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나간 녀석이 저녁나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큰오빠와 수다에 빠져 내가 아무리 발을 동동거리며 물어봐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엄마는 그저 '아까 돌아왔다'는 무책임한 말만 뱉었다. 거기에 대고 집안 어디에도 없다고, 돌아오지 않은 거 같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큰오빠도 내 이야기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대문을 열고 내다보고 다시 계단을 올라와 현관문을 열고 들여다보고 엄마에게 또 물어보고 다시 내려가 대문을 열고 내다보고를 반복하다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다 대문 창살 사이로 언뜻 보이는 형체에 몸이 멈칫했다. 까만색의 고양이 다리였다. 바깥쪽의 까만색과 다르게 연하고 부드러운 안쪽은 하얀 털로 뒤덮인 익숙한 다리. 그 다리에 이어져야 할 몸통은 없었다. 누가 흘리고 간 닭다리처럼 길가에, 우리 집 대문 앞에, 우리 집 대문 창살 사이로 보이는 바로 그곳에 주변에 왜 있는지 모를 두세 마리 고양이 옆에 놓여 있었다.
다른 고양이들과 심하게 싸운 걸까. 다른 고양이로 추정되는 살점이 옆에 있었다. 피는 보이지 않았다. 내려가서 대문을 열어볼 수가 없었다. 시선을 황급히 돌려 다시 현관문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여전히 내 부산스러움에 관심 없는 엄마에게 큰소리로 물어봤다.
"엄마, 콩이 어디 있어? 엄마, 콩이 어디 있어?"
더 이상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닥치면 으레 그렇듯, 번쩍 눈이 뜨였다. 수없이 꿔왔던 다른 꿈들과 비슷했지만 달랐다. 콩이는 처음이었다.
처음은 아끼는 인형이었고, 그다음은 큰오빠와 키웠던 첫 고양이 루나였고, 그다음은 우리 집 첫째였던 고양이 순이, 그다음은 우리 딸, 딸이 좀 크고 나서는 다시 순이로 꿔왔는데 둘째 고양이인 콩이는 처음이었다. 나는 수십 년간 나의 귀엽고 소중하고 연약한 존재를 잃는 꿈을 꿔왔다.
표현되는 방식은 꿀 때마다 다르다. 아무런 단서 없이 그저 헤매고 다니며 찾아다니는 꿈, 숨은 그림 찾기처럼 거리 한가득 비슷한 고양이들 사이에서 내 고양이를 찾으려고 고군분투하는 꿈, 몸의 어딘가가 어제 꿈처럼 부서지거나 분해되거나 조각난 이미지로 나타나는 꿈 등. 항상 나는 나의 귀엽고 소중하고 연약한, 그래서 지켜야 하는 존재를 영영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외면하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왜 하필 그 처참한 배경이 되는 곳이 어릴 적부터 오랜 시간 살았던 그 집인지, 그 동네인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했던 그 공간의 그 시간들이 되풀이되는 것처럼 나는 결국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하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다가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한다. 꿈에서 깨어나는 것.
눈을 뜨자마자 방을 나와 거실에 있는 콩이에게 갔다. 평소엔 눈도 다 못 뜨고 정수기로 가서 물 한 잔, 커피 한 잔 마실 때까지 발에 채일 정도로 엉겨 붙어도 눈길이나 슬쩍 주던 내가 눈을 또렷하게 뜨고 만져주자 콩이는 이때다 하고 본격적으로 들이댄다. 하지만 그것도 길어야 일이 분. 일어나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잔 마시고 커피를 탄다. 그리고 딸아이 아침을 준비한다.
그사이 이제 둘째가 아닌 유일한 고양이가 된 콩이는 여전히 내 주변을 배회하며 더 놀자고 불러댄다. 엄마, 엄마, 엄마, 여기 봐! 엄마, 엄마, 나 여깄잖아! 아까처럼 더 만져줘, 엄마, 엄마! 정 많고 말 많은 성격답게 아침부터 말 참 많다.
단순하게 '야옹'이라고만 울지 않는 다양한 말속에 가끔은 '엄마'란 발음과 비슷한 발음이 들리기도 한다. 그럼 "그렇지, 이제 사람 말 할 때가 됐지. 좀 더 해봐, 엄마 뭐? 뭐라고?" 말 좀 더 해보라고, 인간하고 십이 년쯤 살았으면 말도 할 때 됐다고 구박 아닌 구박을 한다. 오늘 아침도 그런 구박으로 끔찍했던 꿈 한 자락을 날려버리려고 애쓴다. 그리고 어느날 우리에게 뚝 떨어져 어쩔 수 없이 키우게 된 아기 때부터 은근한 천덕꾸러기처럼 살아온 콩이가 이제 내게 큰 의미가 되었구나, 귀여워서 소중해서 잃을까 생각만 해도 슬퍼지는 그런 존재가 되었구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