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묵, 남편의 괘씸함도 해이해지는 시간

by 유이경

2시간 전 내가 다녔던 곳을 헤집고 다녔다. 오늘따라 나는 참 많이도 걸었다. 참 많이도 들렀다. 아이 솜사탕을 사줬던 곳에 갔다가 내가 건넜던 건널목을 건너 아이와 갔던 공중화장실에 갔다가 물을 샀던 편의점을 갔다가 함께 탔던 엘리베이터를 둘러보고 아이가 콕 집어 사 오라고 했던 정육점에도 들렀다. 내가 애타게 찾는 핸드폰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오늘 걸은 걸음수를 만 사천 보를 찍었다.


무릎이 몇 달째 아픈 중이다. 그래서 발목을 접질린 아이와 겸사겸사 나아지지 않는 무릎을 치료하러 정형외과에 다녀왔다. 무릎이 아픈 주제에 정형외과에 다녀오면서 핸드폰을 홀랑 흘리고 와서 나는 왜 무릎이 빠개지도록 돌아다니고 있는 걸까. 그래서 굳이 몇 천보를 더 더한 걸까.



빈 손으로 돌아와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내가 나가기 전 함께 점심을 먹고 난 그릇들도 남은 음식들도 수저들도 식탁 위에 그대로 벌렁 드러누워 있었다. 그들을 외면하고 에고고고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앓는 소리를 내며 팩만 겨우 데워서 무릎에 올려놓았다.

“핸드폰 찾았어?”

“없어. 병원에도, 약국에도, 버스에도 전화 걸어봤는데 다 없대.”

방 안에서 물어보는 남편에게 대꾸하는 내 목소리가 불량하다.


내가 여태 돌아다니는 동안 오롯이 나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릇들 덕분이다. 소파에서 낑낑거리며 아프다는 내 소리도 방에서 나오지 않는 남편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서운한 마음이 슬슬 본격적으로 올라치는데 우리 집 둘째 고양이가 내 어깻죽지로 파고든다. 말간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골골골거린다. 잠시 사람의 마음으로 고양이를 바라본다.

“나 위로해주는 거야?”

그럴 리가. 그래도 눈을 감고 고양이를 슬슬 만지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은 온화해졌다.


그러다 문득, 저 사람이 저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의 엄마이고 내 남편이 엄마의 남편이라면? 자동 연상되는 폭언들. 쉬지 않고 따발총을 쏘다가 스스로 격앙되어 사람을 밀치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엄마의 남편, 아니 나의 아버지 말이다. 돈 한 푼 안 벌어오는 멍청한 여편네가 돈지랄을 하네, 누가 너보고 달리기 운동하라고 했냐 지 좋자고 운동하다가 무릎 아픈 걸로 유세를 부리고 있네, 뭘 잘했다고 자빠져 있냐 어쩌고 이런 것들 말이다.


고양이 쓰담쓰담에 아버지 생각에 내 남편의 괘씸함은 격하되었다. 나보다 처지가 안된 사람을 떠올리며 자족하는 것만큼 꼴불견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 꼴불견으로 잠시의 위안을 얻은 것이 민망하기는 하다.



따뜻한 팩에 무릎이 조금은 풀렸다. 곧 아이 학원 갈 시간이다. 몸을 영차영차 일으켜 아이를 준비시키고 학원에 데려다주고 온다. 그사이 남편이 식탁과 남은 음식을 정리해 두었다. 그리곤 다시 자신의 동굴 속으로 쏙, 소리도 얼굴도 없이 사라져 있다.


무릎을 두드리며 설거지통에 수북한 그릇들을 치우기 시작한다. 식기세척기에 돌릴 수 있는 그릇은 놔두고 못 돌리는 그릇과 냄비들만 씻어 놓고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뭘 했다고 곧 저녁 시간이 돌아온다. 아이도 데리러 다시 나가봐야 한다. 아이가 여러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도 픽업이 직업이 되었다.


학원에서 반색하며 나오는 아이 손을 잡고 건물 1층으로 내려오는데 아이가 뜬금없는 제안을 한다.

“엄마! 나 어묵 먹을래. 갑자기 저거 너무 먹고 싶어.”

“응? 너 어묵 안 좋아하잖아.”

“아니야~ 나 저기 어묵은 좋아해. 어묵이랑 떡볶이랑 사가자.”

그래, 핑계가 좋다. 저녁 차리기는 패스. 아이가 원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가게를 가서 셋이 먹을 어묵이며 떡볶이를 털어간다. 순한 국물의 어묵도, 매운 국물의 어묵도, 어묵 종류도 다양하게. 나도 모르게 어묵을 좋아하는 남편 생각이 난다.


때 아닌 어묵 잔치에 남편은 얼굴이 핀다. 요즘 바쁘다고 밥 다 차릴 때까지 코빼기 보기 힘들었던 얼굴이 냄새를 맡고 쏙 나온다. 내가 함께 먹을 채소와 고기를 준비하는 동안 남편은 옆에서 어묵과 떡볶이를 먹기 좋게 준비해 놓는다.


셋이 모여 앉은 식탁. 쫄깃하고 말캉한 어묵 한 입 뜯고, 칼칼하고 뜨거운 국물 한 사발 마시니 마음이 해이해졌다. 풀어진 마음만큼 입을 놀린다. 잃어버린 핸드폰 때문에 쓰린 기분을 살그머니 밀어 두고 떠들어댄다. 오늘도 남편과 아이가 내게 동시에 이야기해대서 정리하기 바쁘다. 아이가 오늘 어묵을 먹자고 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