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아홉 개 반, 불량한 것을 허하소서

by 유이경

집에 더 큰 냄비가 없다는 게 늘 아쉬웠다. 물론 곰탕용 냄비는 있었지만 그것까지 손댈 주제는 못 되는 우리는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최대한의 냄비를 찾아 최대한의 라면을 넣었다. 동그랗게 뭉쳐진 라면을 이리저리 쑤셔 넣어 찾은 최대치가 아홉 개 반이었다. 욱여넣어서 그렇지 사실 그 냄비에 맞는 라면의 정량은 끽해야 다섯 개 정도였을 것이다. 물에 맞춰 스프를 넣고 나면 스프 몇 개가 남았다.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남은 라면 반 개에 남은 스프를 뿌려 먹었다.


우리에게 허락된 라면은 한 달에 네댓 번 돌아오는 일요일 점심 중 한두 번이었다. 그나마도 무조건 집밥을 먹어야 하는 의지를 우리에게도 관철시키는 아버지 덕분에 지켜지는 날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가 외출 중이거나 어제의 숙취로 늦잠 중이면 우리의 의지도 관철시킬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눈을 반짝이며 엄마에게 “엄마~ 라면 먹고 싶어요~”하면 엄마는 항상 질문의 답을 알면서도 “라면이 그렇게 맛있냐?”라고 물었다.


엄마가 끓여주는 라면도 좋았지만 엄마와 아버지가 집을 비워 우리끼리 끓여먹는 라면이 더 좋았다. 엄마는 우리가 몸에 라면만 흡입하는 기생충이라도 들어앉은 듯 먹어제끼는 것을 못마땅해했고 그래서 엄마 앞에서는 라면이 아홉 개 반에서 여섯 개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다 끓인 라면을 냄비 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나면 셋은 말이 없어졌다.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더 퍼지기 전에 먹을 것인가. 대접에 고개를 처박고 면치기를 하고 있는 오빠들의 기세가 무섭다. 서로의 기세를 살필 틈 없는 오빠들이야말로 진짜 프로. 나는 기세에 눌려 이미 한 번, 고양이 혓바닥을 지녀 두 번 졌다. 그래도 나름 작전을 짠다고 대접 두 개에 라면을 덜었다. 한쪽 것을 먹는 사이 다른 쪽이 식도록 말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내가 보유하고 있을 수 있는 라면 양도 늘어나 일석이조였다. 뭐 그래 봤자 내 최대치는 두 개 반을 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두 개 반은 내 위가 허락하는 양이기도 했지만 오빠들이 허락하는 양이기도 했다.


우리는 라면에 열중하고 있다가도 누군가 국자를 집으면 고개를 들어 도끼눈을 떴다. 얼마나 많이 가져가는지도 문제지만 라면에 퍼져 있는 달걀을 어느 정도 퍼가는지도 문제였다. 라면과 달걀 앞에서 쉽게도 무너지는 얍삽한 남매의 우애였다.


배가 두둑해지면 마음도 풀어지기 마련이다. 고개도 좀 들고 말이라는 것도 하고 젓가락 속도도 느려진다. 부족한 김치도 채우고 물도 한 잔 떠오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작은오빠가 전기밥통 안의 밥을 솥째 들고 온다. 진정한 라면의 후식은 국물을 자작하게 흡수한 밥알이지. 마치 이제 막 식탁에 앉아 첫 곡기를 먹는 듯 밥의 양이 솔찬하다.


지인들에게 간혹 라면 아홉 개 반을 이야기하면 다들 뜨악과 경악의 어디쯤인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그렇게 먹어? 그러고 밥을 또 말아먹었어? 간혹 오빠들에게 우리가 그렇게 먹었던 거 기억나냐고 물어보면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며 웃는다. 다른 음식은 그렇게 많이 먹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더 신기했다. 그 시기가 지난 후로 우리는 아홉 개 반 비슷하게도 먹은 적이 없다.



이제는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자주 먹어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것뿐인가. 아이에게 “라면, 자주 먹으면 안 돼.”, “아침부터 무슨 라면이야.”라는 잔소리를 하는 엄마가 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라면을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이렇게 좋아하는 이유를 엄마 탓으로 몰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다. 어릴 때 참아서 이렇게 지속적으로 폭발하는 중인 거야,라고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나는 내가 마음껏 라면을 먹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 좋다. 그것이 엄마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가 다정하지만 단호하게 “안돼.”라고 말하는 것이 좋았다. 입은 삐죽삐죽 투덜거리면서도 입술 사이로 웃음이 삐져나오는 그런 마음으로 말이다.


얼마 전 아이가 “왜 할머니는 엄마보다 나를 더 예뻐해?”라고 물었다. 내가 아이 기분 좋으라고 아이에게 “우리 엄만데 왜 할머니는 딸 보다 손녀를 더 예뻐하냐?”라고 투정 부린 것을 기억했다 물은 것이다. 엄마는 이제 할머니가 예뻐해 줄 나이도 아니고 네가 워낙 사랑스럽기도 하고 어쩌고 이야기하니 아이가 다시 묻는다. “엄마, 그래도 할머니가 엄마 어릴 땐 엄마가 나 예뻐하는 것처럼 예뻐해 줬지?”


엄마는 바빴다. 엄마도 나도 전업주부인 건 마찬가지인데 엄마는 왜 그리 바빴을까. 엄마와 나의 차이를 따져보자. 살림을 하는 환경과 도구의 변화, 그로 인해 간소화되고 편해진 일들, 돌봄 노동 대상의 수 차이(엄마는 자식 셋과 남편 이외에도 시조카들을 데리고 있었고,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도 몇 년간 모셨었다.), 주부가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업종의 창업과 발전, 그리고 엄마와 나의 성격 차이, 거기에 플러스로 엄마의 남편과 나의 남편의 성격 차이.


엄마는 바쁜 틈새 사이에 나를 예뻐해 줄 여력이 없었다. 내가 아이에게 매일 하는 것처럼 끌어안고 뽀뽀할 틈도, 밑도 끝도 없이 쳐다보다가 아이가 “왜?” 물어보면 “좋아서.”라고 고백할 틈도, 아이의 수많은 궁금증에 귀찮아하면서도 나름 고심해서 대답해주는 틈도 없었다. 그런 틈 사이를 비집고도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거나 먹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더러운 옷을 입히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깨끗한 곳에서 살게 하려고 노력하고, 냄새나고 콧물 흘리고 다니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엄마의 그 바쁜 일과 속에 내가 있었다.


엄마의 고된 노동을 사랑과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감추고 포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는 그것이 나와는 결이 다른,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는 표현의 방식이었다 믿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고 이제는 알아버린 돌봄 노동의 고됨을 안쓰러워하면서 말이다.


며칠 전 큰오빠에게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라면이 더 이상 땡기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오빠 자신에게도 나에게도 실로 신기한 소식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둘이 한참을 고심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여전히 주기적으로 라면 하나 뚝딱 해치우고 후식으로 라면 국물 젖은 밥알을 넣는 나로서는 희한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