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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백 중 일

[그들의 데이트, 그리고 담화]

001. 근데 시작부터 이래도 돼?

by 이한얼





“생각보다 금방 나왔네.”


“달리 정리할 게 없어서. 인사만 하고 왔어.”


“그래. 백수 남친에 이어 본인까지 백수가 된 소감이 어때?”


“잘 모르겠어. 차라리 개운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고. 좀 서글프기도 하고.”


“서글퍼?”


“이게 서글프다고 해야 하나, 서운하다고 해야 하나. 모르겠어. 지금 나 어때 보여?”


“입사한 지 하루 만에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되겠다고 깨달은 신입 같은 얼굴인데.”


“마음이 복잡한데 뭐라 잘 표현을 못하겠네. 왜 그렇게 쳐다봐?”


“아까부터 표정이 참 다채로워서.”


“어떤데?”


“깎아놓은 감자 껍질에 곰팡이 피는 장면을 80배속으로 돌린 것 같아. 어지간히 심란한가 보다.”


“이만큼 심란할 일이 아닌데 심란해서 그게 심란하다.”


“계약직 백수 됐다고 생각해. 그동안 못 챙긴 휴일 몰아서 쉬는 셈 치고.”


“…아. 그러고 보니 좀 있으면 크리스마스네.”


“아직 시월 말인데 벌써 무슨 크리스마스.”


“작년에는 제대로 못 보냈잖아. 크리스마스 선물 뭐 받고 싶어?”


“아직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산타 할배랑 상의도 해야 하고.”


“산타라, 오랜만에 듣는다. 근데 도령은 착한 아이는커녕 착한 어른도 아니니까 산타 안 오잖아. 올해 벌써 몇 번이나 울었고.”


“나한테는 와. 보험 맺어놔서.”


“뭘 맺어놔?”


“종신보험. 특약까지 달린 걸로.”


“그건 무슨 보험인데?”


“내가 한 가지 규칙만 지키고 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선물 주러 오겠다는, 일종의 노예 계약이지.”


“규칙은 뭔데?”


“내가 진심으로 산타가 존재한다고 믿을 것.”


“…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크리스마스 선물 안 줘도 된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하는 거야? 직장인 아니어도 선물 살 여유는 있는데.”


“아니야. 받고 싶은 것도 진짜고, 지금 말한 내용도 진짜야.”


“그럼 도령은 아직도 산타가 있다고 믿는 거야?”


“당연하지. ‘아직도’도 아니고, ‘믿는다’도 아니야. 산타는 실제로 존재하는 걸.”


“지구는 네모났다, 뭐 그런 종류?”


“아니. 지구는 동그랗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 말미에 ‘확실하진 않지만’은 뭐야?”


“내가 직접 본 건 아니니까.”


“그럼 산타는 직접 봤고?”


“응.”


“언제?”


“언제고 나발이고. 지난주에도 봤고, 오늘도 봤어.”


“어디서?”


“나.”


“응?”


“내가 산타라고. 산타인 내가 이렇게 버젓이 있는데 어떻게 산타의 존재를 안 믿어?”


“우리 도령, 산타였어?”


“그걸 지금까지도 몰랐구나.”


“그 뭐냐, 산타는 좀 더 할아버지에, 외국인에, 일단 수염은 어디 있어?”


“네덜란드 할아버지가 뭐 예쁘다고 한국 꼬맹이들한테 선물을 주냐.”


“…아.”


“그래. 평소처럼 시답잖은 헛소리로 넘어갈 얼굴이 아니네.”


“나 토할 것 같아.”


“왜?”


“갑자기 화가 났나? 모르겠네. 도령. 나 왜 이러지?”


“무슨 기분인데?”


“누구한테 막 욕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누구한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답답해.”


“자, 왼손을 들고. 지금 본인의 명치, 목, 귀 중에 한 군데만 만질 수 있다면 어딜 만지고 싶어?”


“귀 같은데.”


“오른손 들고. 내 손, 목, 귀 중에는?”


“입술?”


“항상 느끼지만 아기씨는 진짜 직관적인 사람 같아. 그럼 내가 어쩌다 산타가 됐는지 들었어?”


“도령이 산타인 것도 방금 처음 알았어.”


“추워?


