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푸념이다. 야, 집어치워. 내 이야기에 친구가 한 말이다. 그럼에도 푸념이 걷히지 않고 안에 그득하다. 그래서 털어놓는다. 이건 이 글을 읽기 전 주의사항이다.
눈을 떴지만 아직 마음이 그대로다. 먼저 일어나 있던 남편에게 핀잔을 준다. 당신, 아주 신났더라, 어린 여자애가 그리 좋더냐? 남편이 반응한다. 뭐, 또 꿈꿨냐?
지난밤 꿈에 남편이 내가 알지도 못하지만 내 후배라고 하는 어리고 예쁜 여자아이와 바람이 났다. 남편이 그 여자아이에게 간지럼을 태우는 걸 보고 둘이 연애라도 하냐 라고 한 마디 했더니 여자아이가 양심에 걸린 듯 바로 울상이 되어버리는 통에 걸려버렸다. 이 이야기에 남편이 웃지도 않고 말한다. 바보냐.
나는 종종 꿈을 심하게 꾼다. 꿈에서 남편이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 마음이 깨어나서도 풀리지 않아 남편에게 화내기도 한다. 내가 꿈의 남편에게 느끼는 감정은 매우 격정적인데 주로 “네가 어떻게 나한테!!” 뭐 이런 맨날 티브이 드라마에서 보던 감정이다.
드라마에서 이걸 심하게 느끼는 사람들처럼 나 또한 평소에(현실에서) 남편에게 이런 비스무리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어떤 부정적인 감정을 뼈에 무치게,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뭐 그런 식으로 느끼게끔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다. 남편과 십 년 넘게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이렇게 둘이 만난 지 이십 년이 다 되었지만 그래도 내 평가로 남편은, 괜찮은 사람이다. 무난한 사람이고, 본인 말에 의하면 착한 사람이다.
지인들이 주로 부러워하는 내 남편의 장점은 자기 관리를 잘한다는 거다. 매일 야근에 철야를 해도, 감기 기운이 있어도 꼭 운동을 한다. 시간이 너무 늦어 헬스장이 문을 닫는 시간이면 집에서 사이클이라도 돌리고, 동네에서 달리기라도 한다. 회식이라도 있어 운동을 쉬면 아침에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사이클을 돌린다. 지인들은 본인들의 남편 배 걱정에 내 남편을 칭송한다.
지인들이 끔찍하게 생각하는 그놈의 맥주캔 따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가 배를 부풀리는 밤이 온다. 우리 집에서도 그놈의 맥주캔 따는 소리가 들린다. 다만 우리 집에서는 밤마다 맥주캔을 따고 앉아 튀어나온 배를 두들기고 있는 사람은 남편 역할을 맡은 사람이 아닌 아내 역할을 맡은 사람, 나다.
아이를 재우고 나와 거실 티브이 앞에 앉는다. 좌상 위를 가득 점령하고 있는 아이 장난감을 슬슬 앞으로 밀어내 자리를 마련한다. 좁은 자리에 맥주캔, 유리컵, 컵라면, 젓가락을 세팅한다. 맥주캔을 촥 따서 쪼로록 유리컵에 거품을 8:2로 아름답게 따라낸다. 술을 마실 때 최고의 안주는 드라마다. 티브이와 넷플릭스를 연결해 요즘 빠져있는 드라마를 튼다. 하아. 기분 좋은 한숨이다. 술이 한 잔 두 잔, 라면도 한 젓가락 두 젓가락, 흥이 올라 티브이와 자꾸 대화를 시도한다. 이젠 아이도 좀 컸다고 자다 깨지도 않고 완전한 나만의 시간이다.
띠리릭, 남편이 들어선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참이다. 나 왔다. 왔어. 들어오는 남편과 눈을 비껴 쳐다보며 대답한다. 나쁜 짓하다 들킨 것만 같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운동하고 오늘도 충실히 하루를 살아낸 남편의 모습은 훌륭하다. 나라고 오늘 하루 열심히 안산 건 아니지만 내가 작아지는 기분이다. 아내들이 그렇게 흉을 보는 남편의 모습을, 지금 내가 막 운동을 하고 들어선 남편에게 보여준다. 추레한 티셔츠와 무릎 나온 츄리닝 바지, 번들거리는 머리를 앞에서부터 쫙 붙여 묶은 머리를 하고 아이 장난감을 슬쩍 밀어낸 지저분한 상 위에 맥주와 라면을 늘어놓고 티브이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다. 감추고 싶은 모습 삼종 세트다. 남편은 내가 무얼 하건 마시던 먹던 흉을 보는 사람이 아니다. 남의 인생에 관여하고 판단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편한 마음이 나아지는 건 아니다. 하루의 스트레스를 푸는 완벽한 시간에 균열이 일어난다. 스트레스가 얹혀진다.
