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 뒤에 산다
잠결에 현관문밖에서 쿠당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억센 지퍼를 뜯는 소리, 물건을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직감적으로 무엇을 하는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벌떡 일어나 잠이 덜 깬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사위가 조용하다. 방금 내가 들은 소리가 현실에서 난 소리가 맞나. 아니면 꿈결에 들은 건가. 밤새 끈 하나만 남기고 다른 세계로 떠나있던 의식을 몸에 천천히 접착시켰다. 확인해보면 알겠지. 바로 현관문을 열어봤다. 배송 물품들이 맨바닥에 덜렁 놓여있었다. 문이 열리는 동선 바로 앞에. 원래 프레시백을 놓아두는 문 옆 자리는 덩그러니 비어있었다. 어이구, 선 넘네. 반 층 내려가 창밖을 보니 배송 차는 보이지 않았다. 의식을 접착시키는 시간 동안 가버렸나 보다. 이때가 13시였다.
어제저녁에 냉장식품을 주문했다. 물류 센터가 집 근처라서 그런지, 자정 이전에 주문하면 금세 배송이 오곤 했다. 보통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 이를 때면 2시에 올 때도 있었다. 어제도 4시쯤 오지 않을까 기다리다가 결국 5시쯤 잠들었다.
문을 닫고 들어와서 스마트폰을 보니 5시 35분에 배송 완료 알림이 와있었다. 어제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받았겠네. 이전까지는 오자마자 바로 받아서 냉장고에 넣어뒀으니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그리고 7시쯤에 프레시백을 수거하겠다는 카톡도 와있었다. 그리고 지금이다. 13시쯤 프레시백을 수거하러 온 직원은 아마 수거하려고 들다가 안에 상품이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내가 잠결에 처음 들은 우당탕 소리는 상품이 담긴 프레시백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는 소리였겠지. 그리고 지퍼를 열어 상품을 문 앞 계단 바닥에 꺼내놓았을 것이고, 그리고 프레시백을 가져갔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많이 피곤했나.
담배를 피우며 방금 들었던 소리와 사라진 프레시백, 바닥에 놓인 상품 등을 근거로 상황을 재구성하다 보니 저런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프레시백 수거에 시간 제한이 있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있어도 꽤 넉넉한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 이 주소에 사는 사람이 으레 배송을 받자마자 상품을 꺼내놓는 성격이라 이제까지는 프레시백을 바로 수거할 수 있었다 해도, 배송한 지 7시간도 지나지 않아 수거하러 왔을 때 안에 상품이 그대로 있으면 그냥 놔두고 가야 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
이렇게 타인의 배송품을 임의로 열어 물건만 바닥에 버려두고 프레시백을 가져간다고? 냉장식품을? 만약 내가 어제부터 부재중이라 저녁 7시쯤 집에 돌아오면 어쩌려고? 혹은 외부 일정 때문에 내일 오면 어쩌게? 내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어찌 알고? 그것을 알 수도 없지만 설령 내가 집에 있음을 알고 있다 한들 이렇게 물건만 내버려두고 프레시백을 챙겨가는 것이 가능한가?
상대의 행동을 이해해보기 위해 여러 각도로 생각해봤지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 이럴 때는 본사에 물어보자. 내 상식과 이런 어이없는 기분은 더없이 타당하다 생각하지만 일단 확인해보자. 문의센터에 들어가 있었던 일을 보고서처럼 그대로 적었다. 아까 상품을 발견했을 때 찍어놓은 사진도 첨부하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되네. 왜 그랬을까.
그리고 1시간 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원래 휴대폰 번호가 아니면 전화를 받지 않는데 왠지 발신처가 어딘지 알 것 같아 받았다. 고객 센터였다. 내가 문의를 올린 본인인지부터 확인하고, 문의 내용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 후 앳된 목소리의 상담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 상황이면 저라도 황당했겠네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이번 일은 상담원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나 역시 내내 차분히 웃으면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문의를 남겼다는 말을 했고. 저 말을 들으니 언짢았던 마음이 해소됐다. 남에게 동의를 구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저렇게 말해주니 기분이 좋았다. 그러는 동시에 다른 의미로 마음이 안 좋았다.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대신 사과해야 한다니 여러모로 손해 보는 입장이겠구나. 그러니 상담원님 잘못도 아닌데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최대한 정중히 대꾸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 배송된 상품에는 문제가 없는지, 연락해서 이 부분에 대해 분명히 교육을 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다른 문의 사항이 있느냐는 말에 나는 더는 없다고, 빠르게 전화주고 친절히 응대해줘서 고맙다고 답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어쨌든 일어나자마자 누군가로 인한 작은 언짢음이 있었지만 금세 다른 누군가의 친절에 의해 그 마음은 곧장 상쇄됐다. 양쪽 행위자는 서로 다른 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상대 스스로 결자해지했다고 여겨도 되겠지.
25. 01. 21.