“전혀.”


"그럼 천천히 걸어가자. 사람이 뭔가를 믿을 때 반드시 그에 준하는 어떤 증거가 필요해. 이건 동의하지?”


“응.”


“그럼 우리가 현재 있다고 믿는 온갖 추상적인 것들, 예를 들어 사랑이라든지, 우정이라든지, 두려움이나 야속함 같은 것들. 그런 건 진짜 있는 거야?”


“있지.”


“왜?”


“왜냐니, 우리가 직접 느끼는 것들이잖아.”


“증거는?”


“그런 걸 어떻게 증거를 대?”


“그렇지? 예를 들어서, 우리가 방에 나란히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서랍장 옆으로 다리가 적어도 열넷 이상인 벌레가 기어 나온 거야. 보통은 돈벌레겠지. 그걸 보고 아기씨는 어떤 기분이 들어? 옆에서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짚어보자면, 일단 발견한 직후 얼굴이 찌푸려지고, 동시에 조금이라도 멀어지려고 반사적으로 몸이 뒤로 빠지지. 순간 등에서 땀이 나고, 옆에 있는 내 옷을 꽉 잡아. 맞지?”


“아주 정확해. 기분 나쁠 만큼.”


“예를 든 거니까 둘러보지 마. 없어. 인상도 좀 펴고.”


“난 상상력이 좋단 말이야.”


“그럼 계속해서, 근데 그 벌레가 서랍장 옆에 잠시 있더니 갑자기 빠른 속도로 아기씨 쪽으로 기어 와. 그럼 아기씨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앉아 있던 곳에서 펄쩍 뛰어오르겠지? 그리고 내 뒤에 숨고, 저걸 어떻게 해달라고 말할 거야. 근데 내가 어쩌기 전에 벌레가 벌써 아기씨 발등을 거쳐 바지 안 종아리 쪽으로 타고 올라갔어. 그러면 그때부터 소위 ‘멘붕’이겠지. 이성은 이미 증발했고, 펄쩍펄쩍 뛰면서 어떻게든 떼어내려고 다리를 흔들 거야. 온몸에 소름이 돋고, 현기증이 나지. 그러다 그 벌레가 툭 떨어져 나왔어. 그럼 아기씨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할 수만 있다면 저 존재를 짓뭉개 버리고 싶다고….”


“그만해. 아까 먹은 햄버거가 도로 나올 것 같아.”


“그래. 아무튼 그런 상황이 있었어. 그럼 이때 아기씨가 그 벌레에게 가지는 감정은 뭐야?”


“으, 세상의 모든 벌레는 다 없애버리고 싶어.”


“그래. 그렇겠지. 그건 거부감이야?”


“그렇지.”


“벌레에 대한 두려움은?”


“그런 것도 있지.”


“불쾌함은?”


“그것도.”


“그 전부를 한 마디로 뭉뚱그려 표현하면?”


“싫어.”


“그래. 그럼 그 싫다는 감정 속에는 거부감과 두려움과 불쾌함이 얼마씩 있는 거야?”


“…그런 건 못 나누지.”


“그렇지, 그건 못 나누지. 애초에 인간이 무엇을 보면서 어떤 기분을 느끼는데, 그게 선천적인 본능이든 후천적인 학습이든 제쳐 두고서라도 말이야, 기분은 추상적인 거라서 보이지가 않잖아. 근데 전해야 되는 상황이 있고, 또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 그러니 그걸 전할 수단으로 만든 게 ‘말’이잖아. 근데 그 말이라는 수단은 추상적인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에 턱 없이 부족해. 추상적인 감정, 계속 ‘추상적인 감정’이라고 하기엔 기니까 그냥 ‘추상’이라고 하자. 사람이 소통을 하려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추상을 모아서 비슷한 것끼리 분류를 하고 이름을 붙여야 하잖아. 이건 불안이고 저건 기쁨이라 부르자는 사회적 약속이 있어야 말이 통하니까. 근데 사람에 가진 한계 탓에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추상을 모으기 어려워.”


“왜?”


