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성장해야만 합니까

by 유이경
... 반성하고 성장하는 것이 내 특기라나 뭐라나. 잘하는 것이라곤 그 둘뿐이다. 그나마라도 그럭저럭 해내고 있으니 천만다행 아닌가. 그렇게 자위하며 살았다. 돌이켜보니 거기서부터 문제였다. ...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내 비극의 출발이었다.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다는 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것을.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작가의 말 중에서 p266-267



친구가 주말에 다녀온 수업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한두 푼도 아닌 꽤나 비싼 수업료를 내고 선생님들이 자기 계발을 위해 열심히 수업에 참가한다고 존경스럽다고 했다。 요즘엔 이렇게 짬짬이 시간을 내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너도나도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한다。 배운다。 뛰어든다。 나이도、성별도、직업도 상관없이 다들 참 열심히 산다。 요즘 학생들은 우리 때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하고、요즘 젊은이들은 우리 때보다 취업한다고 공부도 커리어도 쌓느라 바쁘고、요즘 직장인들은 더 나아가기 위해、혹은 불안한 일자리 때문에 예전보다 학생들처럼 노력하고、주부들은 가만있는 게 뒤처지는 거 같아서、불안해서 무언가를 시작한다。 생각해 보니 전 세대가 참 열심히도 산다。 단지 먹고살기 위한 건 아닌 것 같다。


뒹굴거리면서 <더 글로리>를 정주행 하다가 열어본 인스타그램에도 이런 사람들 천지다。 괜히 피드 살펴봤다 싶다。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를 뭐라 하는 것도 비교하는 것도 아닌데 불안해진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죄책감。 하루를 마감하는 밤이면 바쁘게 산 날에도 널널하게 산 날에도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들이찬다。 아무것도 안 하는 날도 있는 거지、쉴 땐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거야、하고 호기롭던 마음은 쉽게 사그라든다。


이런 성장 강박증은 언제부터 우리 주변을 휩쓸기 시작한 걸까。 사실 강박에 쫓겨 무언가를 이룬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피니시 라인이 있는 직선 길이라 생각하고 뛰지만 알고 보면 쳇바퀴 안이라는 걸 깨닫는 날이 올까。 우선 나부터도 힘든데。


아이를 낳고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시작한 책모임에서 다양한 분들을 만났다。 그중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책이라도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오신 분들이 꽤나 있었다。 내가 이렇게 그냥 있어도 되나。 아이를 키우는 일、집안일을 책임지는 일은 무언가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니。 아이 키운다고 멈춰있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할 텐데 성장해야 할 텐데、그럼 우선 책부터라도 읽어볼까。


그런 비슷한 마음으로 나는 글을 쓰고 있었다。 첫 시작은 아니었다。 결론 나지 않는 응어리를 풀어내고 싶어서였다。 뱉어내면 속이 시원해질까 싶어 시작한 글이었다。 하지만 그 한풀이 같은 글들을 쏟아내고나서부터 달라졌다。 한풀이는 이 정도면 충분하니 이젠 좀 성장해야지。 원고로 만들고 투고를 하고 책을 만들고。 이제 첫 책이 나왔으니 다음 글은 무얼 해야 하나。 그전 글에서 반성할 건 반성하고 그걸 발판 삼아 성장해야지。 정지아 작가의 말처럼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다잡는다。 아직 정지아 작가처럼 진심으로 깨닫지는 못했으나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다는 것”을 머리로라도 계속 기억하면서 살아가자고。 바쁠 것 없다고 천천히 가도 된다고 실패해도 괜찮다고。 아이에게는、남에게는 잘도 이런 이야기를 해대면서 정작 나 자신에겐 다른 잣대를 들어대던 내게도 자꾸 들려줘야 할 말이다。



사진: UnsplashMulya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