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자신의 세계에는 본 적 없는 우아하고 맑은 여자를 보고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자도, 여자의 집에서도 그를 원하지 않자 남자는 오기가 생겼고 열 번 찍어 나무를 넘어뜨리는 게 남자라는 그때의 시대상에 충실하게 계속 찍어댔다. 남자는 종내 여자와 결혼까지 하게 됐다. 이게 남자와 여자의 딸이 여자에게 들은 러브스토리의 전부다.
결혼 후 남자는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의 우아함 때문에 때때로 꼭지가 돌았다. 여자는 한결같았지만 남자는 자격지심 때문에 여자가 자신을 깔보는 거라 생각했다. 꼭지가 돌면 주먹이 돌고 여자는 날아갔다. 다음날 밤이 되면 남자는 술에 취해 들어와 여자에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렀다. 그러면 여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딸은 그 미소의 의미를 모른다.
딸은 고등학생이 되고부터 일주일만 엄마의 몸과 자신의 몸을 바꿨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엄마의 연약함 때문에 아빠가 더 마음대로 휘두른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아닌 아빠를 닮은 딸은 살인이 나더라도 끝장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링에 오르려면 딸이 아닌 사건의 당사자, 아내여야 했다. 그래서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을 다 커서 그렇게도 바랐다.
연약한 엄마를 지켜주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빠와 헤어지지 못하는 엄마를 속으로 비난했던 딸은 이제와 생각한다. 그때 엄마가 아빠와 헤어졌더라면, 도망쳤더라면, 가족들이 뉴스에 나오는 기사가 되었을 거라는 걸. 일차로 처가로 달려가 잡히는 대로 사람들을 두들겨 팼을 거라는 걸. 그리고 잠적한 아내와 아이들을 기어이 찾아내 식칼을 들고 문을 두드렸을 거라는 걸. 그걸 모를 리 없었던 엄마가 혼자로도, 아이들을 데리고도 도망칠 수 없었다는 걸. 딸은 이제야 이해한다. 아빠의 집착과 복수심을 어느 정도 물려받은 딸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딸은 학대받는 아이들, 학대받는 아내들이 등장하는 이웃을 돕자는 캠페인을 무심히 넘길 수가 없다. 감옥 같고 지옥 같았던 세월을 살아가는 동안 그 사실을 아는 어른들도, 모르는 어른들도 어느 하나 손을 내밀어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하는 말에 더 커나갔던 고통에 대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렇다고 돈 몇 푼 보내는 것 외에 달리 하는 것도 없다. 하지만 항상 그런 사연을 보면 운다.
거울을 본다. 딸은 거울 속에서 아빠와 똑 닮은 자신의 얼굴을 본다. 젊을 때에는 젊었을 적 아빠와 닮더니 이제 나이가 드니 나이 든 아빠와 닮았다. 숱이 많던 눈썹이 이제 앞쪽만 몽당 남아버린 아빠의 눈썹이 희한했는데 어느새 딸의 눈썹도 끝부터 없어지고 있다. 흰머리가 일찍 나기 시작하는 것도 아빠를 닮았다.
딸은 사는 내내 왜 자신은 엄마가 아닌 아빠를 닮았는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원망을 했다. 대부분은 거울을 보며 아빠를 닮은 자신의 눈과 눈썹과 입에게 화를 냈다. 아이를 키우면서 딸은 왜 자신은 엄마가 아닌 아빠를 닮았는지 다시 한탄한다. 아이에게 과하게 소리를 지르고 신경질을 내고 나면 자식들에게 소리 한번 지르지 않았던 언제나 우아했던 엄마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심리 상담을 배워볼까 생각했던 딸은 자신에게 무리라는 걸 깨닫는다. 아직 자신 안에 쌓인 화가 남에게 넘칠 수 있음을 안다. 딸은 자신부터 심리 상담을 받아야겠다 생각했다. 몇 달간의 심리상담이 끝났고 딸에게는 상담가가 해준 말이 남았다. "그런 일을 겪었는데도 지금 충분히 잘 살고 있잖아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예요. 정말 잘한 거예요." 몇 달 동안 상담하면서 울지 않았던 딸이었다. 그날은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딸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디에선가 자신처럼 옛날 일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리고 지금 벌어지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그리고 결코 보내지 못할 아빠에게 쓰는 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