“첫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지금 어떤 추상을 느끼는지 알 수 없어. <아바타>의 나비족처럼 나무 아래서 ‘I see you'를 속삭일 수 있으면 모를까, 우리는 추상을 있는 그대로 꺼낼 방법이 없고, 그걸 상대 마음에 고스란히 넣을 수도 없어. 상대의 추상과 내 추상이 같은지 정확히 맞춰볼 수도 없어. 그러니 우리는 근본적으로 따지면 공통적인 추상을 모을 수도 없고, 그걸로 소통할 수도 없지.”


“하지만 사람들은 그러면서 살잖아?”


“맞아. 우리는 소통을 하고 살아야 하니 안 된다고 그냥 포기할 수 없지. 편법이라도 써야지. 그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거야. 보거나 느낄 수 없는 추상 대신, 겉으로 드러나는 반응을 보면서 현재 상대의 추상을 예상하는 거지. 지금 상대가 이런 요런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이건 불안이야. 저런 그런 반응이 나오면 기쁨이야. 이렇게 반응이라는 거울에 상대를 비추는 걸로 추상을 유추하는 거야. 하지만 상대의 반응을 규정해서 단어를 찾고, 그 단어로 다시 추상을 규격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범위가 넓어질 수밖에 없어. 반응과 단어와 추상이 항상 수식처럼 명확하게 들어맞지는 않으니까. 동시에 의미가 뭉뚱그려지는 것도 어쩔 수 없지. 같은 단어로 표현되는 추상이어도 상대의 것과 내 것은 다르니까. 그래서 방금 같은 상황에서 아기씨는 불안도 느끼고 거부감도, 두려움도, 불쾌함도 함께 느낀다고 생각하는 거야.”


“왜?”


“아기씨도 모르거든. 추상을 그대로 꺼낼 방법이 없어서 추상을 유추하듯이, 직접 느끼는 본인조차 스스로의 반응을 좌표 삼아 미리 정해놓은 규격 차트에서 단어를 찾아보는 거야. ‘반응을 보니 이런 경우 거부감, 두려움, 불안의 파트야. 그러니까 지금 난 불안하고 거부감이 들어’라고, 가슴이 추상을 느끼면 머리가 단어로 인지하는 거지. 남들도 똑같아. ‘얘가 이런 반응을 보이니 불안하거나 거부감에 드나 보네’라고 생각하지. 소통의 한계로 공통적인 추상을 모을 수 없으니 편법으로 이런 규격 차트를 만든 거야. 그리고 사회화라는 과정을 통해 후대에 물려주지. 지금 우리도 그걸 배워 스스로의 추상을 정의하듯이. 결국 사람은 규격 차트가 없으면 자신이 어떤 추상을 느끼는지, 그게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 몰라. 당연히 남에게 드러낼 수도 없고. 근데 이게 편법인 이유는 사실 그렇게 훌륭한 방법은 아니거든. 차트에는 구멍이 송송 뚫려있고, 유추하는 과정 중에 추상의 본질과 멀어지고, 무엇보다 느려. 심정이 흐트러질수록 반응과 추상을 연결하는 시간이 길어지지. 그래서 그동안 모르게 되는 거야. 내가 내 마음을 모를 때. 기분이 이상한데 어떤 단어 하나로 정의를 내릴 수가 없을 때. 그건 정확히 말하자면 ‘내 마음을 모르겠어’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지만 아직은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고 너에게 설명하지도 못하겠어’인 거지. 정말 모르는 게 아니라 아직 연결이 안 된 것뿐이야.”


“… 근데 어쩌다 이 얘기가 나왔더라?”


“산타 이야기 중이었지.”


“맞다. 알았어, 다시.”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과 상태를 모르는 순간과 종종 마주쳐. 고민해봐도 모르겠고 찾아봐도 안 보이지. 근데 인간은 알고자 하는 습성이 있어서, 정확히는 모르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어서 모른 채 넘어가면 답답해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생물이거든. 그러니까 적당히 고민해보다가 ‘아이고 모르겠다’ 하고 넘겨버리는 거야.”


“그건 모른 상태로 넘어가는 거 아니야? 알고자 하는 습성이랑 상관없는 것 같은데?”


