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워서 똥을 피하다

by 유이경

지하철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 물론 그냥 병이 있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얼마 전 일이다. 아이들과 아이들 엄마들과 외출을 했다. 전철을 갈아타기 위해 플랫폼에서 다음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아이 엄마가 쿡쿡 찌른다. 언니, 저 사람 봐. 젊은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눈을 치켜뜬 채로 아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 병이 있는 분인가 보네, 하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전철이 도착해 아이들과 전철을 탔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를 따라 탔다. 옆 칸 쪽에 서 있었는데 굳이 우리 칸으로 와서 탔고, 우리가 서로 눈짓하며 움직이는 전철 안에서 다음 칸으로 이동하자 뒤를 쫓아왔다. 그래서 또 다음 칸으로 이동하자 또 바로 쫓아왔다. 우리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참이어서 차량의 앞 쪽에서 멈췄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같은 칸의 다른 내리는 문 쪽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눈을 치켜뜬 포즈로 우리 아이들을 계속 노려 봤다. 곧 우리가 내릴 정거장에 도착했고 문이 열렸다. 우리는 일부러 잠시 서 있다가 갑자기 아이들을 몰고 확 내렸다. 내려서 출구로 뛰어가는데 미처 못 내린 그 사람이 닫힌 문 창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은 무슨 일인지 모르고 그저 뛰는 게 좋아 낄낄거렸고 엄마들은 전철이 떠나는 걸 보고서야 불안한 기색을 없앴다.



그 사람은 그냥 환자였을 뿐이고 아이들이 좋아서 쳐다봤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가 불안해한 것처럼 정말 불안한 사람이고 아이들과 우리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쳐다보고 쫓아온 것일 수도 있다. 우리 엄마들은 아이 앞에 힘없는 약자일 뿐이다.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기에도 버겁고 아이를 보호한 채 맞서기에도 버겁다. 불안정한 사람을 마주치면 아이에게 위협이 될까 불안한 마음으로 입을 다물고 피하기에 급급하다.




영화 <목격자>를 보면서도 똑같은 마음이 들었다. 살인자가 여자가 사는 아파트 안에서 칼을 들고 여자와 아이를 쫓아온다. 여자는 아이를 안고 계단을 뛴다. 내가 과연 저럴 수 있을까, 얼마나 도망칠 수 있을까. 급박한 상황이면 뭐든 못할까 싶으면서도 나는 내 체력을 믿지 못한다.



<목격자>에서 주인공인 남자도 마찬가지다. 살인자가 자신이 누구임을, 자신의 집이 어디임을, 자신의 아내와 아이가 누구임을 안다는 것 때문에 미친 듯이 괴로워한다. 영화에서 수도 없이 변주되는 것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건 크나큰 약점이 된다. 더군다나 그 사랑하는 이가 자그마한 꼬맹이라면 불안함은 배가 된다. (아닌가? 사람마다 아닐 수도 있겠다.)



나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약자가 되는 기분을 여자는 임신하면서 처음 느끼게 된다. 먹는 것, 입는 것, 걷는 것, 뛰는 것, 모든 걸 다시 생각한다. ‘내 한 몸쯤이야’가 통하지 않는 상황에 맞닥뜨리기 시작한다. 좁은 길에서 누군가와 부딪히는 것,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버티는 것, 사람 많은 곳을 뚫고 지나가는 것, 혼자일 때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일상에 “매사 조심조심”이 더해진다.



아이가 어렸을 때에도 그렇다. 아직 잘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뛰려고 하는 꼬맹이가 다칠까 아이를 지켜보면서도 주변을 경계한다. 아이를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사람을 보면 호의인지 악의인지 알 수 없어 언제라도 아이를 보호할 수 있게 동태를 살피고 있다.



간혹 이상한 사람을 만나면 예전과 다르게 쪼그라든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남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남의 불의를 보아도 정의감이 예전만 하지 못하고 입을 잠가 버린다. 혹시 한마디 했다가 저 사람이 나한테 앙심을 품으면 어쩌지, 저 사람이 내 아이를 기억하면 어쩌지, 저 사람이 우리 집을 알아내면 어쩌지, 생긴 지 칠 년쯤 된 불안감이 항상 정의감을 이긴다. 불안감은 공포를 불러낸다.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는데 점점 무서워서 피하게 된다.



세상이 변했다고들 한다. 엄마는 몇 년 전부터 사람들 표정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한다. 길에 다니는 사람들 얼굴이 모두 굳어있다고, 그전에는 그러지 않았다고. 나도 달라진 걸 느낀다. 그전에는 속으로만 하던 생각을 이제 겉으로 꺼낸다. 다양한 의견 중 하나잖아, 이제 우리 이런 사회잖아, 하면서 잘못된 이야기들을 당당하게 꺼낸다. 서로 혐오하고 무시하고 깎아내리는 데에 익숙해진다. 그 안에서 공공연히 공격당하는 건 약자부터다. 점점 더 많은 빈도로, 점점 더 큰 목소리가 되어간다. 그 화살이 내게 오지 않기를, 내 아이에게 오지 않기를, 그저 웅크린다. 아이 엄마가 되고부터 아이와 다니면 어디에서나 눈치 보며 쪼그라들었던 이 마음이 약자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약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제야 살짝 발을 들인 느낌이다.



얼마 전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 인상적이었던 몇 문장을 따온다.


우리는 꽤 자주 누군가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해 거리에서 시선을 사용한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지적하듯,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다. 반면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


아이가 더 어릴 때 아이와 다니면서 느꼈던 시선들, 아이 입을 막기 위해 했던 행동들, 아이 엄마로서 이야기를 하거나 글을 쓸 때 나도 모르는 그 누군가가 화나지 않도록 스스로 검열했던 것들이 이 책을 읽으며 떠올랐다.



멀리 갔다.



사실 지하철에서 만났던 사람은 쉬운 상대다. 눈에 띄어도 너무 잘 띄는 상대 아닌가. 그런데 어디 진짜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인가. 이제 ‘아이’라는, ‘아이 엄마’라는 그룹에 속하게 된 내 아이와 나를 공격하는 건 이제는 일상화된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던지는 보통의 사람들, 인터넷에서 만나는 익명의 사람들이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람들이 말하는 맘충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지 않기 위해, 아니 아예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아이와 조용히 쉬쉬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조한다. 나도 ‘어른’인 사람인데,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에 한몫했을 ‘어른’인데도 이렇게밖에 말을 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이 글은 여기서 끝이다.





*** 또 소심한 나는 이 글이 공격당할까 봐 불안한 마음에 몇 자를 덧붙인다. 절대 잘못 행동하는 아이 부모들을 두둔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부모가 아닌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아, 굳이 이 사족을 붙이는 것 자체가 남들 보기에 약자가 아닐지라도 나 스스로를 약자로 옭아매고 있다는 증거다. 이것 봐, 또 굳이 누가 “네가 왜 약자야, 괜히 혼자 오버하네.” 할까 봐 “남들 보기에 약자가 아닐지라도”라고 쓰고 있다. 위에 언급한 책의 한 구절을 하나 더 인용하겠다. "우리는 아직 차별을 부정할 때가 아니라 더 발견해야 할 때다." 끝이 없다. 진짜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