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이 정해져 있으면 대화에서 뭘 하겠나? 자네가 만약 내일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내 대답은 달라져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오늘의 대화가 중요한 거야. 우리가 내일 이 대화를 나눴더라면 오늘 같지 않았을 걸세. 그래서 오늘이 제일 아름다워. 지금 여기.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 p174
날이 갈수록 기억력이 소박해진다. 얼마 전 만났던 친구들이 나의 그 소박한 기억력에 기가 차 했다. 나 또한 기가 찼다.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예전에 했다는 말들이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집에 돌아와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빠르게 내 친구들에게 공감한다. 단순한 공감만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준비된 것처럼 다다다다 내 행적과 언행을 이야기하는 폼에 분개가 들어있다. 대략 이야기는 예전에 엄마가 한 이야기와 얼마 전 엄마가 한 이야기가 상충된다는 거였다. 그런 사례가 하나가 아니었던 지라 아이 말이 길어졌다.
"얘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사람이란다. 매일 우리 안에서 몇천 억 개의 새로운 세포가 태어나고 죽어. 연장선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단다. 과거의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지금 여기, 오늘의 대화가 중요한 거지. 고 이어령 선생께서도 말씀하셨지..."
여기까지 이야기하는데 아이 표정이 딱 이렇다. 뭔 개소리야. 아직 어린 뇌로는 떠올리지 못할 단어, 조금 크면 엄마니까 말로는 내뱉지 못할 단어를 내가 대신 캐치했다. 엄마의 일관성 없는 설명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던 아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져 갔다.
"얘야? 아니 진짜로 많은 철학자들과 인문학자들과... 아니 이게 진짜 변명이 아니라, 아니 얘야? 어디 가니? 아직 세포의 7년 주기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흠. 친구들과 헤어져 전철을 타고 오면서 떠올랐던 생각을 아이에게 쏟아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나의 변명 아닌 변론이 먹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과거의 내가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따위는 잊자. 그게 정신건강에 좋다. 이래 놓고 금방 다시 과거의 나를 탓한다. 과거의 나야, 도대체 뭔 말을 그리 한 거냐. 그랬다가 금방 다시 도리질을 친다.
나 혼자 정신 승리를 하는 건 좋다. 하지만 문제는 내 말을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남들은 기억한다는 거다. 왜 나만 이리 기억력이 소멸되어가고 있는 걸까. 친구들 말처럼 치매인가. 치매환자가 가족인 사람으로서 이런 관용적 표현은 거부감이 있지만... 아무튼 그건 아직 아닌 것 같은데. 새로운 정보를 저장하기 위해 필요 없는 정보를 잊는 효율적인 뇌님께서 열심히 활동하신 결과일까. 그렇다면 그 새로운 정보를 꺼내보아라. 그게 뭔지도 나는 기억에 없다. 뇌가 콩알 딱지만 해진 기분이다.
점점 몸은 거대해지고 뇌는 비루해지는구나. 뭔가 90년대에 말하던 미래 인간 같다. 인공지능 덕에 작아진 뇌, 컴퓨터만 두드려서 길어진 손가락, 컴퓨터 앞에만 앉아 몸을 움직이지 않아 배만 나온 미래 인간. 하핫. 이렇게 나는 미래 인간이 되었다. 뭐라도 되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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