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담을 잃고 불안을 얻다

by 유이경

장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당연한 논리를 아이를 키우면서 실감하게 되었다. 우리 애는 안 아프잖아, 우리 애는 그런 짓 안 하잖아. 이상하게도 이런 장담을 하고 나면 꼭 아이가 아프고 곧 그런 짓을 한다. 그냥 아플 때가 되고 그냥 그런 짓을 할 때가 되어서일 수도 있지만 몇 번 이런 일을 겪다 보면 아이를 두고 실험을 하고 싶어 지지는 않아진다. 그리고 몸으로 배우는 거다, 그 상황이 닥치면 장담과 다르게 어찌 될지 어찌할지 모른다는 인생의 교훈을.



이제 내게는 그만둬야 할 다른 장담이 있다. 우리 애 크면 그런 거 안 시킬 거야.



아이가 아직 꼬꼬마 아기일 때 막연하게 마음먹은 바가 있다. 자유롭게 키우겠다고, 주입식 교육 이런 거 말고, 호기심이 지식으로 연결되는 교육을 시키겠다고.



우선 유치원부터 고민했다. 숲 체험이 주가 되는 숲 유치원에 보내 뛰어놀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곳은 가까운 곳에 없었다. 그나마 숲 체험을 정기적으로 하는 유치원이 있어 보냈다. 그런데 막상 보내고 보니 내 아이는 그런 활동이 맞지 않는 아이였다. 다섯 살부터 나타난 콜린성 두드러기-급작스러운 체온 변화로 얼굴, 목, 머리 전반에 나타나는 두드러기- 때문에 아이는 야외 활동이 있는 날이면 붉은 반점으로 부어오른 얼굴과 머리를 긁느라 울상이 되었다. 다섯 살한테 숙제를 내주는 그런 유치원은 싫다고 우리 유치원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학교 입학을 앞두니 ‘지식’ 면에서 배움이 부족한 아이를 보고 살짝 불안이 스멀거린다.



초등학교를 혁신학교에 보내고 싶었다. 지금 사는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땅한 학교가 있었다. 막상 집을 보러 가니 그쪽 동네도, 집들도 왜인지 느낌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이사할 때 느낌을 중요시하는 인간이다.) 남편 처지에서는 어차피 같은 서울에 같은 아파트에 달라진 것 하나 없이 출퇴근만 더 힘들어지는 곳이었고 나도 아이도 외진 동네여서 여러모로 불편할 터였다. 친구 말대로 아이 학교만 포기하면 되는데, 초등학교는 다 비슷하다는데 뭘 이리 고집하나 마음이 약해졌다. 거기에 남편이 한 마디 얹는다. 그런 학교에 보내고 싶은 건 네 욕심이지 아이가 원해서가 아니잖아. 윽. 거기에 한 마디 더. 우리 아이는 성향이 일반 학교가 더 잘 맞을 거 같은데. 아, 그래, 다 내 욕심이었구나. 마음을 접었다.



한적한 곳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아이를 풀어놓고-개인가?- 키우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서울에서 굳이 사는 이유를 찾지 못하는 남편의 주도 하에 한참 타운하우스와 공동체 주택과 땅콩 주택과 기타 등등을 알아봤다. 서울 아파트 전세 값이면 우리가 찾아본 지역에서는 집을 짓거나 타운하우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래저래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에 아이 유치원을 옮기기가... 어쩌고 하는 변명을 지나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하는 시기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가장 이사하기 좋은 시기. 어디로 가야 하나. 남편은 다시 이야기를 꺼냈지만 나는 이제야 불안함을 토로했다.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동네의 어둠에 대해, 주택 일층에 사는 것의 긴장에 대해. 그 사항은 갑자기 튀어나온 것도 아닌데 이제야 변명으로 전면에 대두했다. 나는 그냥 이곳, 서울을 떠나기 싫었던 거다. 이미 익숙해진 동네, 이미 익숙해진 편안함을 굳이 벗어날 정도의 필요와 용기가 내겐 없었다. 대신 하나가 생겼다. 불안, 어둠이 아닌 아이 교육에 대한.