흔히 우리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남편을 쥐고 사는 거 아니냐고 한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내가 항상 하는 소리가 있다. 내 고집을 항상 꺾는 사람이 내 남편이라고, 내 남편처럼 독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눈에 보이는 것처럼 순한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남편에게 진다.
남편은 마음을 먹으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사람이다. 계획대로 본인을 움직이지 못하면 어떻게 해서든 보충을 한다. 일을 끝까지 하지 않는다면 그건 자신이 이 일은 끝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경우일 뿐이다. 몸이 피곤하고 아픈 것은 핑계다.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라는 걸 잘 아는 사람이라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관여를 하지 않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한 사람이다. 나 자신을 마음대로 하는 게 제일 어려운 사람인-한 마디로 의지박약인- 나는 그런 남편이 대단하면서도 불편하다. 아니, 재수 없다.
남편 앞에서 삼종 세트를 안 하면 되잖아. 내 나름의 변명을 해보자. 피터킴의 <시작노트>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사용하고 바로 드라이기를 정리하지 않는 아내를 보고 “내 집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도 못하면 어디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딱 여기에 있다. 집. 내 집. 우리 집.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 누구 신경 쓰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지인들이 남편 흉을 볼 때가 있다. 같이 살 때 불편한 점들, 갈등들, 남편들은 왜 이래라고 하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우리 집에서는 그 행동들을 담당하고 있는 건 남편이 아니라 나이기 때문이다. 철이 없다고, 큰아들 키우는 기분이라고 하면 다들 공감하는 분위기다. 우리 남편은 내가 키우지도 철이 없지도 않다. 그냥 혼자서도 잘하고 잘 사는 완성형의 인간이다.
이 대단한, 어찌 보면 완벽한 남편을 왜 나는 재수 없다고 자조할까. 이런 마음인 거다. 수험생일 때 다 같이 에라 모르겠다 심정일 때에도, 막 시험이 끝난 시기여서 놀다 죽자 분위기일 때에도 혼자만은 꼿꼿이 자리 지키고 앉아 공부하는 친구를 볼 때의 마음. 그 친구는 자기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주 훌륭한 학생일 뿐인데 나도 모르게 그 친구를 은근히 미워하고 있다. 그런 친구가 내 옆에 이십 년이나 붙어있는 거다. 내 열등감과 자괴감을 자극하면서.
그래도 철없는 큰아들 키우는 것보다 완벽해서 짜증 나는 남편과 사는 게 낫다는 걸 나도 안다. 이런 게 일상의 가장 큰 불만일 만큼, 그래, 난 별 일 없이 산다. 참, 편하게도 산다. 주변에서도 그렇게 보이나 보다. 여유로워 보인다고, 편해 보인다고. 그 말에 나는 답한다. 난 어릴 때 인생의 불행을 다 겪었나 봐, 초년운이 지랄 같더니 중년운부터 피었나 봐라고. 물론 어릴 때에도 젊을 때에도 지금도 계속 불행이 끝이 보이지 않는 삶들이 있다. 권여선 작가의 소설 <레몬>에 “끔찍한 무엇을 멈출 수 없는” 삶 이야기가 나온다. 내 의지로 멈출 수 없이 끝을 알 수도 없는 불행이 이어지는 삶들이 있다는 걸 안다. 알지만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마다 불행의 총량이라는 게 있을 거라고, 내 불행은 끝났다고. 삼십 년을 넘게 괴롭히던 불행도 끝장내지 못한 내 무한 긍정력이 그렇다고 말한다. 나는 이제 행복하다고. 내 완벽한 남편 때문에 하루의 완벽한 마무리에 스트레스가 얹혀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완벽하게 행복한 거라고, 이건 그냥 내 푸념인 것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