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구이, 말랑말랑한 나여도 괜찮아

by 유이경


엄마는 온몸이 말랑말랑해!


아이는 엄마 온몸이 말랑말랑거려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듯 해맑은 표정을 달고 말한다. 분명 아이는 나를 디스 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아이는 말랑거리는 내 팔뚝살을 조물 거리며 눈을 감는다. 마음의 평화를 불러오고 있는 듯하다. 아이는 내 팔뚝살에 이름을 붙였다. “말랑이”. 기분 좋게 노곤 노곤해진 표정을 보며 그냥 내 팔뚝살 이름이 “덜렁이”가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이가 말랑거리는 걸 좋아하는 건 내 살에서 끝이 아니다. 말랑말랑한 식감으로는 최고인 떡, 그중에서도 가래떡과 인절미를 사랑한다. 요새는 그냥 떡뿐 아니라 구워 먹는 떡에도 눈을 떴다. 쌀쌀해지는 날씨에는 떡구이지. 나의 엄마가 이런 쌀쌀한 날씨면 연탄난로에 떡을 구워주던 생각이 나 냉동고의 가래떡을 꺼냈다. 불 앞을 지키고 서서 동그랗고 긴 가래떡을 굴려준다. 골고루 익어라, 중얼거리면서 노릇노릇하게 팬 위에서 굴린다. 그러면 가래떡은 겉은 바삭하게 속은 말랑하게 변신한다. 아이는 떡구이를 과자 보다, 젤리보다 좋아한다.


아이가 내 말랑이에 대한 언급을 제외하고 내 살에 대해 이야기한 건 일곱 살이 처음이었다.

엄마 뚱뚱해.

말랑이라는 작명 센스처럼 이 언급도 아주 직설적이고 직관적이다. 이것도 디스 하려는 의도가 없는 걸까. 이번에는 아니다. 무언가 희한하고 믿을 수 없는 발견을 한 것처럼, 엄마는 어쩜 이렇게 살이 많아서 뚱뚱할까 신기해하며 (비)웃으며 말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보는 만화나 동화에 “뚱뚱”에 대한 개념이 부정적으로 스칠 때마다 편견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 것도 상관이 없나 보다. 내내 사람마다 자기에게 맞는 몸매가 있는 거라고,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냥 다른 거라고 이야기했는데도 아이가 내게 “뚱뚱해”라고 말하자 나는 바로 ‘나쁨’으로 받아들였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웃긴다는 듯 이야기한 아이는 편견이 생성되었고 알고 보니 나는(나야말로!!) 사라진 적이 없었다.


이 말을 내뱉은 아이의 일화를 주변 아이 엄마들에게 이야기했더니 바로 반응이 왔다. 자신의 아이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엄마 엉덩이는 세상에서 제일 커.”, “엄마 돼지 같아.”, “엄마 뱃살이 왜 이렇게 많아?” 뭔가 더 구체적이고 뭔가 더 기분 나쁘다. 일곱 살의 아이들은 이미 마른 것만 쳐주는 타이트한 세대의 눈을 가지고 있나 보다.


아이들의 엄마 외모 품평의 시기가 도래했다. 육아 선배들의 말이 맞았다. 다만 내 생각보다 조금 빨랐을 뿐. 아이들이 자신의 엄마의, 그리고 친구의 엄마의 외모를 품평하기 시작한다고, 살찌는 걸 안 좋게 생각한다고 이야기해줬었는데 아직은 아니라고만 생각했었다.


내 아이는,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뚱뚱한 건 웃기다, 나쁘다는 개념을 가지게 된 걸까. 아이의 사회생활 덕분도, 티브이 생활 덕분도 있을 것이다. 아이와 함께 만화를 보다 보면 뚱뚱한 캐릭터, 혹은 돼지 캐릭터는 대부분 부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전매특허처럼 식탐이 심하게 강하고, 못됐거나 이기적이거나 멍청하거나 이상하거나 자신감이 없거나 자존감이 낮거나 하는 특징들이 섞여 있었다. 아이가 사회에서 동떨어져 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부정하고 싶을 뿐, 우리는 이런 사회에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과정이다 싶기도 하다. 나라고 뭐 어릴 때 안 그랬을까.


그런데 돌이켜봐도 내가 어릴 때 엄마의 살을 비웃은 기억이 없다. 왜 그럴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나의 엄마는 뼈와 살이 찰싹, 아주 가까이 친밀하게 붙어 있었다. 엄마가 한 번씩 “내가 둘째 낳고도 이런 옷을 입었는데.”하고 꺼내보는 화려한 무늬의 쇼트 팬츠는 한 번도 내 몸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내가 내 아이와 같은 나이일 때에도 엄마는 여전히 날씬했다. 발목까지 오는 홈드레스를 입으면 어디 하나 튀어나온 부분 없이 걸리는 부분 없이 미끌미끌 원단이 일자로 축 늘어졌다.


학교가 끝나고 등에 매달린 가방을 흔들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오면 엄마는 주름 하나 잡히지 않는 미끌미끌한 홈드레스를 입고 연탄난로 앞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가방을 정리하는 사이 엄마는 내가 먹을 간식을 준비하러 흔들의자에 뜨던 옷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연탄난로 위에 가래떡이 올라간다. 하얀 가래떡은 뜨거운 난로의 열기에 팍팍 소리를 튀기며 노랗고 가끔은 까만 흔적을 남기며 겉은 바삭하게 속은 말랑하게 변해갔다. 노릇하게 구워진 가래떡을 접시에 옮기고 조청을 곁들여 내게 건네주고 흔들의자의 뜨개질로 돌아간 엄마를 훔쳐보며 가래떡을 조청에 찍어 후후 불어가며 먹었다. 조용히 뜨개질을 하는 엄마는 아름다웠다. 날씬하고 아름다운 엄마. 나는 그런 엄마를 자랑스러워했다. 나 역시도 엄마의 외모 품평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온다. 요즘 초등학교 1학년은 혼자 돌아오지 않는다. 교문 앞 우르르 나오는 아이들 중에 익숙한 얼굴 하나를 낚아채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덜렁거리는 가방은 내 등에 매달려 있다. “간식 뭐 먹을래?” 내 물음에 아이는 또 “떡구이!”를 외친다. 오늘은 가래떡 대신 인절미를 구워주기로 한다. 팬 위에 인절미를 올린다. 인절미의 맛있는 가루들이 금방 타버리지 않게 불 조절을 하며 불 앞을 지킨다. 뒤지개로 꾹꾹 눌러 얇고 납작해 바삭해지도록 기름에 지진다. 마침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것처럼 떡구이 해줬어. 애가 과자보다 더 맛있대.” 엄마는 “잘했네.”라고 간단히 말한다. 그래도 기뻐하는 마음이 숨겨지지 않았다.


아이가 나중에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내 모습은 어떨까. 당연히 나의 엄마처럼 아름답고 날씬한 엄마는 아닐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엄마 뚱뚱해.”라고 (비)웃으며 말해도 이제 상관없다. “엄마는 친구 같은 엄마야.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아이가 며칠 전 내가 감동 먹을 두 가지 포인트를 집어 이야기했다. 너의 편견도 너의 디스도 상관없다. 너에게 나는 말랑말랑하고 뚱뚱한 엄마일지라도 그래도 네가 한 때 나를 친구 같은 엄마라고 생각하고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