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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5일, 그들에게 받은 것

by 이한얼






오늘은 기쁜 날이다. 그것은 맞다.


불현듯 눈이 떠졌다. 7시였다. 유튜브에서 뉴스를 트니 이제 막 체포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사다리로 버스를 넘고, 꽂혀 있는 키로 시동을 걸어 버스를 빼낸다. 그리고 형사들이 관저를 향해 우르르 올라간다. 마지막 초소에 도착한 시간은 8시가 지나서, 그리고 관저로 들어간 시간은 8시 반쯤이었다. 9시쯤 곧 수갑을 찬 모습을 볼 줄 알았더니 웬 걸. 10시 30분까지 졸린 눈을 비비며 기다려야 했다. 졸음은 점점 답답함으로, 그리고 참담함으로 바뀌어갔다.

오늘 체포 과정은 단지 체포되었다는 안도감만 있을 뿐 그 어떤 카타르시스도 없는 과정이었다. 새삼 다시 느꼈다. 고위 공직자든 국회의원이든, 좋은 사람이든 나쁜놈이든, 저 자리에 가면 일반 시민과 같은 정서를 공유할 수 없나 보구나.


내가 그동안 그토록 분노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남들과 어울러 살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 사회의 일원으로 지내기 위해 여러 가지를 합의했다. 권력을 대의제에 양도하고, 공권력을 인정하고, 국가에 엮인 세금과 징병이라는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투표라는 권리를 실행해왔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 나라 중 어느 정도 강한 공권력을 가졌든 상관없다. 국민으로서 행해야할 의무와 치를 대가가 어느 정도인지도 관계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설령 가혹한 공권력이라도 모두에게 동일하다면 그것은 견딜 수 있다. 모두에게 가혹하지 않고 적당하더라도 특정 누군가에게만 관대하다면 그것은 용인할 수 없다. 그것은 합의하지 않았으니 견딜 수 없고, 양도하지 않았으니 참을 수 없다. 하물며 우리는 힘없고 수가 적은 시민에게 지금껏 공권력이 얼마나 엄정했는지 알고 있다. 작은 세금 계산서 종이부터 광화문의 살수차까지, 저 멀리 제주부터 가까운 용산까지, 나라가 우리에게 어찌나 가혹했는지도 너무 잘 알고 있다. 근데 우리에게만 가혹하고 특정인에게는 관대한 공권력이라면 어찌 분노하지 않을까.

