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매]
모든 중독자들이 그렇듯 알코올 중독자도 시작은 거창하지 않다. 처음에 기분이 좋아서 혹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술을 마신다. 또는 기념할 일이 있을 때 술을 마신다. 그러다 보면 알코올에 중독이 되어서 술이 마시고 싶기 때문에 핑계를 찾기 시작한다. 이전이라면 굳이 기념할 거리조차 안 되는 일까지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가며 기념이랍시고 술을 마신다. 어제는 기분 좋은 일이 있었으니 한 잔 하고, 오늘은 조금 속상한 일이 있었으니 또 한 잔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이유가 있을 때에만 먹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은 슬그머니 사라진다. 매일 마시고 싶지만 아무리 눈 가리고 아웅 하려 해도 기념할 일이 매일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러면 그때부터는 그냥 술병을 꺼내 와서 슬그머니 마신다.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으면 오늘은 왜 마시냐는 타박에 변명을 한다. 오늘 뭔가 좋은 일이 있었다고. 사실 그렇게까지 좋은 일은 아니었어도 그리 말한다. 혹은 반대로 아주 사소하게나마 나쁜 일이 있었으면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마신다고 한다. 살면서 닥쳐오는 빈도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비슷하다. 허나 우리 뇌리에는 부정적인 일이 더 오래 남으니까 안 좋은 일의 빈도가 더 많다고 기억한다. 그럼 오늘은 나쁜 일이 있어서, 내일도 안 좋은 일이 있을 예정이어서, 그러다 결국 술을 마시기 위해 나쁜 일이 있었다고, 그래서 지금 기분이 안 좋은 거라고 스스로를 속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고작 충동과 중독에 패배한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해 기분이 더 나빠진다. 하지만 그 부분을 인정하기는 싫고, 근데 술 마실 이유는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내가 기분이 안 좋아야 하는데, 그럼 억지로 이유를 찾는다. 평소라면 지나갔을 법한 같이 사는 이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지금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들었던 조언, 어제까지는 잘못임을 알기에 웃으며 넘겼던 타박까지 모두 기분 나쁠 근거가 된다. 그러면 주변인에게 화를 내기 시작한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술 하나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냐면서 처음 스스로 정한 기준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그 순간, 지금까지 눈가림 수준이었어도 존재하던 모든 약속은 파괴된다. 그때부터는 그냥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위풍당당하게, 자신의 정당한 전리품을 찾으러 가는 듯한 걸음으로, 냉장고에서 술병을 꺼내서 식탁에 앉는 내내 같이 사는 이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도끼눈으로 주시하면서, 아주 조금이라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무슨 말이라도 할 것 같으면 벼락같이 먼저 화를 낼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로. 어느 순간부터 술병이라는 왕관을 지키기 위한 폭군이 된다. 평생 사랑해온 가족도, 친구도, 약속과 자긍심도 전부 이 왕관을 뺏으려는 찬탈자일 뿐이다. 적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늘 예민한 상태로 술을 마시다가 결국 화를 낸다. 그 즉시 지금껏 평온하게 작동해오던 가정의 유대 관계는 금이 간다. 하루 동안 각자 일상을 보내다 온 가족들이 저녁에 같은 식탁에 앉아 마주 보고 밥을 먹으며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일로 가정의 유대감을 쌓아왔는데, 이제는 술을 마시는 1인과 술을 마시지 않는 나머지로 나눠진다. 유대감은 점차 낮아지고, 서로 불만만 쌓여가고, 식탁 위는 음식보다 서로의 눈빛이 더 빨리 식어간다. 술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하면 불같이 화를 내니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말을 참는다. 술과 상관없는 다른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어떤 대화 속에 과거 잘못된 행동을 불러오는 시동키가 있을지 모르니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두 밥만 먹는다. 그러다 보면 함께 해야 하고, 함께 하고 싶었던 저녁 식사는 사라진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 위에서 음식을 씹는 것처럼 맛이 없다. 다 먹고 나면 체기마저 돈다. 그러면 어린 사람부터 하나씩 함께 밥을 먹는 일을 피한다. 네모였던 식탁은 세모가 되고, 다시 둘뿐인 직사각형이 됐다가, 결국 원형 테이블에 혼자만 남는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오직 하나, 술 때문이다. 그간 수없이 지나왔던 분기점마다 충동과 중독을 이기지 못하고 타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쯤까지 도달한 중증 중독자에게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은 술을 제외한 나머지 때문이다. 사실 본인도 안다. 이 모두 술 때문임을. 중독에 진 스스로가 자초한 상황임을. 하지만 이미 자신 곁에는 술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면 혼자 텅 빈 식탁에 앉아 알코올에 흠뻑 절인 왕관만 핥고 있을 뿐이다. 저녁에도, 점심에도, 결국 술이 깨는 즉시 충동이 나면 하루 중 언제라도.
혼자 사는 이라면 과정만 조금 다를 뿐 결과는 같다. 이유가 있을 때만 술을 마시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유를 만들어서 술을 마신다. 그러다 보면 머지않아 이유 없이 술병을 찾게 된다. 곁에서 말려주는 이가 없으니 그 과정은 더 신속하고 간결해진다. 누군가와 같이 사는 이는 주변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말릴 이라도 있는데, 혼자 사는 이는 피해를 줄 누군가가 없지만 술병을 뺏고 침을 튀기며 싸워줄 누군가도 없다. 물론 혼자 지내니 가정을 이룬 이만큼 폭음하지는 못한다. 이러다 언젠가 발견되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겠다 싶으니까. 대신 조금씩 조용히, 꾸준히 오랫동안 자신의 왕관을 깎아가는 과정을 거친다. 화를 낼 누군가가 없어서 대신 모니터 너머 세상에 울분을 쏟아내고, 외로움을 안주 삼아 나날이 마시는 양과 시기를 늘려간다. 그것이 사실 알코올을 흡수하는 안주가 아닌 술에 녹는 독약인 지도 모른 채로.
