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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백 중 일

[그데담 002] 너는 너를 사랑한다.

by 이한얼






“도령.”


“응.”


“나중에 언젠가, 지금을 되돌아봤을 때.”


“응.”


“무슨 생각이 들까?”


“…아마 그립지 않을까.”


“그럴까? 지금 이렇게 힘든데?”


“힘들어도, 지금 없는 게 돌아본 나중에는 있을 테니까.”


“뭘까, 그게.”


“사랑이겠지.”


“사랑이라….”


“사람은 시선은 미래에 두고, 몸은 현재에 있으면서, 마음은 과거에 머물러 있으니까.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살고 있으면서도 과거를 사랑하지. 평생을 걸어왔고 지금 계속 앞으로 걸어가지만, 인생에 쉬는 시간은 없잖아. 숨 쉬고 있는 동안은 멈출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이번 걸음을 잘 걸었던 아니던 바로 다음 걸음을 내디뎌야 하고, 그 걸음 다음엔 다시 다른 걸음이 있고. 그렇게 몸이 계속 앞으로 나가는 동안 마음은 뒤에 남아. 마음이 ‘조금만 더 있자’ 하면 몸은 ‘안 돼’ 하고, ‘잠깐만’ 하면 ‘빨리 와’ 하고. 그렇게 마음은 보채고, 몸은 잡아끌어. 그래서 자꾸 뒤돌아보게 돼. 아쉬워서. 모자라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인생의 한 토막, 맘껏 쥐어보지도 못했는데 손에서 놓쳐버려서. 그래서 사람 마음은 늘 과거에 머물러 있어. 그게 사람이 과거를 사랑하는 이유지.”


“나도 과거를, 지금을 사랑할까? 잘 모르겠어. 돌아볼 뒷길은 온통 멍으로 얼룩졌을 텐데. 힘든 기억뿐이니 남기고 싶은 것도 없고.”


“과거의 기억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단지 깨닫지 못한 채 가지고만 있는 거야. 어디에든, 머릿속에나 세포 사이에나, 심지어 무릎 뒤나 발가락 사이에도 과거는 끼어 있어.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사람이 오롯이 현재에만 산다고 생각해? 누가 말하듯, 딱 8초만이 내 세상의 전부라고? 그럴 리가. 아기씨는 과거를 몽땅 끌어안은 채 살고 있어. 동시에 미래에게 끌려가면서 살고 있지. 단지 현재인 지금에 놓여 있을 뿐이야. 사실 현재라는 단어를 쓰기도 애매해. 없는 걸 필요에 의해 껴놓은 것뿐이니까. 마치 신호등 같은 거야. 빨간 불에서 파란 불로 바뀌기 전에 잠시 들어오는 주황 불 있잖아. 그게 현재의 정의야. 결국 아기씨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 사는 중이야. 나이만 한 바구니를 등에 메고 과수원 길을 걷는 것과 같지. 사과를 따서 바구니에 넣으면, 갈수록 따야 할 사과가 줄어드는 만큼 바구니는 점점 묵직해지지. 살아간다는 건 과수원에 열린 사과를 전부 따는 거야. 그 소명에 지금 어디쯤 서있는지는 큰 의미가 없어. 단지 어디쯤 와있는지 알려주는 지표일 뿐이지. 미래 역시 마찬가지야. 대략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할 수단일 뿐이야. 중요한 건 사과를 얼마나 땄느냐. 바꿔 말하면 어찌 살아왔는지. 인생의 개별 목적은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이건 인간에게 부여된 공통 목적이야. 그런 과거를 사람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잖아.”


“그래서 곧 과거가 될 지금도, 나중에 보면 아름다울 거라고? 내가 사랑하는 것의 일부분이니까?”


“그렇겠지. 뜨겁던 감정도, 벌건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가라앉아. 가라앉은 기억은 달고 쓴 추억으로 굳고, 후회가 묻지 않은 추억은 없지. 과거는 기억이 되고,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후회가 돼. 그리고 후회는 아쉬움이지. 어떤 삶을 살았든, 그 순간 얼마만큼 만족을 했든, 지나간 날들은 늘 아쉬워. 열심히 살지 못했다면 열심히 살아보고 싶어 아쉽고, 열심히 했다면 다른 방식으로 열심히 살고 싶어서 아쉽지.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사람은 눈물이나 만족스러운 미소로 덮어두는 거야. 그리고 자꾸 돌아보지. 잊지 않으려고.”


“……


“지금 아기씨는 어때? 그 푸른 멍으로 얼룩진 아기씨의 옛 나날들, 다 잊고 싶어?”


“…아니, 그게 없었으면 난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도령 역시 만나지 못했을 거고.”


“소중하지?”


“응.”


“그럼에도 아쉽고?”


“응.”


“그럼 아기씨 역시 마찬가지야. 아기씨는 아기씨의 과거와, 아기씨의 어둠과, 아기씨의 못난 부분까지 모조리 끌어안은 채 그것들마저 보듬으며 살고 있어. 즉, 스스로를 사랑하며 살고 있어. 그런 아기씨가 언젠가 지금 이 순간을 돌아본다 한들, 그립지 않을 리가 없잖아.


“……”


“힘든 미래는 없어. 지금보다 더 힘들 날들도 없어. 힘들었지만 소중하고 그래서 아쉬운 지난날과, 곧 그렇게 될 지금이 있어. 그러니 다음은 그때보다 덜 힘들게 될 앞날만 있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늙듯이, 힘듦과 괴로움 역시 그렇게 늙어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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