내가 바라는 것은 단순하다. 누구든 나에게 했던 만큼만 해라. 경찰이 나를 냉정하게 체포했으면 누구에게도 그렇게 해라. 검찰이 내게 엄격하게 수사했으면 어느 누구도 예외를 두지 말고 똑같이 해라. 법원이 나에게 엄정하게 법을 집행했으면 스스로를 포함한 모두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라. 내게 괘씸한 놈이니 더 하라는 말이 아니다. 맞을죄를 졌으니 죽을죄로 벌하라는 말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라는 말이다. 내가 원하는 나라의 국격, 행정수반의 품위, 최고 권력자에 대한 예우는 이런 것이 아니다. 자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함으로서 스스로 품격을 깎은 이가 있다면 수색견을 풀어서든, 머리채를 잡아 나오든 최대한 빨리 끌어내라는 뜻이다. 그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실행한 순간 예우를 해줄 필요가 없다. 품위는 그가 1초라도 그 자리에 오래 머물 때 더 손상된다. 나라의 국격을 지키는 일은 무릎으로 기어가서 손바닥으로 발 딛을 곳을 일일이 표시해주는 것이 아니다. 오토바이를 붙이고 경호차량을 대동해서 수사실까지 모셔가는 것도 아니다. 적법한 영장 집행을 막아서는 이가 있다면 누구든 현장 체포하면서 다른 범법자를 체포할 때와 똑같이 양팔을 끼고 나오는 것이다. 스크럼과 철조망, 차벽과 기관총을 보며 2주씩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특공대건 살수차건, 헬기건 수색견이건, 광수대건 기동대건, 장갑차건 방패병이건, 저격수건 지명수배건, 이 나라 집행부가 가진 모든 역량을 투입하여 정당한 영장 집행이라는 법치를 강하게 시행하는 일이다. 내가 평소 공권력을 인정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래서였으니까. 누군가 사법체계의 근간인 영장제도를 화기와 냉병기를 통해 저지하는 테러를 일으킨다면 우리의 주권과 세금으로 이룩한 모든 공권력을 동원해 테러범을 제압할 것이라 믿기에 나라에 합법적 폭력을 위임한 것이다. 백 번 양보해 유혈 사태를 되도록 피하기 위해 오랜 준비와 작전 수립이 필요할 수는 있다. 1차시도 때 준비 부족으로 벙어리 삼룡이처럼 터덜터덜 무기력하게 언덕길을 내려올 수도 있다 치자. 소재 파악과 추가 체포 영장을 위해 일주일을 더 기다릴 수도 있다 치자. 그렇다고 해서 유혈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경호원이 부당한 지시를 거부한 채 대기동에서 나오지 않게 되었으니 그간의 기다림은 이것을 위함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 오전 8시 30분 이전까지는 무기력과 무능력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모든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관저에 들어간 이후로는 그러면 안 됐다. 대부분의 경호원이 이탈하여 고작 차장과 본부장 등 몇몇만 남은 관저에서는 그랬으면 안 됐다. 유혈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한없이 낮아진 그때는 관저 안에서 영장을 집행하는 이가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하는 일은 어떻게 체포할 것인지에 대해서다. 정확히는 이른 새벽부터 지금까지 모든 카메라 렌즈를 통해 전국에서 지켜보고 있을 이 많은 국민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지. 더 정확히는 12월 3일 갑자기 날벼락처럼 계엄이라는 인재를 뒤집어쓴 이후 국회 앞에서 경찰과 특전사와 공수여단 장갑차와 드잡이를 했던 국민들부터, 매일 매주 추운 길거리로 나가서 응원봉이든 촛불이든 가장 높게 들어 올렸던 국민들까지. 그리고 벌써 40일 넘게 불면증에 시달리며 언제 이 사태가 진정될까 뉴스에서 눈을 못 떼는 국민들부터, 제발 빨리 끝나라고 지옥에서 기도를 하는 심정으로 세제 대신 눈물로 텅 빈 테이블을 닦는 국민들까지. 이 모든 국민들에게 오늘 이 상징적인 장면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를 고민했어야 했다. 국가기관이 정녕 국민의 기관이고 국민에 의해 존재하고 국민을 위해 이행된다면 기관의 대표자이자 국민의 대리인으로서 그 자리에서 논의해야 할 일은 경호를 어디까지 할 것인지, 언제까지 할 것인지, 정문과 후문 중 어디로 들어갈 것인지가 아니다. 뒤에 형사들을 세워둔 채, 영장 집행을 방해하는 이는 누구든 현장 체포한다고 선언하고, 그리고 카메라 렌즈를 막을 요량으로 세워둔 버스를 빼서 관저 앞까지만 조금 걸을지 아니면 저 아래 카메라가 닿는 곳까지 수갑을 차고 오래 걸어갈지, 이런 논의를 했어야 했다. 지난 2주간 자진 출석할 수 있던 기회를 스스로 놓았으니, 더이상 변호인단이 아닌 영장을 집행하는 검사들끼리 논했어야 했다. 반대쪽에서 예우 소리가 나오면 그건 위헌으로 범벅된 계엄 이전에 찾으라고 일축하고, 현직 대통령이니 경호를 해야겠다면 지금까지 너무 과하게 했으니 막아서면 경호차장 체포 영장부터 집행하겠다고 엄포를 놓아야 했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괴롭고 지난했던 이번 사태의 중반전이 어떻게 끝나는지 명확히 보여줘야 했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어떻게든 체포는 했습니다. 우리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정녕 민주주의 법치국가라면 체포는 결국 됐을 것이다. 우리는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어떻게 체포되는지가 중요했다. 사방에서 수색견이 왕왕 짖으며 머리채를 잡혀 끌려나오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수갑을 찬 채 형사들에게 양팔이 꾀어 관저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모습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뿐이다.

국민 여러분! 이 나라는 누구에게나 동등한 공권력을 행사합니다! 모두가 왕인 나라에서 자신만 왕이 되려했던, 민주주의 국가에서 혼자만 관대한 공권력을 가지려 했던 이는 국민 여러분께서 그간 누리고 부담해야 했던 것과 동일한 크기의 공권력으로 제압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동안 괴로움과 두려움, 분노와 수치심에 잠을 설치셨던 모든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가 가진 모든 권력의 주인이지만 이번 사태에서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적어 너무나도 답답했던 국민 여러분! 그래서 이 겨울날에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이것뿐이라서 응원봉을 들고 은박담요를 두른 채 차디찬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혹은 나가지 못했지만 멀리서 응원했던 모든 국민 여러분! 이제 안심하십시오! 계엄은 오늘에서야 진정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안심하십시오! 여러분이 나라에 맡기신 공권력은 앞으로도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작용될 것입니다!


