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 열차 여행을 떠나기엔 뒤늦은,

by 유이경
왜 다른 나라에서 현관문 같은 사소한 것에 유혹을 느낄까? 왜 전차가 있고 사람들이 집에 커튼을 달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장소에 사랑을 느낄까? 그런 사소한 [또 말 없는] 외국적 요소들이 강렬한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 터무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다른 삶에서도 비슷한 반응 양식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중, p106-109





몇 년은 뒤늦게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는 여행 예능(2019년 방영)을 보았다. 있는지도 몰랐던 그 기차가 그렇게 타고 싶어졌다. 그것도 매우 격하게. 이래저래 해외여행을 몇 년 쉬었더니 더 감정이 격렬해졌나 보다. 아주 방송을 볼 때마다 환장을 한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고향에서 충족되지 못한 갈망 때문에 이러는 건지는 확실히 모르겠으나 나도 외국의 사소한 것에 눈이 돌아간다. 돌아간 눈으로 본 예능을 또 복습하면서 이루어지기 힘든 꿈이 생겨버렸다. 횡단 열차 여행을 하는 꿈 말이다.



우선, 이 열차는 러시아에 있다. 그렇다. 러시아. 전범국가 러시아.

변하지 않는 이 사실을 제외하고 생각해 보더라도 힘들다. 누군가와 함께 열차를 타고 싶은데 확실한 건 그게 남편은 아니다. 남편은 격하게 열차 여행을 하고 싶어 하는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걸로 땡! 딸은 타보고 싶단다. 음... 넌 좀 더 많이 커야 돼. 거기 가서도 네 수발을 들 순 없어.


만만한 건 친구들인데 친구들이나 나나 아이들을 놔두고 며칠씩이나 집을 비우기 힘든 상황이다. 아이가 없거나 결혼을 안 한 친구들을 떠올려 보아도 상황이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없다. 남편이 반대할 게 딱 보이거나 일 때문에 오래 쉴 수 없거나 다 그렇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나이를 더 먹고 가이드를 끼고 패키지여행을 가는 걸까. 그 나이는 되어야 다들 시간이 되니까? 아 갑자기 슬퍼진다.



몇 달 전 친구라는 관계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진짜 지금 내 친구는 누구일까. 친구라는 이름으로 미련을 떨며 붙잡고 있을 뿐 이제 친구가 아닌 건 아닐까. 일 년에 한두 번 통화만 하고 얼굴 본 건 몇 년이 지난 관계들. 그럼 이제 내게 남은 사람은 누구인가. 이런 이야기를 엄마에게 슬쩍했다.

"지금은 그렇지. 애들 키우느라 바쁜 나이잖아. 좀 지나면 다 만나. 다 연락 와. 엄마도 그랬어."


자라면서 내 친구 엄마들이나 동네 아주머니들 말고 엄마의 원래 친구분을 만나본 건 한두 번 밖에 없었다. 엄마의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던 엄마의 친구분들. 그 친구분들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엄마 말대로 어디선가 연락처를 알아내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에 어떻게들 그렇게 연락이 된 걸까. 아무튼 그때부터 엄마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패키지여행을 다니기 시작하고 온갖 동창회 모임을 나가기 시작했다. 엄마가 겪은 것처럼 나도 그렇게 될까?



러시아가 전범 국가라는 점은 둘째 치고, 친구들이 나처럼 열차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할지 여부는 셋째 치고, 내가 실은 심하게 멀미를 하는 사람이라는 건 무시하고, 혼자서 계획을 세워본다. 내가 열흘 정도는 훌쩍 떠나 있어도 상관없을 아이 나이를 따져보다 보니 내 나이도 쉰이 넘어간다. 쉰. 생각도 못해 본 나이인데(마흔은 마흔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나이에도 생각하던 나이인데 왠지 쉰은... 쉰은...). 그 나이에 나는 어떤 체력을 지니고 있을까. 그때에 내가 그런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그래서 엄마들이 패키지여행을 떠나는 거일 텐데. 쉰에는 어떤 유형으로 여행을 떠나나. 패키지까지는 아니더라도 편안한 호텔을 원할 나이려나. 이건 나의 편견일까. 음... 가까이에 있는 쉰이 넘은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그 사람은 이미 내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땡!을 받은 사람이라 물어보나 마나다.



요즘 함께 보기 시작한 유럽에서 텐트 여행을 하는 여행 예능을 보면서는 이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텐트 치고 밥 해 먹고 설거지하고 텐트 걷고? 아휴, 딱 귀찮다. 반면 열차 여행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누워 있다가 창문 밖 보다가 식당칸 가서 밥 먹고 돌아와서 커피 마시며 수다 떨다가 음악 듣다가 졸리면 낮잠도 자다가 깨면 컵라면 하나 꺼내먹다가 하면 된다. 정차역에서 잠시 내려 간식도 사 먹고 헛둘헛둘 스트레칭도 하고. (어라, 쓰고 보니 아무것도가 아니네.) 마음껏 늘어져도 되고 마음껏 게을러도 좋다. 그런데 바깥 풍경은 계속 바뀌고 정차역의 분위기도 계속 바뀐다. 풍경도 정차역도 열차 안도 이국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많은 곳을 다니는 것보다 어딘가에 박혀 있는 걸 선호하는 나에게 완벽해 보이는 여행이다.


그럼에도 둘째 치고, 셋째 치고, 무시한 것들이 너무 크다. 나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혹시나 나와 여행을 떠나 줄지 모르는 친구의 여건을 고민하고 내 나이를 우려하는 건 사실 멀리 간 이야기다. 우선은 둘째 치고부터 해결해봐야겠다. 이런 열차가 러시아에만 있는 건 아닐 테니. 아, 좋은 책이 있다. 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익스프레스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꼭지마다 정말 작가가 열차를 탄다. 그것도 아주 세계적인 스케일로. 그 책을 다시 꺼내봐야겠다. 이렇게 참 책이 유용하다.



사진 출처 : 시베리아 선발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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