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각자가 감당해야 할 제 몫의 생명 유지 활동(집안일)을 이러저러한 이유로 '주부'라 불리는 집안의 한 사람에게 몰아주고 나머지 구성원들은 그렇게 얻은 시간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시스템을 우리는 '가족'이라 부른다.
정아은,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휴대폰의 가장 최근 메모를 열어보니 굵은 폰트로 적힌 '장'이란 제목이 보인다. 내용은 '달걀, 양지, 대파, 도토리묵, 시금치'. 여타 설명은 없다. 제목도 내용도 직관적이고 단순하다. 이 메모 자체에 불만은 없다. 여전히 장을 볼 때면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확인하는 엄마보다 편리하게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오늘 적은 이 '장'이란 최근 메모와 같은 제목의 메모들이 전체 메모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는 건 문제다.
휴대폰의 메모를 열어보면 그 사람이 어떤 하루를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장을 보고, 장을 보고, 아이와 엄마를 케어하고, 장을 보고, 글감을 적고, 장을 보고, 책을 읽고, 장을 보고, 장을 본다.
장이란 게 비단 먹을 것만 사는 게 아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참 많은 물건을 사용하며 산다. 처음 혼자 살게 되면서 온갖 용품들을 새로 장만해야 했을 때가 기억난다. 나름 야무지게 마트를 다 쓸어왔다고 생각했는데도 며칠에 한 번씩 없는 물건이 생겨났다. 아, 손톱깎이가 없구나, 아, 건전지가 없네, 아, 병따개가 없네, 아, 아, 아. 온갖 소소한 물건들을 다 갖추는 데에 근 한 달은 소요된 것 같다. 그 한 달을 겪으면서 인간과 물건과 소비에 대한 회의가 생겼다. 인간은 물건의 노예인가. 자본주의가 만드는 생산과 소비의 쳇바퀴 사이에서 성실하게 물건을 사고 쓰면서 가끔은 멈춰 서서 참 질린다 싶다. 그건 혼자 살 때에도 지금 세 가족의 살림을 맡아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니, 장을 보는 횟수도 질리는 횟수도 세 배는 늘어났지.
함께 사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사야 하는 것들이 늘어났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인간들이 가족의 구성원 대부분이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 집은 세 가족 모두 집에 있는 시간이 길다. 하루에 두 끼에서 세 끼를 집에서 먹고, 하루의 반나절 이상을 집에서 생활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계속 채워 넣어야 하는 물건들의 주기가 짧다. (주기적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그래서 내가 계속 장을 봐야 하는 물건들의 목록을 작성하면 순번이 몇 번까지 이어질까.)
그렇게 주기가 짧은 온갖 물건들-음식들 포함-을 집 앞 마트에서 사고 근처 생협에서 사고 이런저런 전문매장에서 사고 인터넷에서 사고(이게 그냥 하나의 인터넷이 아니고 그 안에서 또 하나의 세상이 펼쳐지고 끝도 없이 쇼핑몰이 있고...) 대형마트에서 사고 사고사고 끝도 없이 산다. 인간 세 명분만 있는 것도 아니다. 고양이 한 마리도 꽤나 이래저래 필요한 게 많다. 이렇게 사대는데도 남편이 한 번씩 나를 부른다. 여보, 휴지 다 떨어져 가, 여보, 비타민D 다 먹었어, 여보, 로션 다 썼어, 여보, 콩이 츄르 다 먹었어.
가족의 집안일을 책임지기 전까지는 몰랐다. 집안일의 반은 장보기라는 걸 말이다.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많이 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봤자 나는 보조, 책임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보조일 뿐이었다.
어릴 적 엄마의 장보기를 돕던 때를 생각해 보면 요즘의 나는 정말 물건들에 지배당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엄마가 장을 보던 루트는 동네 시장, 동네 마트, 1년에 두어 번 가는 동대문이나 남대문시장이었다. 엄마가 사던 물건들의 품목들 순번을 매기면 지금 내가 사는 것들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먹거리만 해도 엄마 때랑 비교하면 참 다양하다. 다양한 걸 먹고 싶어 하는 입맛에 맞춰 이런저런 것들을 사야 하니 먹거리만 해도 동네 마트나 시장에서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많다. 아이 물건들만 해도 얼마나 다양한지. 해야 하는 것이 복잡해질수록 장보기는 머릿속을 괴롭히는 노동이 되어간다.
나만을 위한 물건들을 사는 쇼핑을 하던 시절, 얼마나 기꺼이 인터넷으로 수많은 상품 비교와 가격 비교에 열을 올렸던가. 그래도 피곤한 줄 모르고 괜찮은 거 샀다고 얼마나 뿌듯했던가. 그런 뿌듯함을 샴푸나 세탁 세제를 사면서 느낄 리가. 대강 평 좋은 상품으로 정해두고 계속 사던 것들이 품절이 되거나 더 이상 판매를 하지 않는다고 할 때의 타격이란. 다시 다른 상품을 찾아 헤매야 한다니.
주변 다른 사람들은 집안일에서 요리가 지긋지긋해진다던데, 나는 요리 보다 장 보는 일이 제일 힘들다. 미니멀리스트가 되면 나아지는 걸까. 그냥 간소하게, 그냥 집 앞 마트에서 파는 물건으로만 살면 되는 걸까. 아니면 알아서 주기적으로 주문, 배달되는 시스템을 더 애용해야 하는 걸까. 아니, 우리 가족의 생명 유지 활동을 이렇게 내가 다 맡아하는 게 맞는 걸까. 맞고 틀리고는 없다고 치면 그럼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할까. 엄마가 들으면 웃을 이야기다. 엄만 오죽하겠냐, 그 짓을 아직까지 하고 있는데.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여기서 질문, 여러분들은 어떻게 쇼핑을 하고 계신가요. 나만 장 보는 게 버거운 건가요, 그런 건가요. 갑자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