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남자는 내 앞에서 쩔쩔 매고 있었다. 쇼핑몰 앞에서 만나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에도, 영화를 볼 때에도 어색해서 몸이 굳은 티가 그리 나더니 결국 푸드코트에서 일을 냈다. 뻣뻣한 로봇처럼 굳은 팔과 다리로 주문한 막국수를 받으러 다녀오더니만 냅다 발이 꼬여 철퍼덕 막국수를 바닥에 엎어버렸다. 그 장면을 바로 앞에서 슬로로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어이없다. 신기하다. 그리고 귀엽다. 첫 데이트였다.
그때 이미 남자와 나는 서로를 안 지 일 년이 넘었고 우리는 이미 친한 선후배였다. 그래도 데이트는 다른 문제였는지 남자는 내가 여태 알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로봇이 되어 있었다.
시작은 친한 선배의 복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였다. (실은 그의 꾸민 외향을 보고 뭐 저렇게 생겼어하고 희한하게 바라보던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혼자 밥 먹기 싫을 때 편하게 밥 먹자 할 수 있는 선배, 고민거리를 툭 물어볼 수 있는 선배로 발전했다.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참 좋은 사람이다 싶었다. 선배랍시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고 사고가 유연하면서도 자신만의 꼿꼿한 철학이 있는 것이 좋았다. 자기 생각을 동글동글한 얼굴에 어울리는 살짝 높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좋았다. 소위 남성적이라는 표상들과는 다른 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사귀자는 고백에 냉큼 “그래, 그러자.” 대답하자 오히려 당황하던 얼굴이 귀여웠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뭐 좋은 사람인데 사귀어보지 뭐 했던 가벼웠던 마음이 이리 길어줄 줄은. 남자와 그리 오래 만나고 여태 만나고 이렇게 살 줄은.
아버지와 오빠 둘과 살았다고 해서 꼭 남자를 잘 아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름 남자를 잘 알았다. 그냥 착한 남자 말고 나쁜 남자, 특히 나에게 나쁜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권위적이고 남자다움을 내세우는 남자, 여자를 사람이 아닌 여자로만 보는 남자는 친구로도 싫었다. 나쁜 아버지와 너무도 내게 솔직하게 남자가 어떤지 시시콜콜 다 이야기해주던 오빠들과 살면서 자연스레 그런 남자는 눈에 띄게 행동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기적이고 나쁜 남자들은 통하는 게 있는 건지 디테일에서 아버지와 닮은 점이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남자들을 볼 때면 오히려 아버지에게 감사했다. 친구들은 모르는 이상한 점을 너무도 잘 알아챘으니까.
나는 무엇이든 선택할 때 마음속에 아버지가 숨어 있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항상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눈치채고 싶지 않아 내가 싫어서 안 한 거라고 이건 내 선택이라고 자위한 적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반대할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아수라장이 되는 집 때문에 그냥 포기하고 살았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되는 건 다 아버지 탓이라는 좋은 변명거리를 만들면서.
하지만 하나만은 달랐다. 남자.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항상 아버지가 내게 바라는 사윗감과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가 나의 남자에게 바란 남자상은 내가 딱 싫어할, 소위 남자다운 남자였다.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참 많은 난관이 예상되었지만 굳이 걱정하지 않았다. 나도 남자도 결혼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고 오지도 않을 미래를 미리 걱정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내가 뜬금없이 남자에게 “결혼하자.”라고 했다. 내가 그럴 줄은 우리 둘 다 몰랐다. 역시나 아버지의 막강한 어택이 시작되었고 알고 보니 만만치 않았던 나의 디펜스도 시작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한 후로도 한동안 나의 디펜스는 계속되었다. 디펜스를 하는 내내 아버지 눈에 남자는 남자답지 못하고 나에게 휘둘리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상관없었다. 자신의 나쁨을 아내와 자식들에게 사는 내내 흩뿌린 사람이 남자에게 남편의 도리를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보다 내 생각이 맞았고 나는 아버지의 부부 생활과는 전혀 다른 부부 생활을 하고 있다.
지인들은 남자와 내가 결혼하고 임신하고 출산하고 육아를 하는 것에 주기적으로 놀랐다. 남들 다 하는 결혼을 하고 남들 다 하는 육아를 할 줄 몰랐다고 했다. 평범하지 않게 살 줄 알았다고 말이다. 지금 우리는 주위 어디에서나 보이는 평범한 부부이고 평범한 부모이다.
나는 포기하는 삶에 익숙했지만 특별하고 싶었다. 오래도록 지녀온 그 마음을 놓는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거나 오래 걸리는 일일 것이다. 그래도 평범함의 가치를 일찍부터 알았던 남자와 오래 지내오면서 나도 그 가치를 차근히 그리고 은근하게 느껴온 것 같다. 평범하게 남편과 하루를 보내고 평범하게 아이에게 후회할 행동을 하고 평범하게 아이를 보듬고 사랑하며 산다. 지금 나는 이 평범함을 사랑한다. 이건 막국수를 철퍼덕 내 앞에서 엎어도 꼴 보기 싫지 않고 귀여워 보였던 그날부터 예견된 날들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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