“여기까진 의식, 즉 머리의 영역이야. 사람을 의식과 무의식, 내 표현을 빌리면 ‘머리’와 ‘몸’으로 나누면, 입으로는 모르겠다고 하면서 사실 ‘머리’는 이미 어떤 식으로도 추상을 규정지은 거야. 반응에서 출발하여 느리기 움직이는 유추를 규격 차트 어디쯤에 그냥 붙여버리는 거지. 인간은 간사하고 똑똑해서, 행동의 제1원칙이 ‘보다 이롭게’ 거든. 언제 어느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내가 좀 더 이롭고, 좀 더 편하고, 좀 더 낫도록 움직여. 그 순간 머리는 정답을 찾기 위해 이 과정을 계속 부여잡고 있는 것보다, 맞든 틀리든 어떤 답이라도 내리고 잊어버리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고 판단을 내린 거지.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아이고 (정답이 뭔지) 모르겠다’가 아니라, ‘아이고 (이게 정답인지 아닌지) 모르겠다’인 셈이야. 실제로 그렇게 말하고 나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마음이 좀 편해지잖아. 문제는 무의식, 즉 이야. 몸은 추상과 마음의 근원이 놓은 자리니까 지금 머리가 모르는, 그래서 결국 아무 데나 붙이고 넘기려 하는 그 과정의 정답을 알고 있거든. ‘멍청아 거기 아니야’라고 계속 소리쳐보지만, 머리는 이미 ‘모르겠다’라는 귀마개를 꼈으니 들리지 않지.”


“알쏭달쏭하다.”


“항상 말하지만 몸은 머리보다 백배는 더 똑똑해. 의식은 무의식보다 백배는 멍청하고. 실제로 그동안 느려서 아무 데나 붙인 추상, 풀지 못한 채 가지고 있는 고민, 그 모든 정답을 머리만 모를 뿐이지 몸은 알고 있어. 머리는 나중에 추상이 제자리를 찾고, 고민이 풀리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지. ‘아, (몸이) 알고 있던 건데’ 하면서. 사람을 회사 부서에 비유하면, 무의식인 몸이 과장이고, 의식인 머리는 부장이지. 이상하게도 발언권과 영향력은 멍청한 쪽이 커. 부서에 지금 문제가 생겼는데 부장이 멍청해서 해결을 못해. 그러는 동안 상황은 점점 나빠져. 똘똘한 과장은 해결방안을 아니까 부장에게 말해보지만 부장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매번 보완하라고 돌려보내. 과장이 제시하는 건 어려워 보이거든. 인내심이 느린 부장은 빠르고 확실하고 쉬운 방법이 필요한데. 계속되는 퇴짜에 고민하던 과장은 이러다 다 같이 망하겠다 싶어서 어쩔 수 없이 적당한 절충안을 제의해. 그 절충안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리 좋은 수는 아니지만 당장은 문제를 땜질해줘. 문제가 쉽고 빠르게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니 그제야 부장은 결재서류에 도장을 찍어. 그게 ‘아이고 모르겠다’ 서류야.”


“아, 엊그제였다면 듣다 커피를 뿜었을 이야기다.”


“그렇지? 그렇게 땜질 서류로 급한 불은 껐지만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지. 본디 옳은 방향이 있고, 또 그걸 알고 있음에도 그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계속 가는 거야. 처음에는 아주 살짝, 각도기로 잴 수도 없을 만큼 미묘한 엇각이지만, 땜질 서류가 쌓이고 길이 길어질수록 원래 가야 할 곳과 수백수천 미터 넘게 떨어져. 즉, 사람은 ‘아이고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만큼 쉽게 빨리 망가지는 거야. 이 정도면 훌륭한 자기 파괴 주문이지. 아기씨는 살면서 그 말을 몇 번이나 했어?”


“… 그것조차도 모르겠다.”


“지금은 아기씨 까는 시간은 아니니까. 아무튼, 그렇게 사람은 추상에 정의를 내려야만 받아들일 수 있어. 추상은 무엇으로든 규정하고 어디로든 규격에 맞춰야 존재로서 드러나지, 그 전에는 있으되 없는 거야. 산타도 마찬가지야. 아기씨는 산타가 실존한다고 믿어?”


“나는 아니지, 산타의 기원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안 믿어.”