어느새 스며들었을까. 스멀스멀 불안사회에 동승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매일 숙제를 내주는 유치원을 더 이상 경악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내 마음이 언제부터 생겼을까.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말하던, 학교 들어가기 전 일곱 살 때에 가장 사교육을 많이 시킨다는, 엄마들이 불안해하는 시기라는 그 시기를 겪고 있기 때문일까.



학교에 입학하는 건 아이인데 나를 비롯한 엄마들이 더 불안해하고 있다. 그 불안의 정체는 “내 아이가 뒤처지면 어쩌지.”이다. 이건 공부 면에서도, 친구 관계 면에서도 그렇다. 다른 아이들이 다 아는 걸 내 아이만 모를까 봐, 친구들이 좋아하는 친구가 안되면 어쩌나. 아이는 짱짱한데 불안해하는 선배 엄마들을 보고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장담했던, 자만했던 나의 마음을 내가 배신하고 있다.



왜 이럴까. 나는, 나를 비롯한 엄마들은 왜 불안해하고 있는 걸까. 이런 마음은 사람들이, 소위 사회가 말하는 “아이 성공은 엄마가 만든다.”라는 신화, 명문대에 들어간 아이의 엄마가 저술한 아이 교육의 정답(!)을 적은 베스트셀러들에 힘입어 엄마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책임감, 아이가 “성공”하지 못하면, “어울리지” 못하면 엄마 탓이라는 화살에서 비롯된 것일 터다. 어떤 아이의 문제 사례를 들으면 다들 “엄마”를 찾는다. 엄마가 몰랐을까, 엄마가 교육을 어떻게 한 걸까. 예전부터 이어오던 “엄마 탓”이 언제인가부터 더 강화된 신화로 보통 엄마들을 공격하고, 그 보통 엄마들은 그대로 따르려 노력하면서 잘 쫓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고 아이를 탓한다.



이렇게 떠들면서 정작 나도 요즘 상가에 있는 학원들을 예전과 다른 눈길로 살펴본다. 이 수학 학원은 몇 학년부터 다니는 덴가, 이 논술 학원은 어떤가, 이 영어 도서관은 어떻게 이용하는 걸까. 학습 관련 전단지도 받자마자 버리던 걸 이제 제대로 읽어본다.



얼마 전 아이 학교 예비소집일이었다. 아이는 아직 말로만 들은 학교가 상상이 되지 않아 은근 학교 탐방을 기대했다. 같은 학교에 다닐 친구들이 한 교실 안에 그득하다. 이 중 어떤 아이들과는 같은 반이 되고, 어떤 아이들과는 친구가 되겠지. 학교에서 받아온 유인물에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무엇을 숙지해야 할지, 연습해야 할지에 대해 적혀 있다. 아이에게 너 학교 가기 전에 젓가락질도 해야 하고, 우유팩도 혼자 뜯어야 하고, 연산도 좀 더 알아야 하고, 시계도 볼 줄 알아야 하고, 줄줄이 늘어놓는 내게 아이가 말한다, 천연덕스럽게. “학교 가서 하면 되지~ 모르면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거 아냐?” 요즘 선생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짐짓 불안하지 않은 척, 태평한 아이의 말에 감화되어 “그러네~”하고 대꾸해준다.



새로운 일이 닥치기 전 그 실체를 모르는 채 기다린다는 건 호기심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공포와 긴장을 불러들이기도 한다. 그 공포와 긴장이 불안을 불러왔고, 내 불안을 아이가 한 번씩 정신 차리도록 잠재워준다. 불안과 태평이 널을 뛰는 요즘, 불안이 아이를 채찍질시키지 않도록, 그동안의 장담을 다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그 처음의 마음을 놓지 않기를. 그래서 아이도 나도 지치지 않기를. 나 때와 똑같이, 아니 더 심하게 아이들을 몰아세우는 이놈의 교육을 지긋지긋하다고 하면서도 똑같이 따라가지 않기를, 나는 그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