작년 12월 14일, 국회의장이 의장대에 서서 찬성이 204표임을 외쳤을 때, 그리고 의사봉을 두 번 내리치고 잠시 멈칫했다가 마지막 한 번을 강하게 내리쳤던 그날 그 순간, 나는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한 누구도 강제로 내 것을 뺏어갈 수 없다. 전 국민에게 그런 시도를 한 이가 있다면, 그 시도를 한 이는 반대로 우리에게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겨야 한다. 그게 이 나라에 모여 사는 우리가 합의한 약속이고, 그 과정은 민주적으로, 그 결과는 법치로 하겠다는 공통된 선언이다. 그래서 그날은 내 것을 강제로 뺏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러려는 이를 배재했음에 기쁠 수 있었다. 그 과정이 투명하고 단호해서 기쁨 역시 명확했다. 해가 지고 사위가 컴컴해진 어느 건물 옆 흡연구역에서, 줄줄이 응원봉과 깃발을 들고 신길역 쪽으로 걸어가는 주권자의 물결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이 나라 국민임이 자랑스러웠고 뿌듯했다. 당시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이가 사랑스러웠으며, 몸은 여기 없지만 마음만은 함께일 터인 전국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웠다. 그날 국회가 우리에게 준 것은 단지 가결표만이 아니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를 뿌듯이 여기고 이 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자기애의 토대 역시 함께 제공했었다. 대의제의 대주자들이 지난 10일간 우리에게 보여준 눈부신 노력과 명확한 효용감에 우리는 흥겨운 분노와 찬란한 불빛으로 되돌려줬고.

반면 오늘 오전, 예닐곱 대의 경호차가 한남대교를 건너는 모습을 보며 내가 느꼈던 감정은 단순히 양가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안도감과 답답함, 억울함과 부족함, 기쁨과 분노, 괴로움과 수치심 등이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공수처 후문에서 절정에 달했다. 차량에서 나온 뒤통수가 코너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지난 한 달 동안, 길게는 3년 전에 손바닥에 왕자를 본 순간부터 그렇게 보기 싫었고 너무나도 잡고 싶었던 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로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감정을 위해 나는 그동안 찬바람을 맞으며 서있었던 건가. 새벽에 눈이 떠지면 주섬주섬 뉴스를 켜서 자취를 따라왔던 건가. 응원봉은 없지만 국회 앞에서 수많은 뒤통수 너머 의사당 돔을 노려보며 간절하고 절박하게 기다려왔던 순간이 과연 이것이 맞는가. 불쑥, 지금껏 너무 잘해왔고 지금도 잘하고 있는 의원들에게까지 서운함이 든다. 왜 그들은 여기 없을까. 어째서 어느 한 사람도 달려가서 이런 모습으로 체포되면 안 된다고 외치지 않을까. 저쪽 의원들은 오늘도 전화 한 통에 잘도 달려갔던데 왜 우리쪽은 누구 하나 달려가서 이런 식의 체포는 신병만 확보할 뿐이라고, 이런 모습으로는 국민의 마음을 달래줄 수 없다고, 빨개진 코와 꽁꽁 언 볼로 고함치지 않았을까. 누구든 저쯤 높이 올라가면, 좋은 사람이든 나쁜놈이든, 너무 많아 일일이는 힘이 없는 우리의 정서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 걸까. 너무도 잘하고 있는 이를 탓할 일이 아니었지만 서운함에 저런 탄식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오늘은 기쁜 날인가? 그래, 그건 그렇지. 다른 이들 역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지만 대부분 그렇게 정리하기로 한 듯하다. 일리 있고 이해된다. 우리에게는 아직 후반전이 남았으니까. 근데 정녕 그래도 되는 걸까. 후반전마저 끝나고 나면 우리는 얼어붙은 손으로나마 서로의 등을 뜨겁게 다독여주고 있을까. 그때 우리는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명확한 기쁨과 찜찜함 없는 뿌듯함을 느끼는 중일까.





25. 0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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