“난 믿어. 그건 실제로 있으니까. 왜냐하면 산타는 애초에 없었어. 그건 하나의 유명한 이야기이고, 아이들에겐 꿈이고, 어른에겐 훌륭한 핑계이고, 장사하는 입장에선 특정 공휴일을 대표하는 세계 최고령 마스코트일 뿐이야. 단지 이미지가 굉장히 디테일하다는 것만 빼고는 추상적인 개념이지.”


“산타가 추상적인 개념이라고? 산타는 고유명사잖아. 캐릭터고.”


“내게는 추상이야. 마저 들어봐.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바람이 있었어. 크리스마스이브에, 머리맡에 양말을 걸어놓지 않았지만 그래도 꽤 큼직한 선물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두고 들뜬 마음으로 잠에 들었지. 그러면 새벽 한 시 이십 분쯤, 구층 베란다 문으로 산타 할배가 등장하는 거야.”


“되게 구체적인 방문 시각이네. 노란펜 선생님도 아니고.”


“차 막히면 두 시 무렵 담배 냄새에 절어서 오겠지. 그리고 한참 삼차 수면 단계에 들어서서 잘 자고 있는 나를 깨워서 앞에 앉혀. 자다 깬 나는 짜증이 나지만 옆에 있는 커다란 보따리를 보고 표정을 숨기겠지. 그렇게 둘이 마주 보고 앉아서 한 해의 논공행상을 하는 거야. 신상필벌에 더 가깝겠다. 내가 먼저 한 해 동안 무엇을 얼마나 잘했는지 막 자랑하는 거야. 그럼 할배는 빈말이라도 잘했다며 칭찬해 주겠지. 물론 잘못한 게 있으면 눈물 찔끔 짜면서 혼나고. 그 과정이 다 끝나면 할배는 ‘옜다 먹고 떨어져라’ 하면서 선물을 주는 거야. 그러면 나는 속으로 생각하겠지. ‘나는 이걸 받을 만해. 이건 연말 특수 상여금 같은 거야. 용돈 이외의 보너스쯤으로 치자.’ 그냥 받는 게 아니라 응당 받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받은 거니까. 그리고 내년에도 더 큰 보너스를 노리면서, 쓰레기를 길에 버리지 않는다던가, 개구리를 괴롭히지 않는다던가, 아무튼 ‘여씨춘추 불구론’의 ‘소귀선 수오지 상’처럼 의도는 제법 불순할지언정 착한 일을 하는 거야. 결과가 좋으면 할배는 내가 미운 7살이어도 상을 줄 테니까. 잘하면 상을 주고, 그러면 다시 잘하고, 그럼 또 상을 주는 선순환이지. 그리고 그 순환 안에는 선물을 주는 사람도 포함돼. 내 아이니까 선물을 주는 게 아니라 잘했으니 상을 주는 거야. 당위성이 부여되고, 아이에게 상벌제도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려줄 수 있고, 또 선악과 시비의 기준을 가르치기도 쉽지. 게다가 대화도 할 수 있어. 요즘 어떤 애들과 노는지,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물을 주는 행위’가 주는 사람에게도 선물이 되는 거야. 그냥 주는 게 아니라 잘했으니 주는 거잖아. 무조건적인 행위가 아니라 조건부의 행사니까. 잘한 아이는 선물을 받아서 기쁘고, 부모는 아이에게 선물을 줄 수 있어 기쁘고, 그보다 앞서 우리 아이가 지난 일 년 동안 선물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지냈으니 더 기쁘지.”


“어렸을 때부터 꽤나 조숙했구나.”


“나는 그런 존재가 필요했어. 단지 선물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함께 무엇을 나누고 공감하는 사람. 날 칭찬하고 혼내는 사람. 우리 부모님도 다른 부모님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나를 번듯이 잘 키워주셨고 선물도 꼬박꼬박 주셨지만, 대화가 많은 관계는 아니었거든. 너무 욕심부린다고 하면 할 말은 없는데 그래도 바람이라는 게 그렇잖아. 있으면 그 이상 받고 싶고, 그 이상 받으면 더 받고 싶고. 그런 점이 늘 아쉬웠는데 어느 날 문득 깨달은 거야. 내게 그런 존재가 없어서 아쉽다고만 할 게 아니라, 내 아이에게 그런 존재면 되더라고. 내가 그 존재가 되면 그건 없는 게 아니라 단지 우리 부모님은 아니었던 거고, 내가 그 존재가 됨으로써 존재가 있음을 입증할 수 있으니까. 우리 지난번에 갈매기에 소주 먹다가 말했었지? 아기씨는 사랑을 믿어?”