그래서 내가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장 경계했던 대상은 술이다. 기분 좋아서 한 잔, 안 좋은 일이 있어서 한 잔, 기념할 일이 있으니 한 잔, 누굴 만났으니 한 잔, 글이 잘 안 풀리니 한 잔, 오늘 날이 추우니 한 잔, 왠지 글이 잘 써지니 글빨 더 오르라고 한 잔, 이러다 보면 끝이 없다. 곁에서 말려줄 이가 없으니 한 번 내리막으로 접어들면 여간해서는 멈출 수 없다. 나는 원래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니까. 나는 스스로를 잘 통제하는 사람이니까. 이건 아무 의미 없다. 술에 대한 호불호는 중독되는 과정을 조금 늘릴 뿐이고, 높은 통제력은 중독자가 되는 시기를 조금 늦출 뿐이다. 혼자 오래 살았지만 술뿐만 아니라 무엇인가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세 가지를 가지고 있다. 목표와 기준, 그리고 대안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 일에 집중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는 목표와, 어떤 기준으로 접하겠다는 명확한 기준, 그리고 스트레스든 괴로움이든 외로움이든 해소할 수 있는 다른 방법까지. 나 같은 경우 맨 정신으로 글쓰기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해야 할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 작업도 ,만남 약속도, 집안일조차도 완료되지 않으면 심적으로 방해가 되니까.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취해있으면 안 된다. 취한 상태로는 하기 힘든 일이고, 취하면 잠드는 특성도 문제다. 그리고 혼자 술을 마실 계기는 기분이 좋고 나쁨의 감정이나 기념일 같은 상황으로 잡지 않고 오직 횟수로만 잡는다. 1년에 4번 이하. 4번까지는 기분이 좋은 나쁘든, 기념할 일이 있든 없든, 그냥 오늘 왠지 술이 생각나면 마셔도 된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 술을 마시는 일은 1년에 6번 이하. 이것은 생활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을 자주 만날 때는 12번까지도 늘어나고, 지금처럼 거의 만나지 않을 때는 4번까지도 줄어든다. 이 부분은 오랫동안 스스로를 잘 조율해왔기에 유동적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을 워낙 멀리 하며 살았기에 술이 당기는 날도 거의 없지만) 속상한 일이 있거나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많이 외롭거나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면 나는 마음을 달래고 화를 풀고 나를 위로할 다양한 방법을 이미 가지고 있다. 지난 세월 동안 그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고 이쯤 돼서는 나쁘지 않게 마련해놨다. 그중에 역시 첫 번째는 글을 쓰는 일이다. 때로는 평소라면 하지 않을 번거롭고 복잡한 음식을 만들어서 배부른 돼지처럼 느긋하게 먹기도 한다. 잘하지는 못해도 요리는 오래 해왔으니까. 또는 차분히 커피를 내려서 창밖을 보며 오래 서있기도 하고, 자원 낭비지만 연필 한 자루를 천천히 깎기도 한다. 그래서 내 집에는 쓰지도 않을 연필이 뭉텅이로 쌓여있다. 오래 되어서 나무가 바싹 말라 글씨를 쓸 만큼 튼튼하지는 않지만 이럴 때 요긴하게 사용 중이다. 아니면 가보지 않은 동네에서 온통 처음인 길과 풍경을 보며 무릎이 쑤실 때까지 오래 걷을 때도 있다. 그러다 어느 카페에 들어가 평소 시키지 않을 법한 음료를 시켜놓고 몇 시간이고 창밖 하늘과 신호등, 지나가는 차들을 보기도 하고. 그렇게 이것저것 다 해도 안 돼서 결국 어떤 중독의 힘을 빌려야만 한다면 차라리 줄담배를 피운다. 최소한 취해서 사고를 치지는 않으니까. 산소 부족으로 기절할 수는 있어도 타인에게 화를 내고 난동을 부릴 일은 없으니까.
나는 14년에, 내가 술을 많이 마실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마시고자 하면 매일 얼마나 많이 마실 수 있는지. 여섯 병쯤 마시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네 시간 동안 울 수 있는 사람인 것도, 한 달 내도록 마시다가 모르는 동네에서 깨어날 수 있는 사람인 것도 알았다. 그리고 그보다 한참 전인 2003년에, 나는 내가 술을 매일 마시면 주변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는지도 알게 됐다. 그렇기에 나는 1년에 두세 번 겨우 술을 마시는, 그것도 맥주 한 캔조차 다 먹지 못하고 버리기 일쑤인 삶을 살면서도 역설적이게 평생을 알코올 중독과 투쟁하며 지내왔다. 자신이 혹시 중독되지 않도록, 그리고 이미 중독된 이와 가까운 사이로서도. 2003년에는 그 중독에서 운 좋게 벗어난 거지만 최소한 2014년에는 03년부터 오래 쌓아온 노력이 왕관을 끌어안은 채 술잔에 빠져 익사하는 중인 나를 끄집어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이어지는 이 역사가 훗날 자칫 빠질지도 모르는 나를 다시 구해주리라 기대하고 있고.
25. 0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