, 그의 사연을 접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비슷한 회한이 차오른다.

죄 없이 억울하게 스러져간 생명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 그리고 지금이라도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는 간절함이다.


이 마음은 비단 단종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세월호의 아이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희생된 19세 청년, 그리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고문당하고 죽거나 굶주림 속에서 생을 마감했던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릴 때도 우리는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제라도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최근 인공지능(AI) 기술로 독립운동가께 따뜻한 식사를 대접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https://youtube.com/shorts/ecEscyHYI3U?si=V3p2rvxcbh9Xw9d0

출처 : 유투브 '기억복원소'

고된 세월을 견뎌온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음식을 맛있게 드시는 모습에, 영상 아래로는 이러한 댓글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눈물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현실에서는 해 줄 수 없었던 일을 상상 속에서라도 해 주고 싶어 하는 마음.

이 영화가 건드린 것도 바로 그 감정이 아니었을까.


몇백 년 동안 쌓여 온 마음의 빚

역사 속 단종은 잔인할 정도로 외면당했다.

대부분의 친족은 세조의 편에 섰고, 그의 편에서 그가 잃은 것을 되찾아 주려 했던 몇몇 사람들의 복위 운동은 처참한 보복으로 끝났다.

세조는 이후 더욱 노골적으로 경고했다.

“누구든 단종을 돕기만 해라. 삼족을 멸하여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똑똑히 보여주겠다!”

그 결과 힘없는 민초들은 단종을 돕고 싶어도 감히 다가갈 수 없었다.

마침내 단종이 비참하게 죽어 그의 시신이 강물 위에 아무렇게나 떠내려갈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갚지 못한 마음의 빚이 무겁게 쌓였다. 그리고 그 빚은 세대가 바뀌어도 해소되지 않은 채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왔다.


영화가 건네는 보상

이 영화는 그 오래된 부채감을 풀어주기 위한 상상일지 모른다.

그래서 영화 속에는 이제라도 단종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려는 듯, '종합선물세트' 같은 설정들이 등장한다.


실제 역사에서 단종은 청령포에 홀로 고립되어 있었지만 영화는 그에게 두 팔 벌려 환영해 주는 이웃을 선물했다.

차갑게 느껴졌을 유배지의 혼밥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식사로 바꿔주었고,

사람을 두려워하며 마음을 닫았을 소년의 얼어붙은 마음은,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과 무언의 토닥임으로 녹여주었다.

"잘 먹고 힘내. 그래도 살아야 해. 우리 함께 살아가자."

영화는 그가 실제로는 거의 듣지 못했을 말을 대신 들려준다.


그리고 영화는 단종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를 주었다.

당시 영월과 가까운 순흥에서 유배 중이던 숙부 금성대군은 아들 같은 조카를 구해서 조카가 잃었던 것을 되찾아주려고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군사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종은 삼엄한 감시 속에 철저히 외부와 격리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영화는 그것을 단종에게 알려 준다. 그를 위해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가 완전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는 그에게 '저항의 기회'도 주었다.

실제 역사에서 그는 즉위, 양위, 유배의 모든 과정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다닌 무력한 존재였다.

그러나 영화 속 단종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움직인다.

마치 심리극을 통해 어린 시절 하지 못했던 말을 지금이라도 내뱉어 보면 상처 입은 그 시절의 나를 달랠 수 있듯이, 영화는 스크린 위에서나마 주체적인 선택을 할 기회를 줌으로써 억눌린 한을 풀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하지만 그 시도는 자유롭게 멀리 뻗어나가지 못하고, 곧 예정된 비극의 굴레로 되돌아온다.

다시 만나기를 그렇게나 고대했던 금성대군과 단종은 영화 속에서도 끝내 만나지 못한 채 슬픈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주체적으로 저항해 봤다는 사실, 이 심리극에 참여해 봤다는 사실만으로도 단종에게는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마지막 저항의 길에 그 선택을 지지해 주고 함께 동행해 준 누군가가 있었기에 그는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단종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물해 주려고 파격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야사 속 엄흥도는 엄청난 불이익을 각오하고서라도 물에 떠내려가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고결한 의인이다.

반면, 단종의 숨통을 조였던 통인은 그 일을 마치자마자 몸의 아홉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죽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여부를 떠나, 통인은 몇 백년 동안이나 천벌을 받아 마땅한 '잔혹한 가해자'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 비극적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가 지속되는 한, 단종의 고통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이 잔인한 굴레를 끊어내기 위해 유해진이 연기한 엄흥도 캐릭터에 파격적인 설정을 부여했다.

통인을 품은 엄흥도.

잔혹한 통인을 의인 엄흥도 캐릭터 안에 포함시킨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영화 속 엄흥도는 앞서 말했듯이 사특하고 세속적인 기회주의자의 면모와 충의지사 이미지가 어색하게 공존하게 되었다. 상반된 두 인격이 자연스럽게 섞이지는 못한 모양새다.

하지만 의인의 틀 안에서 통인의 가해자 이미지를 희석시킨 덕분에, 영화는 그를 단종의 마지막 부탁을 눈물로 받아들이는 ‘비극적인 조력자’로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조력자만 있을 뿐 가해자는 없다.

가해자가 없으니 피해자도 없다.

영화는 단종을 조력자의 눈물어린 도움으로 고통스러운 이승을 떠나 바라던 안식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함으로써, 마지막 순간까지도 단종에게 작은 위로를 전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비극의 구조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단종의 이야기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는 그 비극의 구조가 지금도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종은 힘없는 무고한 희생자였다.

강한 힘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겼고, 많은 사람들은 그 부당함을 보면서도 침묵했다.