“응, 믿어.”


“왜?”


“내가 사랑이니까.”


“마찬가지야. 산타는 당연히 있어. 내가 산타니까. 나 자체가 존재 증명이지. 생각해보면 오히려 산타가 없기에 내가 산타가 있다고 입증할 수 있는 거야. 실제로 산타가 실존했으면 그건 추상이 아니라 아기씨 말대로 고유명사기 때문에 나는 산타가 되는 게 아니라 ‘산타 분장을 한 나’밖에 안 되겠지. 근데 없잖아? 없으니 증명할 수 있는 것, 이게 추상에 대한 정의야.”


“그래서 결론은 도령이 산타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바라는 어떤 이미지 집합체의 존재인데, 추상이라 규정하지 않으면 드러낼 수 없잖아. 그래서 규격 차트에서 가장 비슷한 이미지를 검색해 보니 산타더라고. 그래서 산타라고 표현한 것뿐이야.”


“원래 추상과 단어의 관계성은 추상을 증명하기 위해 단어를 만든 건데, 이번 경우에는 추상에 다른 추상을 씌워서 단어로 끼워 맞춘 거네?”


“정확해. 규격 차트의 빈 부분이 달리 표현할 게 없으니까. 애당초 차트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왔고.”


“방금 도령 말 듣다 보니 막 생각났는데.”


“무슨 말?”


“산타 분장을 한 아버지라는 말. 그 말에 비추어 보면 이 세상 모든 산타들은 다 ‘산타 분장을 한 누군가의 아버지’잖아. 그건 산타를 고유명사로 취급하기에 그런 거고.”


“그렇지.”


“그들이 진짜 산타가 없다고 믿는다면 분장이 아니라 진짜 산타가 된다는 말인데, 그렇게 치면 그들은 어쨌든 일정 부분이라도 산타에 대해 믿는 거고.”


“그렇게 되겠지.”


“그럼 이 세상에서 산타를 가장 안 믿는 사람은 도령이구나. 도령만 진짜 산타인 걸 보니.”


“그래서 참 아이러니 하지. 산타를 안 믿는 사람만이 유일하게 진짜 산타라니. 아무튼 나는 이래. 산타고 추상이고 나발이고, 결국 ‘내가 무엇을 믿을 땐 어떤 증거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믿느냐’지. 그건 자신만의 방식이기에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침범받을 수 없지만, 동시에 타인의 방식 역시 존중해야 해. 사람을 혼란케 괴롭히는 것들 대부분은 증거가 명백한 사실이 아니라 사람마다 해석이 달라지는 가정이지. 아기씨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나는 왜 사람들과 생각이 다를까?’라든지,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생각할까?’ 같은 걸로 괴로울 필요가 없어. 그런 고민들은 상대의 입장을 좀 더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용한 수단이지, 스스로를 괴롭힐 요소는 아니거든. 중요한 건 ‘내가 어찌 생각하는지와 상대가 어찌 생각하는지를 인지’하고, 그 사이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리고 ‘서로가 양보한 적정선에서 조율’하는 거야. 인지하고 인정하고 조율하는 것.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아기씨는 산타를 안 믿고 나는 믿어도, 우리 종교가 달라도, 서로 추구하는 이상이 달라도, 회사를 어떻게 나왔어도, 별 의미도 없고 상관도 없지. 그게 안 되면 서로가 상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엉뚱한 데서 헤매다 엇갈리지.”


“… 혹시 지금 내가 도령이랑 그러고 있어?”


“지금 아기씨와 나는 아니지. 아기씨 몸이랑 마음은 서로 그러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네. 이제 알겠다. 내가 지금 무슨 기분인지.”


“무슨 기분인데?”


“이건 머리로 몸을 가로막은 아쉬움이야.”


“왜?”


“아까 ‘아파서 어쩔 수 없이 그만두는 건데 왜 그렇게 말하세요? 부장님도 병이에요, 지랄병’이라고 말하지 못한 아쉬움.”


“업계가 좁은 게 이럴 때 안 좋구나.”






20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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