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지도 못할

by 유이경


넘어졌다. 그것도 퍽하고 소리 나게. 울퉁불퉁한 길바닥에 무릎을 제대로 박았다. 금세 바지에 피가 스며 나왔다. 피를 보자마자 고개를 돌려 아빠를 찾아봤다. 좀 전에 나와 작별인사를 한 아빠는 제 갈 길만 바쁘게 잘도 가고 있었다. 뭐가 좋다고 배알도 없이 뒤도 안 돌아보는 아빠 뒤통수를 쳐다보다가 볼썽사납게 넘어졌을까. 일곱 살의 나에게는 그 답이 없다. 길은 아빠와 나 둘 뿐, 비어있었다. 사방은 조용한데 무릎은 심장이라도 뛰는 양 두근두근 시끄럽다. 아빠가 금방 길을 따라 사라질 것만 같은 순간. 금방이면서도 길게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빠를 부를까. 아빠를 부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




결정을 내렸다. 바지를 올려 무릎을 살펴보니 피가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입은 악다물고 눈물은 삼키고 가던 길을 다시 가야 한다. 이미 아빠는 성큼성큼 내 눈 앞을 벗어났다. 조금만 가면 유치원이니까. 가는 거야, 괜찮아.




유치원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 피로 얼룩진 무릎을 닦아냈다. 휴지로 꾹 누르니 이제 피는 더 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나와 유치원 입구 데스크에 놓여 있는 눈깔사탕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꺼끌꺼끌한 표면이 혀 안을 간지럽힌다. 입 안에서 이리저리 굴려 표면이 금세 맨들맨들해졌다. 괜찮아. 입 안에 녹아 흐르는 달콤함이 내 마음을 다독여준다. 이것만큼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도 없다.




유치원이 끝나고 여느 때와 같은 날을 보낸다. 엄마는 아빠가 먹을 찌개와 반찬을, 그리고 세 아이가 먹을 국과 반찬을 따로 만드느라 바쁘고, 오빠들은 도화지로 총집을 만든다고 바쁘다. 나는 무릎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오빠들 옆에 스윽 조용히 스며들어 함께 내 것도 하나 어설프게 만든다. 오빠들과 다 만든 총집을 허리에 차고 장난감 총을 하나씩 들고 이리저리 쏴대며 소란스럽게 뛰어다닌다.




곧 저녁이 되고 아빠가 돌아온다. 엄마와 우리들은 현관 앞에 일렬로 서서 구십 도 인사로 아빠를 맞이한다. 엄마는 황급히 밥상을 차려내고 우리는 조용해진다. 한 상 가득 저녁이 떡하니 차려져도 아빠에게는 그다지 소용이 없다. 게걸스럽게 먹다가도 뭐라도 마음에 턱 걸리면 엄마가 오후 내내 만든 음식은 방 안 이곳저곳으로 날아가 버린다.








며칠 지나지 않아 언제나 그렇듯, 별 일도 아닌 일이 별 일이 되어 대문 밖으로 내복만 입은 채 쫓겨났다. 대문 창살을 붙잡고 문 열어달라고 엉엉엉 울었다. 이층 높이 현관에서 아빠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돌계단을 끌려 내려왔을 때에도, 날 밀어내고 대문을 쾅! 닫았을 때에도, 아빠가 그대로 나만 두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에도, 나는 왜 그리 배알도 없이 아빠를 찾아댔을까. 아이는 어떻게 해서든 부모를 사랑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본능적인 감정에 죄책감을 가지게 하는 부모도 있기 마련이다. 그때에는 그걸 몰랐다. 아직 봄이 채 오지 않은 늦겨울이었다.




한참을 덜덜 떨며 울고 있는데 집 앞 미용실 아주머니가 나를 미용실로 데리고 갔다. 이러다가 아빠가 보면 큰일인데 걱정이면서도 따라 들어갔다. 쭈뼛거리며 서 있으니 아주머니가 난로 위 주전자에서 따뜻한 물을 따라주며 앉으라 권했다. 물을 더듬더듬 마시고 나니 손에 눈깔사탕 하나를 쥐어주었다. 바스락 비닐봉지를 벗겨 사탕을 입에 넣었다. 꺼끌꺼끌한 표면이 입 안을 굴러다니며 사르르 녹아내린다. 추위나 두려움보다 더 큰 부끄러움도 살짝 녹아내린다.








아빠와 집을 나선다. 나는 유치원으로, 아빠는 회사로 가야 하는 아침시간이다. 오 분 정도 함께 걸으면 헤어지는 곳에 다다른다. 얼마 전 내가 넘어졌던 곳이고, 아빠에게는 그저 나와 작별인사를 하는 곳이다. 아빠와 작별인사를 하고 아빠는 길을 건너가고, 나도 길을 간다. 잠시 멈춰서 돌아본다. 아빠는 앞만 보고 갈 길을 씩씩하게도 걸어간다. 부르지도 못할 ‘아빠’ 소리를 마음에 담아두고 나도 다시 앞을 보고 걷는다. 이제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