오늘날의 단종은 학교폭력 피해자,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같은 이름으로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

힘 있는 자가 누군가의 것을 빼앗고 괴롭히고 희생시키려 할 때, 다수가 선택하는 침묵과 외면은 피해자뿐 아니라 방관자의 마음에도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쩌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다가가 보라고.


마을 사람들이 단종에게 다가가 마음을 터놓고 밥을 나누는 장면은 우리에게 우리가 진정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원했던 것은 ‘피해자'나 ‘방관자' 같은 이름이 아니라, 힘들 때 "괜찮아?" 하며 달려가 서로의 손을 잡아주고, 안부를 묻고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일상.

“건강해. 행복해. 우리 서로 잘 지내보자.”

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다운 온기였다는 것을 말이다.


단종 = 우리 자신

그리고 비정한 현실에 내던져진 단종은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묻지마 살인이 벌어지기도 하는 거리를 걸어가야 하는 우리.

지독한 자본주의 경쟁 속에서 서로 연대하기보다는 서로를 믿지 못해 자기만의 골방에서 오들오들 떨며 얼어가기 쉬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스스로 인지했건 인지하지 못했건 간에 아주 오랫동안 사람 사는 냄새와 진심 어린 온기를 그리워해 왔는지도 모른다. 단종의 삶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비대면의 외로움, 냉혹한 현실과 닮아있다.

그렇기에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정 속에서 점차 기운을 회복하고 의지의 눈빛을 되찾아가는 단종의 모습은, 우리 안의 추운 자아에게도 덩달아 대리 만족과 치유를 선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극 중 이 장면은 유독 인상 깊었다.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는 호랑이 앞에 단종이 나서며 "너의 상대는 바로 나다!"라고 외치던 순간이다.

덮쳐오는 맹수를 피하지 않고 대차게 정면으로 응시하며 활시위를 당겨 명중시키는 그 모습은 활쏘기의 귀재였던 태조 이성계, 대찬 성정의 이방원, 그리고 세종의 애민 정신을 물려받은 후손이라면 충분히 보여주었을 법한 기개여서 왠지 납득이 되었다. 이 모습처럼 만약 단종이 무탈하게 장성하여 성군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씁쓸한 기분을 금할 수 없었다.




배우 박지훈

박지훈이 재현한 단종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나는 그가 주연을 맡은 <약한 영웅>도 재밌게 봤고, <프로듀스 101 시즌 2>에 나왔을 때도 좋은 인상을 받았다.


세상에 잘생긴 사람은 많다.

하지만 태도나 마인드까지 잘생긴 사람은 드물다.


<프로듀스 101 시즌 2>에서 내가 본 박지훈은 멋진 외모에 재능과 실력도 출중한데, 태도가 좋고, 말도 신중하게 하고, 매우 성실한 연습생이었다. 몸을 사리지 않는 정확한 동작과 뛰어난 실력은 그가 센터에 섰을 때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걱정할 시간에 연습하자"라는 좌우명을 지녔던 이 성숙한 소년은 결국 2위라는 영광스러운 성적으로 데뷔의 꿈을 이뤘다.


이번 영화에서는 눈빛이 더 깊어져서, 특히 이 장면에서는 뭐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단종 역을 제안받았을 때, 처음엔 배역을 잘 구현하지 못할까 봐 고사했다고 하는데, 눈앞의 기회를 무조건 덥석 물기보다, 자신의 깜냥을 헤아리고 지킬 수 있는 말만 하려는 진실함이 드러나는 듯하여 나는 그가 더욱 좋게 느껴졌다.


배역을 맡기로 결심한 후 그는 두 달 동안 하루에 사과 한 개씩만 먹으며 15kg를 감량, 마침내 단종의 초췌한 몰골을 완성해 냈다.

그는 다이어트 방법으로 운동도 생각했었지만 '근육이 있는 단종은 단종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고민 끝에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고, 이를 통해 모든 것을 잃고 실의에 빠진 피골이 상접한 어린양의 고통을 몸으로 재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덕분에 역사 속에서 외롭게 스러져갔던 단종은, 박지훈이 공들여 구현한 몸을 빌려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그의 깊이 있는 눈빛을 통해 비로소 대중과 눈을 맞추며, 따뜻한 사랑 속에서 환히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귀한 결과물은 결코 쉽게 나오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묵묵히 쌓아 올린 누군가의 성실한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배우 박지훈은 자신에게 정직하고, 자신의 일에 성실한 사람이 얼마나 눈부시게 빛날 수 있는지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마치며...

이 영화는 비록 작위적일지언정, 단종에게 따뜻한 이불을 덮어주는 작품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스크린으로 올리는 정성스러운 위령제' 같기도 하다.

정성을 다해 따뜻한 밥을 지어 올리고, 생전의 한을 풀어드리고, 그분과 함께 울고 웃으며,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눈물을 머금고 동행해 드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단종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안의 빚진 마음과 추운 자아도 함께 몸을 녹일 수 있었다.

단종의 영혼이 이 영화를 보신다면 이제라도 자신을 돌아봐 주고 헤아려 준 제작진에게 큰 복을 내릴 것 같다. 현재 기준 누적 관객수가 1,100만을 돌파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복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믿거나 말거나겠지만 단종이 주시는 복이 제작진뿐 아니라, 이 영화를 보며 그분과 함께 진심으로 울고 웃은 모든 이의 머리 위에도 뿌려지길 소망해 본다.

겨울이 가고 새봄이 오는 3월에 개봉한 이 영화가 따뜻한 훈풍을 만끽하고 있듯이, 모두의 마음에도 새봄 같은 따스함이 감돌기를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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